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45) / 초경과 총탄 - 조정인의 ‘지하드’ - 뉴스페이퍼 (news-paper.co.kr)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45) 초경과 총탄 - 조정인의 ‘지하드’
지하드 / 조정인
포인세티아 손톱만 한 속엣것이
이상하다 바닥에 뚝. 선혈처럼 진다
어제 밤새에도 뚝뚝 앳된 꽃잎을 흘려놓더니
초겨울 임시보호텐트 새우잠에서 눈뜬
차도르 속 겁먹은 검은 눈동자 젖어온다
새로 깐 요 홑청을 적시던
초경의 아침은 그렇듯 문득 찾아오질 않던가
오늘 무슬림의 한 소녀 홀로 해 뜨나보다
울컥울컥 꽃잎을 쏟아내다 보다
꽃을 통과하는 한 발 총성
펄럭, 들쳐지는 지구의 속엣것에
점점이 붉은 체온 번진다
-『리토피아』(2002. 봄)
<해설>
‘지하드’는 성전(聖戰)으로 번역되는데, 이슬람교도들에게 성전을 치르며 이슬람교를 전파하는 것은 신성한 종교적 의무다. 정치적인 투쟁에 종교적인 의무를 부여한 것은 이슬람의 오랜 전통이었다. 그런데 이 시의 제목은 성전(聖戰)이 아니라 성전(性典) 같다.
여성의 회임 능력은 초경으로부터 시작된다. 초경―성스럽기도 하고 속되기도 한 것, 아름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것. 초경을 맞은 소녀가 있는 곳은 팔레스타인 난민촌의 임시보호텐트다. 초경의 피를 흘리는데 총성이 울리고, 소녀는 젊음을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숨을 거둔다. 시의 급반전은 제4연에서 이루어진다. 꽃(소녀의 성기?)을 통과한 한 발의 총알은 이스라엘 군인이 쏜 총에서 나온 것일까? 그 총을 나는 남성의 성기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마지막 연을 보라. 소녀는 초경을 맞이한 날 총탄을 맞고 죽고 말았다. 이 시는 소재 선택과 주제 설정도 새롭지만 전개 방식과 전환의 과정이 너무나 새롭다. 초경으로 피 흘린 소녀가 총탄으로 또 피를 흘리다니! 이런 비극이 어디 있는가. 중동에 총성이 멎을 날이 언제 올 것인가.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 뉴스페이퍼 2019.05.29
/ 2022.04.07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