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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상의 최전선] Q : 디지털 미디어는 어떻게 인간의 시간성과 기억 방식을 바꾸는가? (2022.03.28)

푸레택 2022. 3. 28. 14:21

<21세기 사상의 최전선>Q : 디지털 미디어는 어떻게 인간의 시간성과 기억 방식을 바꾸는가? (daum.net)

 

<21세기 사상의 최전선>Q : 디지털 미디어는 어떻게 인간의 시간성과 기억 방식을 바꾸는가?

A : 양방향 소통으로 시간 거스르며 현실과 가상공간이 교류(23) 볼프강 에른스트(Wolfgang Ernst, 1959∼)가상공간에 가득 들어찬 일상들문화적으론 인간의 기록이지만기술로는 디지털미디어가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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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근 작가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Q : 디지털 미디어는 어떻게 인간의 시간성과 기억 방식을 바꾸는가?

A : 양방향 소통으로 시간 거스르며 현실과 가상공간이 교류

(23) 볼프강 에른스트(Wolfgang Ernst, 1959∼)

가상공간에 가득 들어찬 일상들
문화적으론 인간의 기록이지만
기술로는 디지털미디어가 주체
기술미디어는 과거의 개념없어
역사의 법칙 거슬러 항상 현재
인류에게 실시간 시간성 안겨줘
사용자 참여로 지속적 업데이트
끊임없이 이동·연결되고 재구성

21세기 인류는 디지털 가상공간에서 자신의 일상을 기록·열람·공유하는 새로운 인간종으로 변모해 왔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마트폰, 노트북, PC 등의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를 매개로 SNS를 비롯한 가상공간에서도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삶을 영위한다. 그래서 이들은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독일 미디어 이론가 볼프강 에른스트에 따르면, 이 새로운 인류는 일차적으로 디지털 미디어 그 자체와 대화하는 존재다. 손가락으로 키보드와 터치스크린을 누르고 저장 및 전송 버튼을 클릭하는 이들의 행위는 그 자체로 디지털 미디어와의 대화이며, 이후 코딩, 전송, 디코딩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받는 수신자는 인간과 디지털 미디어가 나눈 대화의 관객에 가깝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에른스트는 급진적 미디어 결정론의 시각에서 미디어가 기록의 실제 행위자라는 주장을 펼친다. 가상공간에 저장된 삶의 기록들은 원형 그대로가 아닌 이진법 코드로 저장된다. 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기록하는 주체가 인간이지만, 기술적 차원에서는 디지털 미디어들이다.

게다가 가상공간에 저장된 일상의 기록들은 필사와 같은 물리적 기록과 서로 다른 시간적 차원에 존재한다. 물리적 실체가 있는 기록은 오래돼 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거시적 시간성(macro-temporality)을 따르지만, 물리적 실체가 없는 디지털 기록은 사용자의 요구에 의해 문자나 이미지의 형태로 변환돼 일시적 의미를 전달할 뿐이다. 따라서 디지털 기록은 미시적 시간성(micro-temporality)을 따르며 자연적 시간을 거스른다. 다시 말해, 가상의 기록은 언제나 같은 위치에 존재하는 법이 없다. 그 대신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 새롭게 생성되며 다시 0과 1의 무수한 조합으로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21세기 인류의 일상은 점점 디지털의 시간성을 따르고 있다.

◇ 미디어의 시간성은 인간의 시간성과 어떻게 다른가

에른스트는 지난 20여 년 동안 미디어 고고학이 학제 간 연구로 발전하는 데 있어 중추적 역할을 했다. 미디어 고고학은 미디어의 역사를 서술하는 전통적 방식, 즉 선형적이고 진화론적인 서사에서 벗어나 대안적인 시간적 도식으로 미디어의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학문적 기획으로 등장했다. 미디어의 역사를 회귀적 시간, 즉 등장과 소멸과 재등장이라는 틀로 설명하고자 망각되고 배제된 미디어를 발굴해 역사에 기록하고, 미디어의 물질성이 새로운 시대, 지식, 체계 등의 형성에 얼마나 결정적인 행위자인지를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에른스트는 미디어 고고학의 지향을 따르면서도 미디어의 주체성을 더욱 부각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역사에 포섭되지 않는 미디어 자체의 존재 방식에 대해 물음을 던졌다. 그는 사진, 축음기, 전화기, 라디오, 텔레비전, 비디오, 컴퓨터 등 신호 기반 미디어를 ‘시간 결정적 미디어(time-critical media)’라 지칭하고, 이들 미디어가 말과 문자 등 기호로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인간과 달리 어떻게 다른 신호 체계로 정보를 저장·처리·전달하고 고유한 시간성을 지니는지를 파헤쳤다.

에른스트는 과거 나치가 이념 선전을 위해 보급한 ‘국민 라디오(Volksempfanger)’를 예시로 든다. 독일의 문화사를 보여 주는 유물로서 박물관에 전시될 경우, 국민 라디오는 과거의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붙박여 있다. 하지만 이 기술 미디어가 여전히 작동 가능하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제작된 라디오에 전원을 연결할 수 있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히틀러의 목소리가 아니라 현재의 주파수를 통해 전달되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의미에서 국민 라디오는 역사적 유물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오래전에 끝났지만, 주파수 방식의 라디오 방송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적 차원에서 라디오의 소리 전달 및 전송 방식은 여전히 연속적 역사를 이루고 있다. 이렇듯 라디오와 같은 신호 기반의 미디어는 기록된 시간 또는 제작된 시간에 고착돼 있지 않고, 역사의 법칙을 거스르며 언제나 현재라는 시간성을 표출한다.

이런 이유에서 에른스트는 기술 미디어가 인간과 단절된 독자적 역사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아날로그 라디오는 아무리 과거의 것일지라도 모든 라디오 방송이 디지털 송신과 수신 시스템으로 개편되기 전까지는 현재의 주파수 신호로 소리 정보를 만들며 현재라는 시간 안에 존재한다. 녹음된 음악과 실시간 생방송은 문화사적으로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하지만, 라디오 신호를 통하면 둘 다 동시대의 소리가 된다. 그래서 미디어 문화사와 달리 기술 미디어에서는 역사적 과거라는 시간적 개념이 드러나지 않는다. 라디오 신호가 선사하는 신비한 현재성은 오늘날 누군가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볼 때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에른스트에 따르면, 시간 결정적 미디어는 고유한 방식으로 시간을 나누고 기록하고 조작하며 각자의 시간성을 생산한다. 따라서 지구상에는 인간의 시간만이 아닌 미디어만의 시간으로도 가득하다. 일례로 기계적 저장 미디어인 사진, 축음기, 영화는 간헐적, 순간적, 반복적이라는 불연속적이고 단절적인 시간성을 문명에 선사했다.

반면에 전자 미디어인 라디오, 텔레비전, 비디오 등은 기계적 저장 미디어보다 더 짧은 시간 간격으로 신호를 처리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지각 범위를 초월한다. 이는 인간 문명에 ‘실시간’이라는 새롭고도 비인간적인 시간성을 선사했다. 나아가 가장 짧은 시간 간격으로 작동하는 디지털 미디어는 미디어 역사에 혁신적 단절, 즉 간격 기반의 시간에서 계산 기반의 시간으로 대전환을 이뤄냈다. 디지털은 사용자 중심의 실시간 양방향 소통이라는 시간성을 제시함으로써 현실과 가상공간 사이의 공유와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

◇ 디지털 미디어는 어떻게 새로운 기억 방식을 낳는가

비인간적 시간성과 인간 문명의 충돌은 미디어 문화사에서 줄곧 다뤄 온 주제지만, 에른스트가 제시한 논의에서 새롭게 두드러지는 점은 각 미디어의 고유한 정보처리 방식이 문명의 기억 문화에 드러나는 특징을 결정한다는 점이다. 프리드리히 키틀러가 기술 미디어를 통해 역사 단위의 변화를 설명하려 한 데 반해, 에른스트는 더 나아가 미디어가 고유한 신호 체계로 정보를 저장하고 전송하는 과정 자체가 역사를 이끈다고 주장한다.

에른스트는 특히 공유와 참여, 댓글로 대변되는 디지털 시대 인간의 기억 문화에 어떠한 특징이 나타나는지 묻는다. 21세기는 디지털 미디어의 미시적 시간성이 낳은 시대다. 과거의 물질적 기록은 안정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문화적 기억인 데 반해, 디지털 미디어로 기록하고 저장하는 텍스트와 영상은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기억 방식이다.

디지털 자료는 스트리밍, 인코딩, 디코딩과 같은 방식을 따르므로 언제나 똑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코드에서 기호로 늘 새롭게 생성되며, 단순한 열람을 넘어서 사용자의 참여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된다. 디지털 저장 장치는 종이 문서와 달리 끊임없이 움직이고, 업데이트되고, 연결되고, 재구성된다. 이는 인류가 삶을 기록하고 보관하는 아카이브의 토대, 즉 기억 문화가 고착된 물리적 공간에서 유동하는 가상공간으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21세기 인류의 진화는 생물학적이라기보다 0과 1이라는 비인간적 DNA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미디어 이론은 하드웨어의 작동을 테스트할 때 비로소 실천된다.” 에른스트는 다른 미디어 고고학자들처럼 올드 미디어를 수집하는 방법론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미디어를 분해하고 미디어만이 이해하는 코드와 알고리즘을 분석해 미디어의 작동 원리를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에른스트가 기술적 원리를 파악하는 데 이토록 몰두하는 이유는 특정한 기술 미디어와 문화가 얼마나 오래 유지되고 얼마나 빠르게 확산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오로지 미디어에 의한, 미디어를 위한, 미디어의 역사를 기술하고자 한다.


정찬철 한국외대 미네르바교양대학 교수

■ 볼프강 에른스트

분야: 청각 미디어 이론, 아카이브 이론, 박물관학, 미디어 물질성

사상: 미디어 고고학

주요 활동·사건: 미디어 고고학 아카이브(Media-Archaeological Fundus) 설립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 미디어학 교수다. 1989년 역사주의와 박물관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1년 역사를 기억하고 회상하는 기술 및 기표 체계에 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1990년대 중·후반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영향을 받아 미디어 연구로 학문적 방향을 선회했다.

미디어는 기호(signs)가 아닌 신호(signals)를 처리하며 인간은 이를 지각할 수 없다는 고유의 미디어 중심적 테제를 강조한다. 미디어 내부를 구성하는 기술의 원리와 물질성, 다양한 신호처리 방식이 기억 문화의 변화와 역사의 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파헤쳐 인간의 과거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독특한 미디어 지향적 관점을 컴퓨터, 라디오, 마그네틱 녹음기 등 인간의 삶을 기록·전송·저장하는 아카이브 장치의 분석을 통해 펼쳐 보인다. 미셸 푸코가 아카이브를 문화사 자료의 보관소만이 아닌 인간의 사유, 행동, 표현의 방식을 통제하는 담론의 장치로 규정했던 것의 후속 작업으로서 미디어가 인간을 통제하는 실질적 아카이브임을 밝힌다.

문화사를 기반으로 미디어의 내용을 분석하는 전통적 미디어 연구를 거부하며 실제 미디어가 어떻게 인간과 다양하게 연결돼 인간의 상호작용에서 중대한 기능을 수행하는지를 보여준다. 미디어의 물질성에 대한 미디어 고고학적 탐구를 통해 오늘날 디지털 문화의 기원을 탐구하고, 기술과 문화를 하나의 연합체로 바라보는 인식론적 전환을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오늘날 디지털 문화의 형성에 디지털 미디어가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노아 워드립프루인의 소프트웨어 연구, 닉 몽포르와 이언 보고스트의 플랫폼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표 저작으로 ‘미.디엄 푸.코’(M.edium F.aucault, 2000), ‘동요하는 아카이브’(2002), ‘음향 시간 기계’(2015), ‘시간시학’, ‘디지털 기억과 아카이브’ 등이 있다.

문화일보 2020.02.11

/ 2022.03.28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