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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상의 최전선] Q : 페미니스트 과학자는 낙태를 어떻게 보나? (2022.03.21)

푸레택 2022. 3. 21. 10:03

<21세기 사상의 최전선>Q : 페미니스트 과학자는 낙태를 어떻게 보나 ? (daum.net)

 

<21세기 사상의 최전선>Q : 페미니스트 과학자는 낙태를 어떻게 보나 ?

A : 태아-산모, 독립적 존재 아니기에 낙태도‘내부-작용’따른 현상⑨ 캐런 버러드(Karen Barad, 1956∼)어떤 인간·사물도독립·선험적으로 존재치않아존재하는 것은 현상이며분리되지 않는 성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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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근 작가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Q : 페미니스트 과학자는 낙태를 어떻게 보나?

A : 태아-산모, 독립적 존재 아니기에 낙태도‘내부-작용’따른 현상

⑨ 캐런 버러드(Karen Barad, 1956∼)

어떤 인간·사물도
독립·선험적으로 존재치 않아
존재하는 것은 현상이며
분리되지 않는 성분들의 얽힘
분리된 두 존재 전제로 한
상호 작용이라는 용어 안 쓰고
내부-작용이란 낯선 용어 채택
낙태책임,女에게 전가할 수 없어
태아를 시각화하는 기술이나
보건 정책·의료 체계에도 있어

2019년 4월 11일, 마침내 대한민국의 낙태죄가 폐지됐다. 헌법재판소는 낙태를 행한 여성과 낙태 시술을 한 의사를 처벌하는 현행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수많은 여성, 단체, 지지자들의 노력으로 66년 만에 이끌어낸 결정이었다. 태아의 생명권을 우선시했던 2012년과 달리, 올해 헌재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중요하게 고려했다.

태아가 우선인가, 임신한 여성이 우선인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낙태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이 대립하는 구도하에 벌어진다. 이는 법적·정치적 문제일 뿐 아니라 ‘누구에게 행위성이 있는가’를 둘러싼 이론적·철학적 문제다. 예를 들어 인간과 비인간 모두에게 행위성이 있다고 보는 행위자-연결망 이론에 따르면, 태아에게는 행위성이 있다. 태아의 독립적인 생명으로서의 지위와 행위성이 인정되면 모체는 태아의 생존을 위한 환경 혹은 자원으로 간주되기 쉽다. 이는 낙태 정치학에서 여성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임신한 여성의 행위성이 강조되는 것이 무조건 좋은 일만은 아니다. 모체에 대한 태아의 의존성이 강하게 부각될 경우, 자칫 어머니인 여성의 책임이 지나치게 무거워질 수 있다. 태아의 행위성을 인정하는 이론이 여성에게 언제나 불리한 것도 아니다. 여아 낙태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태아의 행위성은 유용한 이론적 자원이다. 태아 단계의 여아에게 인격과 행위성을 부여함으로써 낙태를 살인으로 간주하는 낙태 반대론자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태아라는 존재에게 행위성이 있을 수 있는가? 이론 물리학자이자 페미니스트 철학자 캐런 버러드는 이 곤혹스러운 질문이 두 가지 전제 위에 있음을 지적한다. 첫째, 태아라는 독립적인 존재가 실재한다. 둘째, 행위성은 존재가 갖는 능력 내지는 속성이다. 그러나 우선 태아가 어머니의 배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선험적으로 알 수 있거나 주어지는 사실이 아니다. 현대 의학에서 태아의 실재 여부는 산부인과 초음파 검사로 결정된다. 물론 어머니의 신체 변화나 혈액 검사의 호르몬 수치를 통해 임신, 즉 태아의 실재 여부를 알 수도 있다. 하지만 초음파 사진에서 수정란이나 아기집이 보이지 않으면 자궁 외 임신이나 화학적 임신 등의 진단이 내려질 정도로 초음파 검사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초음파 기술은 이미 실재하는 태아를 단순히 관찰해 그 존재를 확인하는 도구가 아니라 태아를 어머니의 몸 안에서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생명체로 만드는 실천이다. 지금까지 그 실천은 자궁 안에 있는 태아를 볼 수 있게 하고 그것을 사회나 여성과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매우 특정한 장치로 작동해 왔다. 따라서 행위성은 태아를 개별적 존재로 실재하게 만드는 기술적 실천 그 자체에 있으며 그 실천의 효과인 태아에게 있지 않다. 행위성은 어떤 존재가 가지고 태어나는 속성도 아니고 외부의 누군가가 특정 존재에게 부여할 수 있는 능력도 아니다.

버러드는 어떤 인간이나 사물도 독립적·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나 사물이 아닌 현상이며, 이 현상은 존재론적으로 분리되지 않는 성분들의 얽힘(entanglement) 그 자체다. 버러드가 물(物, matter)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은 현상의 ‘내부-작용(intra-action)’에 따른 결과물이다. 상호작용(interaction)이라는 익숙한 표현 대신 내부-작용이라는 낯선 용어를 쓰는 이유는 상호작용이 이미 분리된 두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현상 속 성분들은 얽혀 있는 상태, 즉 개별적 존재로 구분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이들 성분 사이의 작용은 상호작용이 아닌 내부-작용으로 명명된다.

버러드는 내부-작용 중에서도 얽혀 있는 현상의 단면을 잘라서 주체와 대상을 드러내는 작용, 즉 주체와 대상의 분리라는 효과를 일으키는 내부-작용을 ‘행위적 자름(agential cut)’이라고 부른다. 현상의 외부에서 주체 대 대상의 구분을 본질화하는 시도인 데카르트적 자름과 달리, 버러드의 행위적 자름은 현상 내부에서 일어나는 국소적 작용이다. 버러드의 행위적 실재론(agential realism)에 따르면, 주체와 대상뿐만 아니라 자기와 타자, 과거와 현재와 미래, 원인과 결과 사이의 구분 역시 절대적이지 않다.

버러드의 독특한 철학은 닐스 보어의 양자 물리학을 근간으로 한다. 보어는 관측 대상과 관측 장치의 분리 불가능성 및 얽힘에 대하여 논의한 바 있다. 버러드는 실험 장치를 예로 들어 보어의 장치 개념을 더욱 물질적이고 역동적으로 설명한다. 1922년 물리학자 오토 슈테른과 발터 게를라흐가 진행한 양자 물리학 실험을 보자. 훗날 원자의 스핀과 양자화를 입증한 실험으로 알려진 이 실험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놀랍게도 게를라흐의 시가였다. 시가 속의 황 성분이 실험 결과에 큰 영향을 준 것이다. 게를라흐는 당시 조교수로 일하며 넉넉지 않은 생활을 했기에 황이 많이 함유된 값싼 시가를 피웠다. 우연히 게를라흐의 호흡기로 들어간 황 성분이 그의 날숨에 섞여 나와, 실험에 사용한 은 입자와 결합하며 스크린에 검은 궤적을 남겼는데 이로써 실험 결과를 바꾸었다. 이렇게 보면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은 이미 존재하는 은 입자의 흔적을 관측했다기보다 그것의 실재 자체를 창조한 과정에 가깝다. 실험 장치가 새로운 과학적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우리가 물(物)이라고 여기는 모든 존재는 반복적인 내부-작용을 통해 창조된다.

버러드에게 낙태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하나의 현상이다. 이 현상 속에서 특정한 내부-작용이 낙태를 태아 대 임신한 여성의 문제로 뚝 잘라 냈을 뿐 태아와 여성이 원래부터 대립적 존재로 실재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특정한 내부-작용, 특정한 장치, 특정한 자름을 통해 만들어진 태아 대 여성은 존재의 문제이자 인식의 문제이며, 또한 무엇보다 윤리의 문제다. 낙태와 관련된 윤리는 태아와 임신 여성이라는 물(物)에 나중에 더해지는 관심사가 아니라 그러한 존재들이 물(物)이 되는 과정에 이미 내재해 있다. 버러드는 이 윤리와 존재, 그리고 존재에 대한 앎의 분리 불가능성을 ‘윤리-존재-인식-론(ethico-onto-epistem-ology)’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어떤 윤리를 요구할 것이냐는 질문은 너무 늦다. 그 대신 태아 대 여성이라는 경계를 만든 내부-작용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낙태라는 현상으로부터 이 두 존재를 잘라 냄으로써 어떤 결정이 가능해졌고 어떤 존재가 배제되었는지를 해명하고 이 현상에 어떤 실천, 기술, 정책, 제도 등이 얽혀 있는지를 추적해야 한다. 여성은 낙태에 대한 책임을 지는 유일한 존재일 수 없다. 낙태의 책임은 태아를 독립적 생명체로 시각화하는 기술적 실천에도 있고, 보건 정책이나 의료 체계에도 있고, 빈곤을 재생산하는 사회 구조에도 있다. 우리가 이들 중 무엇을 이야기하고 실천하는가는 그 자체로 윤리적 선택이자 새로운 지식과 존재를 만드는 행위다. 낙태는 이 반복되는 내부-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현상이다.

사실 버러드의 저서에서 여성과 젠더는 의외로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여성과 젠더를 다루지 않는 철학이 어떻게 페미니즘일 수 있을까? 버러드의 존재론은 물(物)화, 즉 물(物)이 어떻게 물(物)이 되는가에 대한 철학이다. 버러드가 사유하는 세계는 역동과 활력으로 가득 차 있다. 어느 물질도 수동적으로 비활성화된 채 자신에게 의미가 새겨지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 점에서 버러드의 철학은 몸과 정신, 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의 이원론에 대한 전면적 도전이다. 이것이 페미니즘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임소연 숙명여대 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 연구교수

■ 캐런 버러드는

분야- 철학, 페미니즘 이론, 과학학

사상- 행위적 실재론, 신유물론 페미니즘, 포스트 휴머니즘, 포스트 구성주의

주요 활동·사건- 캘리포니아대 산타크루즈(UCSC) ‘과학과 정의’ 대학원 교육 과정 공동 책임자


입자 물리학자이자 페미니스트 이론가로, 페미니즘과 과학학(Science studies)의 접점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학자다. 현재 UCSC에서 페미니즘 연구·철학·의식사를 연구하는 교수다. 뉴욕대 스토니브룩에서 입자 이론 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학제간 영역으로 오기 전 같은 학교 물리학과에서 이미 종신 교수직을 받았다.

다수의 페미니즘 문화 연구 및 과학·사회학 저널에 논문을 실었고, 2007년에 대표 저작 ‘우주의 중간에서 만나기’를 발표했다. 이 책은 닐스 보어의 양자 물리학을 철학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인문학자가 보어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최초로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양자 물리학은 이론적·실용적 성취를 거두었음에도 직관에 반하고 모순적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그전까지 철학적 측면이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거나 학문적 의미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우주의 중간에서 만나기’는 물리학자가 본격적으로 양자 물리학의 철학적 함의를 논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는 물리학을 페미니즘에 적용하려는 시도라기보다 물리학과 페미니즘을 우주의 중간에서 만나게 하려는 시도다.

전통적 이분법을 넘어서고 인식자의 초월성이 허구임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양자 물리학의 철학이 페미니즘과 일맥상통한다고 보았다.

주디스 버틀러와 미셸 푸코를 통해 보어를 독해했으며, 특히 보어의 장치 개념을 젠더 수행성 및 담론적 실천의 물질성 등과 연관해 더욱 도발적인 개념으로 재탄생시켰다. 자신의 사상을 보어에 대한 ‘사이보그적 읽기’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버틀러와 푸코를 역동적·반복적으로 재작업했다는 의미에서 ‘회절적 독해(differactive reading)’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행위적 실재론’을 주창하며 과학 비판에 매몰돼 있던 페미니즘이 물(物)이나 과학과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했다. 이 점에서 행위적 실재론은 ‘신유물론 페미니즘’으로 분류된다.

최근에는 자크 데리다의 유령론을 통해 양자 물리학을 독해하거나 원자 폭탄의 폭력성과 기억을 양자 물리학의 물질성과 시간성 개념으로 해석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문화일보 2019.10.29

/ 2022.0321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