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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 백작부인을 사랑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2022.03.20)

푸레택 2022. 3. 20. 21:49

[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백작부인을 사랑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daum.net)

 

[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백작부인을 사랑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미국 다큐 채널의 한 프로그램에서 여성의 ‘성적 판타지’를 조사했다. 과연 미국 여성에게 가장 매혹적인 성적 판타지 대상은 누구였을까? 한편으로 당혹스럽고, 한편으로 솔직하고, 한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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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 백작부인을 사랑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미국 다큐 채널의 한 프로그램에서 여성의 ‘성적 판타지’를 조사했다. 과연 미국 여성에게 가장 매혹적인 성적 판타지 대상은 누구였을까? 한편으로 당혹스럽고, 한편으로 솔직하고, 한편으로 그럴듯했다.

3등은 UPS 맨(페덱스와 유사한 우편택배회사로, 직원이 갈색 제복을 입은 젊고 근육질의 남자들이 대부분)이다. 2등은 소방대원, 그리고 1등은? 여자다. 성적 판타지를 느끼는 대상이 동성이었던 것이다. 물론 성적 판타지의 대상과 사랑의 대상이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의 완성이 영과 육의 결합이라면…. 무언가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조사 결과다.

남자들은 여자끼리의 연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자끼리의 우정과 사랑, 거기에는 남자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있다. 남자들이여! 긴장하시길….

마리 앙투아네트는 한 여인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혹 자기로 인해 사랑하는 이가 처형될까봐 크게 두려움에 떨며 몹시 슬퍼했다. ‘페어웰, 마이 퀸(2012년)’이라는 최근 영화에서 앙투아네트는 책을 읽어주는 시종에게 말한다. “혹시 한 여성에게 매료돼 본 적이 없느냐? 그녀가 없으면 끔찍하게 괴로워서 눈을 감고, 그녀의 갸름한 얼굴과 보드라운 살결, 빛나는 눈을 상상하곤 하지.”

‘폴리냑 백작부인’, 캔버스에 오일, 1787년,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룅. 폴리냑 백작부인을 흠모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자신의 전속 화가를 시켜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으로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인 상황 속에서도 그녀만을 생각하는 자기가 한심스럽다는 듯 푸념 어린 고백을 한다. 앙투아네트가 그토록 사랑한 여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가브리엘 폴리냑(1749~1793년) 백작부인이다. 폴리냑 백작부인의 어떤 점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매료시켰던 것일까?

앙투아네트는 폴리냑 부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가 자길 흥분시켰다고 고백한다. 6살 연상의 백작부인은 쉽게 다룰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데다 무례하기조차 한 그녀의 행동이 앙투아네트는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궁전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고, 누구나 다 마음에 들고 싶어 하는 앙투아네트의 마음에 들려 애쓰지 않는다는 점 또한 높이 샀다.

“난 그녀의 자유분방함이 너무 좋았어. 그렇지만 그녀는 지금 내 곁에 없어. 난 그녀의 포로가 됐어. 인정할 수밖에 없어.”

그녀 때문에 상심한 적이 많았던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의 살생부 명단에서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그녀에게 빨리 베르사유를 떠나라고 말한다. 그렇게 앙투아네트는 자신보다, 사랑하는 이의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

폴리냑 부인은 후작 가문에서 태어나 1767년에 폴리냑 백작(후에 공작)과 결혼했다. 폴리냑 가문은 대대로 부르봉 왕가를 섬겼고, 루이 14세와 루이 15세 시대의 대표적인 외교관 집안이었다. 한때 추기경을 배출하는 등 위세를 떨쳤지만 쿠데타 등 여러 사건에 연루돼 당시엔 가운이 쇠퇴하고 있었다. 폴리냑 백작 부부는 궁정에서 영향력이 미미했던 왕세손빈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접근해 가깝게 지내면서 신뢰를 쌓았다. 루이 15세가 죽고 앙투아네트의 남편인 루이 16세가 즉위하면서 폴리냑 부부는 일약 궁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렇게 권세를 휘두르던 폴리냑 백작부인은,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국왕 부부를 버리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아이들’, 캔버스에 오일, 1787년,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룅. 앙투아네트 왕비가 아낀 전속 화가인 엘리자베스는 왕비의 가정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는 그림을 그렸다.

비록 앙투아네트가 폴리냑 백작부인의 아첨과 유혹에 놀아났다 하더라도, 두 사람이 남녀 간 사랑 이상의 아름답고 기묘한 시절을 보냈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앙투아네트는 그녀의 궁정화가인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룅(1755~1842년)과도 우정을 나눴다. (물론 우정이라기보다는 총애에 가까운 것이지만) 둘 사이가 그저 왕비와 신하 정도의 수준에서 머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쨌거나 현존하는 앙투아네트의 주요 초상화는 거의 엘리자베스 비제의 작품이다. 엘리자베스에게는 자신의 가치를 최고로 인정해준 조력자가 바로 앙투아네트였던 셈이다.

명성이 자자한 남성 화가들이 판을 치는 궁정에서 앙투아네트가 여성이면서 나이도 젊은 엘리자베스 비제를 선택한 것은 섬세하고 예리한 시선과 내면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탁월한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그런 앙투아네트가 동성애를 했다 한들 무슨 대수랴. 게다가 엘리자베스의 미모와 패션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마도 그녀는 왕비가 홀딱 반할 만한 패션으로 왕비를 매혹시켰던 것은 아니었을지.

엘리자베스 비제 역시 자신을 최고로 우대해주는 왕비를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그린 왕비 그림은 좀 남다른 데가 있다. 그림에는 여왕의 우아한 기품뿐 아니라 인간적인 내면까지 드러나 있다. 사실 왕실화가의 사명은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인물이자 무한한 권력과 부의 소유자인 왕과 왕족을 그림을 통해 만천하에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그린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아이들’은 기존 왕실 초상화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왕비의 가정적이고 인간적인 면모가 펼쳐진다.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왕비는 요람을 곁에 둔 채 아기를 보살피고 있다. 왕비는 아기를 무릎에 안고 있고, 그 옆에는 딸아이가 평범한 엄마에게 그렇게 하듯 살포시 기대어 있다. 엘리자베스는 왕비의 이런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녀가 ‘세 아이의 자상한 어머니’였음을 백성들에게 알렸다.

두 사람이 서로 깊이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들이 동갑내기이기도 했거니와 둘 다 비슷한 시기에 어린 자식을 잃은 경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는 일이 그렇듯, 오랜 대화 속에서 서로를 깊이 알아나갔던 그들은 틀림없이 어머니로서의 걱정과 기쁨도 함께 나눴을 것이다. 이 작품은 한때는 여왕의 권위를 떨어뜨린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른 궁정화가들은 그릴 수 없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인간적인 매력을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으로 손꼽힌다.

엘리자베스 비제가 그린 그림에는 앙투아네트의 동성 연인인 폴리냑 부인 초상화도 몇 점 있다. 아마 연인의 모습을 담고 싶어 특별히 엘리자베스에게 요청했으리라. 왕실화가의 손에 의해 그려진 여왕의 동성 연인 초상화라니! 그림은 백작부인에 대한 앙투아네트의 마음이 얼마나 절절한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폴리냑 부인의 매력이 무엇인지 또한 얼마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명민하고 아름다운 모습 뒤에 감춰진 암고양이 같은 무심함과 태연함이 얼마나 연인의 애를 태웠을까….

앙투아네트의 동성애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는 모든 여자들의 첫사랑 상대가 엄마, 즉 여자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킨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여자가 훨씬 더 양성적인 존재’라고나 할까. 프리다 칼로도 여성이든 남성이든 일단 사랑을 하게 되면, 육체적인 결합을 통해서 더욱 완벽해진다고 믿었고 그것을 실천했다. 그녀 역시도 말년에 병든 자신을 극진히 간호해주던 여자와 다시 한 번 깊은 사랑에 빠졌다.

유경희 미술평론가ㅣ매일경제 2016.04.18

/ 2022.03.20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