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사상의 최전선>Q : 인간만이 사회를 구성하는가 (daum.net)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Q : 인간만이 사회를 구성하는가
A : 인간만이 아닌 자연·사물과의 공존… 바람직한 결합 모색해야
②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1947~ )
인간만으로 구성된 사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 즉 이질적 연결망이다.
사물의 의회란 어떤 하이브리드를 사회에 수용할 것인지,
수용할 경우 어떤 위치와 역할을 부여할 것인지를
인간과 비인간의 다양한 대변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고 결정하는 민주적 포럼을 뜻한다.
2018년 10월 ‘뉴욕타임스 매거진’에는 커다란 인물 사진과 함께 ‘탈진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 과학 방어에 착수하다’라는 기획 기사 한 편이 실렸다. 기사 제목 아래에는 흥미로운 질문이 덧붙었다. “그는 과학자들의 권위를 해체하는 데 수십 년을 보냈다. 오늘날 그의 아이디어는 과학자들이 과거에 누린 권위를 되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기후 과학을 부정하며 기후변화협약을 탈퇴한 오늘날, ‘뉴욕타임스 매거진’에서 이토록 중요한 인물로 조명한 브뤼노 라투르는 누구인가? 프랑스 학자 라투르는 철학, 인류학, 사회학을 자유롭게 횡단하며 과학기술, 근대성, 생태 위기 등 세계의 핵심 문제에 대해 독창적 이론을 제시한 사람이다. 라투르의 이론은 ‘행위자-연결망 이론(ANT·Actor-Network Theory)’이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라투르는 1970년대 후반 과학기술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개척했다. 그는 근대 과학 지식이 어떻게 생성되는지를 알아보고자 ‘과학이 만들어지는’ 현장인 실험실로 직접 들어가 과학자들의 연구 생활을 약 2년 동안 참여 관찰했다. ‘실험실 생활’(1979)은 이때의 연구를 바탕으로 쓴 책으로, 과학 지식을 자연의 객관적 재현으로 보는 실증주의적 과학관과 과학 지식을 과학자 사회에 의한 사회적 구성물로 보는 사회 구성주의적 과학관 모두를 넘어서는 제3의 과학관을 제시했다.
라투르가 보기에 과학적 사실은 과학자들이 자연을 관찰함으로써 발견하거나 단순히 상호 주관적 합의를 통해 구성해 내는 대상이 아니다. 인간 과학자 못지않게 비인간 사물도 과학 지식을 만들어 내는 행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균, 실험동물, 현미경, 시험관, 컴퓨터 등의 비인간 사물이 없었더라면 인간은 오늘날의 과학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라투르는 이런 맥락에서 인간과 비인간이 공동으로 과학을 구성한다고 통찰했다. 인간 과학자들이 비인간 사물들과 안정된 연결망을 구축했을 때 과학 지식이 비로소 성공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라투르에게 영향을 받아 이후 ANT 연구에서는 “행위자를 추적하라”는 말이 방법론적 원칙이 됐는데,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도 행위자로 간주한다는 점이 기존 사회과학과 구별되는 ANT의 큰 특징이다.
라투르는 연구 초기부터 과학기술 인류학을 개척하는 한편 대안적 사회학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는 실험실 연구를 마친 뒤 동물 인류학자 셜리 스트럼의 연구 현장을 관찰하게 됐다. 당시 스트럼은 케냐 개코원숭이들의 생활공간에서 함께 지내며 그들의 사회를 인류학적으로 연구하는 중이었다. 라투르는 이 연구 현장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개코원숭이 사회와 인간 사회 사이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나아가 인간 사회가 번영하는 데 비인간 사물이 어떻게 관여하는지를 깊이 성찰할 수 있었다.
개코원숭이 사회에서는 매우 민감하게 서열을 따진다. 위계질서를 세우기 위해 개체들 간에 경쟁과 협력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매일같이 벌어진다. 개코원숭이는 매번 온전히 자신의 신체적 능력만으로 다른 구성원들과의 사회적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이렇게 발전한 개코원숭이 사회에는 인간 사회 못지않게 복잡하고 고유한 질서가 있다.
그러나 개코원숭이 사회는 인간 사회에 비해 압도적으로 규모가 작고 안정성도 떨어진다. 개코원숭이 사회와 인간 사회는 어째서 이렇게 다를까? 라투르에 따르면, 인간이 사회관계를 안정화하는 데 비인간 사물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 외에도 도구, 기술, 무기, 교통 및 통신 수단 등을 개발하면서 더 폭넓고 안정된 관계를 영위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인간은 과속방지턱을 고안해 자동차 주행속도를 제어해 냈다. 초등학교 앞 우선멈춤 안내판을 무시하고 달리는 운전자들도 과속방지턱 앞에서는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다. 도덕적 당위성을 상기해서가 아니라 턱을 그대로 넘으면 자신의 자동차에 손상이 가기 때문이다. 이렇듯 과속방지턱은 운전자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어엿한 행위자이며, 교통경찰이라는 인간의 역할을 대신해 사회의 안정에 기여하는 사물이다.
따라서 전통 사회학에서 당연하다고 전제해 온 ‘사회’나 ‘사회적인 것’은 개코원숭이 사회에나 적합한 개념이다. 인간만으로 구성된 사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 즉 이질적 연결망이다. 그러므로 사회학은 사회적인 것의 사회학이 아니라 결합의 사회학을 지향해야 한다. 또한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은 개인과 같은 미시적 수준에서 국가와 같은 거시적 수준으로 확대될 수도 있고 거시적 수준에서 미시적 수준으로 축소될 수도 있기 때문에 미시와 거시를 구분하는 이분법도 불필요하다.
라투르는 인류학적·사회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1990년대부터 근대성과 생태 위기에 대한 정치 철학적 사상을 전개했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에서는 근대주의의 이원론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았다. 데카르트의 정신·물질에서 시작해 칸트의 주체·객체로 이어진 이원론적 사고에 따르면, 인간의 영역과 비인간의 영역은 존재론의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분리돼 있다. 이원론에 바탕을 둔 이러한 인식은 근대에 접어들며 보편화됐다. 이에 따라 인간 세계인 사회(또는 문화)와 비인간 세계인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사고방식도 일반화됐는데, 라투르는 사회와 자연을 분리하는 과정을 ‘정화 작업’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러나 인간만으로 구성된 사회와 비인간만으로 구성된 자연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과속방지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근대인도 인간과 비인간을 결합해 삶을 영위해 왔다. 라투르는 근대인의 ‘정화된’ 사고방식과 모순되는 하이브리드화 실천을 ‘번역 작업’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근대인은 자연·사회 이분법을 확고히 믿었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 내는 하이브리드의 역할도, 하이브리드를 생산했을 때 발생할 결과도 인식할 수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비가시화는 하이브리드를 무한히 생산하는 동력이 됐고, 근대화가 대규모 성장으로 이어진 이유가 되기도 했다. 라투르는 오늘날의 지구적 생태 위기도 이러한 모순 때문에 초래됐다고 진단한다. 인간은 하이브리드 생산이 가져올 결과를 알지 못한 채 하이브리드를 부주의하게 양산했고, 이 하이브리드들이 낳은 온실가스, 미세먼지, 플라스틱 폐기물 등은 인간에게 또다시 비가시화된 채 전 지구적 환경 파괴를 유발했기 때문이다.
생태 위기를 해결하려면 하이브리드들에게 정당한 존재론적 위치를 부여하는 동시에 인간과 비인간의 바람직한 결합을 추구하는 새로운 원리가 필요하다. 하이브리드의 역할을 가시화하는 인식과 실천의 원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려면 과학은 비인간 세계만을, 정치는 인간 세계만을 각각 다루는 것을 당연시하는 잘못된 이분법을 벗어나야 한다. 라투르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새로운 비근대주의 정치의 장인 ‘사물의 의회’를 구축해 정치의 영역에서도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을 본격적으로 다루자고 제안했다. 사물의 의회란 어떤 하이브리드를 사회에 수용할 것인지, 수용할 경우 어떤 위치와 역할을 부여할 것인지를 인간과 비인간의 다양한 대변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고 결정하는 민주적 포럼을 뜻한다. 유엔의 기후변화 회의가 그 예 중 하나다.
라투르는 그 후에도 지구적 생태 위기를 해결하고자 비근대주의 정치 생태학을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어 왔다. ‘자연의 정치학’(1999)에서는 사물의 의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를 논하며 인간과 비인간의 공동 세계를 구성하는 가설적 모델을 제시했다. ‘가이아 마주보기’(2015)와 ‘지구로 내려오기’(2017)에서는 오늘날의 지구적 생태 위기를 ‘신기후 체제(new climate regime)’라고 명명하고 신기후 체제의 복합적 측면을 자세히 분석했다. 또한 기존의 자연 개념으로는 신기후 체제를 분석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면서 지구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1960년대 말에 제시한 ‘가이아’ 개념에 주목했다. 가이아 가설에서 지구는 일종의 유기체로, 생물과 무생물이 상호작용하며 항상성을 유지한다. 라투르는 자연 개념보다 이러한 시각이 신기후 체제의 인간 활동과 자연 세계, 그 사이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수많은 연결과 행위자들을 묘사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18년에는 지구 시스템 과학자 티머시 렌턴과 함께 ‘가이아 2.0’ 이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가이아 2.0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기술과 공진화하며 지구의 자기 조절 과정에 개입한다. 인간은 스스로가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더 잘 인식하게 되면서 자신의 행동을 의식적으로 조절하는데, 지구 또한 인간의 개입에 따라 재차 작동 방식을 바꾼다. 라투르는 이러한 논의를 통해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는 한편, 지구의 모든 생명이 함께 번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이처럼 라투르의 정치 생태학은 생태 위기에 대한 비관적 전망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긍정의 철학을 보여 준다. 인간 중심적 이원론을 벗어나 사물의 의회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바람직한 공동 세계를 구성해 나가는 것이 바로 그 길이다.
김환석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
■ 브뤼노 라투르는
분야- 과학기술학, 철학, 인류학, 사회학
사상- 행위자-연결망 이론
주요활동·사건- 비근대주의 철학, 카를스루에 ZKM 전시회 큐레이팅, 홀베르상 수상
약력 - 1947년 프랑스 출생. 부르고뉴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 1975년 투르대에서 성서 주해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 1982∼2006년 파리국립고등광업학교 혁신사회학센터 교수 역임. 동료 미셸 칼롱과 함께 과학기술학의 대표 이론으로 발전하며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행위자-연결망 이론’을 정립. 2013년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노벨상으로 일컬어지는 홀베르상 수상. 2017년 퇴임.
저작 - 1979년 첫 저서 ‘실험실 생활’을 발표. 이 시기에 ‘과학의 실천’(1987), ‘프랑스의 파스퇴르화’(1988),‘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 ‘판도라의 희망’(1999), ‘자연의 정치학’(1999) 등 발표. 2006년 파리정치대학으로 옮겨 조직 사회학 및 미디어 연구를 지휘. 이 기간에 ‘사실적 신의 근대적 숭배에 대하여’(2010), ‘법 만들기’(2010), ‘가이아 마주보기’(2015) 등을 발표.
문화일보 2019.09.10
/ 2022.03.28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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