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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상의 최전선] Q : 올드 미디어는 어떻게 뉴 미디어와 연결되는가? (2022.03.21)

푸레택 2022. 3. 21. 10:01

<21세기 사상의 최전선>Q : 올드 미디어는 어떻게 뉴 미디어와 연결되는가? (daum.net)

 

<21세기 사상의 최전선>Q : 올드 미디어는 어떻게 뉴 미디어와 연결되는가?

A : ‘심원한 시간’에서 올드-뉴 미디어 구분은 없어(16) 지크프리트 칠린스키(Siegfried Zielinski, 1951~)‘미디어= 오락거리’관점 탈피새 시대 이끈 행위자로 규정지식·정보를 기록·유지하는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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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 작가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Q : 올드 미디어는 어떻게 뉴 미디어와 연결되는가?

A : ‘심원한 시간’에서 올드-뉴 미디어 구분은 없어

(16) 지크프리트 칠린스키(Siegfried Zielinski, 1951~)

‘미디어= 오락거리’ 관점 탈피
새 시대 이끈 행위자로 규정
지식·정보를 기록·유지하는
모든 도구를 ‘미디어’로 봐
‘생성→발전’ 선형적 흐름 거부
新·舊 미디어 중첩시킴으로써
기술에 대한 새로운 관점 제시
“서구·대도시 ‘보편’ 상정 말고
탈식민주의적 연구해야” 지적

어느 이론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그가 다른 연구자들 사이에서 어떤 존재로 회자되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한 이론가의 개념, 견해, 스타일 중 어느 부분은 이목을 끌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독일 미디어 이론가 지크프리트 칠린스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칠린스키는 미디어를 중심으로 학문 간의 역사적 네트워크 구축을 추구하는 미디어 고고학 분야에서 중요한 저작을 남겼으며 특히 미디어, 예술, 과학의 역사에 내재한 ‘심원한 시간(deep time)’에 대한 연구로 잘 알려져 있다.

2011년 칠린스키의 예순 번째 생일을 기념해 ‘지식의 대상들’이라는 책이 출간됐다. ‘지식의 대상들’은 칠린스키의 동료들이 그에게 헌정한 책으로, 심원한 시간, 변종학(variantology) 등 칠린스키가 제시한 독창적 개념들에 대한 일종의 해설집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미디어로 간주되지 않던 것들이 미디어로 논의되는 데 칠린스키가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 주고자 칠린스키가 그랬듯 기이한 대상, 사물, 생각들을 파헤친다. 사람들은 보통 미디어를 정의할 때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내용에만 집중하기 쉽다. 하지만 칠린스키는 지식과 정보를 기록·저장·유지·보수·분리·분류하는 모든 장치와 도구를 미디어로 정의했다. 그런 이유에서 ‘지식의 대상들’에는 바구니, 책 파쇄기, 욕조, 건조 과일, 필모스코프, 만년필, 가이거 계수기, 손, 선, 페나키스토스코프, 정어리 통조림, 측면 주사 음향기, 계산자, 타자기, 콘센트처럼 무언가를 저장·전달·수정·기록하는 갖가지 사물이 미디어의 예시로 제시된다. 칠린스키가 미디어라는 용어를 지나치게 남발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 덕분에 사람들은 미디어에 대한 해방적 감각을 터득할 수 있다. 미디어에 대한 주류적 관점, 즉 미디어는 관객과 소비자에게 만족감을 주는 오락거리에 불과하다는 시각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된 것이다.

미디어 고고학은 고고학이라는 용어 때문에 망각된 과거의 미디어를 파헤쳐 역사의 빈칸을 채우거나 미디어의 기원을 찾는 학문으로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미디어 고고학은 미디어를 새로운 시대, 지식, 체제의 출현을 이끈 행위자로 바라봄으로써 미디어를 역사의 중심으로 되돌려 놓는 학문적 전략이다. 칠린스키는 근대, 근대 이후 등 오늘날 인류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역사적 시간 단위로는 장구한 미디어의 역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이와 같은 논점은 미디어 연구에서 텔레비전, 영화, 인터넷, 컴퓨터 등만을 다루는 데 지루함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크나큰 자극을 준다. 가령 텔레비전과 영화가 쥐고 있던 패권의 역사는 미디어 고고학이 열어젖힌 더 광범위한 차원의 ‘시청각’ 문화사에서 보자면 지극히 미비한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미디어의 심원한 시간’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의 지각 이론에서 시작해 17세기 독일의 예수회 수도사 아타나시우스 키르허의 빛과 그림자에 관한 탐구로 끝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2000년이 넘는 역사를 동등한 시대적 지평에서 논하고자 한 것이다.

칠린스키는 미디어 고고학을 미디어의 심원한 시간에 대한 탐구로 발전시켰다. 그는 과학사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선형적 진보의 시간성을 거부하며 제시한 개념인 ‘심원한 시간’을 동원해 올드 미디어가 뉴 미디어로 선형적으로 진화한다는 인식을 거부했다. 미디어의 역사를 성장과 발전의 과정으로만 이해하는 학제적 관습을 넘어 대안적 시간성을 찾아내고자 한 것이다. 칠린스키에 따르면, 미디어 문화는 시간과 물질성이 침전돼 겹겹이 쌓인 형상을 띤다. 이 주름진 형상 속에서 과거는 불현듯 새롭게 떠오르고 새로운 미디어는 과거가 반복된 결과로 나타난다. 즉 칠린스키가 말하는 미디어의 심원한 시간 속에서 올드 미디어는 뉴 미디어가 되고, 뉴 미디어는 올드 미디어가 된다. 한편 칠린스키는 과거와 현재의 미디어를 중첩함으로써 오늘날의 시장경제가 선전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술을 이해한다. 오늘날 미디어 문화에서는 모두를 구원하는 은총이나 해결책인 양 새로운 기술을 맹목적으로 숭배하지만, 칠린스키는 뉴 미디어에 담긴 올드 미디어를 찾아내고 올드 미디어에 담긴 뉴 미디어를 찾아냄으로써 이와 같은 관점을 뒤틀어 버린다. 칠린스키의 미디어 고고학은 이렇듯 선형적 시간의 흐름에 저항한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작업을 ‘반고고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칠린스키가 미디어 고고학에 기여한 방대한 업적을 정당하게 평가하려면 그를 미디어 변종학자(variantologist)라 명명해야 한다. 칠린스키가 별도의 방법론으로 제시하는 변종학에는 독자적이고도 흥미로운 계획이 있다. 변종학은 예술·과학·미디어의 역사에서 대안적인 문화적 실천을 모아 둔 매력적인 컬렉션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변종학의 전부는 아니다. 변종학이라는 명칭 자체가 학제적 관습과 경계의 너머를 바라보려는 시도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변종학은 칠린스키가 ‘중간 도착증(psychopathia medialis)’이라 이름 붙인 것의 패권적 지위에 반기를 든다. 중간 도착증은 미디어를 오락의 차원에서만 바라보는 자본주의 문화의 특징으로, 미디어의 운영과 담론에서 균일적 획일화를 추구하는 경향을 가리킨다. 하지만 중간 도착증과 달리 변종학자는 차이, 저항, 실험의 지점을 파헤쳐서 사물을 다르게 상상하도록 돕는다. 예컨대 사람들은 비디오테이프리코더라는 일상적 가전제품을 시공간을 기록하는 장치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비디오테이프리코더는 누군가의 거실에서 시공간 조작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타임머신이기도 하다.

칠린스키는 비디오테이프리코더처럼 보기와 청취의 테크놀로지와 매개 방식을 결정하는 비표준적·대안적·예외적·이질적 실천을 ‘변종(variations)’이라 지칭하고 꾸준히 탐구했다. 그러므로 변종학은 마술, 과학, 기술 등에 대한 역사적 담론과 실천을 추구하는 데 있어 다소 무질서하다. 그렇지만 변종적 미디어 실천을 탐구하는 미디어 고고학의 영향 덕분에 시청각 기술과 문화는 건축, 운송, 과학·기술, 일과 시간의 조직화, 서민과 부르주아의 전통적 문화, 아방가르드 예술 등의 전문적 담론, 사회적 실천과 소통할 수 있게 됐다. 이 점에서 칠린스키는 미디어 고고학을 통해 기술과 인문학을 새롭게 바라보는 길을 제공한다.

칠린스키는 또한 미디어 고고학을 통해 유럽 중심주의를 해체하고자 했다. 칠린스키는 미디어 고고학이 서구와 대도시를 보편으로 상정하는 미디어 산업의 지리적 관습에서 벗어나 ‘남쪽과 동쪽’으로, 즉 탈식민주의적 연구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두 가지 차원에서 지리적 관심을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예술, 과학, 미디어에 대한 역사를 발굴하는 것이고, 둘째는 동아시아, 지중해, 아시아 소수 민족, 그리스, 중동, 남아메리카에서 대안적 기술의 역사와 실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근대 미디어 세계를 구성하는 철학적·실천적 토대는 고대 중국 문화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과 남유럽과 남서유럽의 소도시를 포함한 아나톨리아, 그리스, 아랍 등의 지중해 인근 지역에서 유래한다.” 이 강령적 요청은 지금까지 총 다섯 권이 출간된 ‘변종학 총서’에서 실현됐다. 이 총서는 고대 아랍과 중국의 자동화 기술 등을 통해 탈유럽 중심주의적인 미디어 역사 인식을 실천한다.

칠린스키는 미디어 고고학으로 실재하는 기술만을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칠린스키가 다양한 기술과 기술자들에 대한 탐구를 저버리지는 않을 테지만, 그에게는 더 좋은 세상을 창조하려는 기술적 실험과 변화의 잠재성 또한 중요한 관심 대상이다. 칠린스키는 도표, 스케치, 모형으로만 남은 채 실제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상상적 미디어를 연구하기도 했다. 상상적 미디어는 개인적 상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실제 기술과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문화적 욕망을 반영하며 사유의 역사에서 하나의 체계적 흐름을 구축한다.

칠린스키는 간결한 어투로 말한다. “상상과 수학은 양립할 수 없는 이견이 결코 아니었으며 미래에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심원한 시간은 중간 도착증을 견제하며 대안적 미래로 접속한다.

유시 파리카(사우샘프턴대 기술문화·미학과 교수)·정찬철(한국외대 미네르바 교양대학 교수)

■ 지크프리트 칠린스키

분야- 시청각 미디어 이론, 예술사, 과학사
사상- 미디어 고고학
주요 활동·사건- 홀로코스트 다큐멘터리 제작(1979), 빌렘 플루서 아카이브 디렉터(1998∼2016), 변종학 총서 편집 위원,

변종학 연구 웹사이트(variantology.com) 운영

미디어 고고학 분야의 변종학을 개척한 인물로, 2016년 유러피언대학원대학교의 미셸 푸코 교수직에 부임해 미디어 고고학 및 테크노컬처 과정을 이끌고 있다. 마르부르크대, 베를린자유대, 베를린공과대에서 연극, 독문학, 언어학, 기호학, 사회학, 철학, 정치학 이론 등을 수학했다. 1985년 비디오 기록장치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9년에는 HD 텔레비전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에르키 후타모, 볼프강 에른스트와 더불어 미디어 고고학 분야를 개척했다. 특히 미디어의 심원한 시간과 변종학이라는 독특한 개념·방법론을 제시하며 미디어의 역사를 탈역사적 관점과 탈유럽 중심주의로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미디어 고고학을 기존보다 정치적이고 행동주의적으로 실천하는 한편, 연구의 초점을 예술에 두고 인문학의 과제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오디오비전’(1989), ‘미디어 고고학’(2002, 영어판 제목 ‘미디어의 심원한 시간’), ‘미디어 이후’(2011) 등의 저작을 남겼으며, ‘변종학’ 총서에 공동 편집 위원으로 참여해 2005∼2011년에 걸쳐 다섯 권의 총서를 출간했다.

그의 저작과 이론은 20세기의 핵심적인 실험적 실천과 역사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지리적·지적으로 훨씬 더 폭넓은 협업을 추구한다. ‘미디어 이후’에서는 당대의 미디어 이론이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이론가들의 사유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미디어 고고학자 저마다 문화적·지성적 배경과 전문성을 기반으로 특정 주제에 대한 비교적 관점에서 미디어의 계보학을 써야 하며, 미디어 고고학의 이론적 작업도 그 자체의 지리적 특성과 심원한 시간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일보 2019.12.17

/ 2022.03.21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