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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충기의 삽질일기] 삽은 왜 도구나 장비가 아니고 연장인가 (2022.03.20)

푸레택 2022. 3. 20. 18:37

[안충기의 삽질일기] 삽은 왜 도구나 장비가 아니고 연장인가 | 중앙일보 (joongang.co.kr)

 

[안충기의 삽질일기] 삽은 왜 도구나 장비가 아니고 연장인가

……살기를 느껴 손도 대기 전부터 두려움에 떨며 꽥꽥 소리 지르고 살려달라는 듯이 발버둥치는 돼지 모습을 보면…… 두 손에 해머나 망치를 들고 이 돼지를 잡아야 하는 생각이야 어찌 두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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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밭에는 감자꽃이 한창이다. 권태응이 지은 동시 ‘감자꽃’은 이렇다. 자주꽃 핀 건/파 보나 마나/자주 감자/하얀 꽃 핀 건/하얀 감자/파 보나 마나/하얀 감자. 권태응은 충청북도 충주에서 났다. 시인이며 독립운동가다.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를 마치고 와세다 대학에 다니던 중 독립운동에 발을 디뎠다가 체포됐다. 3년형을 받고 복역 중 폐결핵을 앓아 풀려났으나 퇴학당했다. 고향에서 땅을 일구며 야학과 창작생활을 하다가 약이 없어 세상을 떴다. 남한강과 달래강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탄금대가 있다.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왜적을 맞아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가 패배한 뒤 강물에 몸을 던진 장소다. 탄금대에 감자꽃 시비가 있다.

[안충기의 삽질일기] 삽은 왜 도구나 장비가 아니고 연장인가

햄은 밥도둑이다.

입 짧은 아이도 햄을 구우면 입이 벌어진다. 냉장고가 휑한 주부, 식탁 빈약한 자취생, 술안주가 궁금한 주당들도 햄이 있으면 안심한다. 햄은 공구계의 제왕 맥가이버칼처럼 식탁에서 만능이지만 직접 만들어본 사람은 드물 테다.

머위를 아래서 찍으니 커다란 우산 모양이다. 밭둑에서 제가 알아서 뿌리를 뻗어나간다. 살짝 데쳐 쌈을 싸면 쌉쌀한 맛이 그만이다. 올해는 밭 쥔장의 농약사정권 안에 있어 그저 보기만 하고있다.


수제햄 제조 첫 순서는 간단하다.

‘돼지를 잡는다’  
귀농안내서 『내 손으로 만드는 햄·소시지·베이컨』에 나온다. 내용이 진지한 책이다.  ‘돼지잡기에 앞서’ 항목에는 다음처럼 쓰여 있다.

……살기를 느껴 손도 대기 전부터 두려움에 떨며 꽥꽥 소리 지르고 살려달라는 듯이 발버둥치는 돼지 모습을 보면…… 두 손에 해머나 망치를 들고 이 돼지를 잡아야 하는 생각이야 어찌 두렵고 주저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몇 차례 겪어본 사람도 막상 닥쳐서는 선뜻 나서기가 어려운데, 한 번도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돼지 앞에서 한참 망설이게 마련이다. …… 육가공 실습 때면 십 수 명이 마당에 돼지를 둘러싸고 서로 눈치 보며 망치 잡기를 미루는 모습은 매번 벌어지는 풍경이다. ……실습할 때마다 반드시 꼬집고 넘어간다. 지금 우리 자신이 먹을 돼지를 잡는 것인데 왜 미루고 주저하는가. 밥상에 앉아서 다된 밥만 먹으려 하느냐…….

뒤이어 육가공을 위한 기계기구가 나오고 비로소 햄·베이컨·소시지를 만드는 방법이 나온다. 돼지 잡는데 필요한 준비물은 아래와 같다.

중형망치(해머-한쪽 끝이 원뿔형으로 뾰족한 것이 좋다). 널빤지. 코팅장갑. 짧고 가늘며 날카로운 칼. 가스버너. 가스용 토치. 양동이. 물. 앞치마(비닐). 장화. 수세미.

햄 만드는 방법처럼 모든 일에는 절차가 필요하다. 도구를 가장 먼저 챙겨야 한다. 농사도 그렇다. 손바닥만한 땅일지라도 맨손으로 덤볐다가는 피부 다 망가지고 자칫하면 손톱까지 빠진다. 도구 없는 농부는 핸들 없는 불도저이고 웍 없는 중화요리사다.

고추 꽃이 방울방울 달리기 시작했다. 청양고추는 일반고추보다 작고 단단하고 짙은 녹색인데 아직은 어느 게 어느 건지 모르겠다.

통로 옆에 있는 고추 모종 셋이 머리가 잘려나갔다. 고라니 소행이다. 걸리기만 해봐라 그냥 칵.... 걸릴 리가 없겠지만.


1998년 봄 주말농장 첫해에는 호미만 입양했다. 내 밭과 농수로를 가르는 철조망에 걸려 있는 삽괭이로 땅을 일궜다. 전 주인이 쓰다가 놓고 간 모양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 땅을 내려찍어 흙을 뒤집고 골랐다. 잠시 노동에도 등줄기가 후줄근해졌다. 쉴 새 없이 땀이 떨어져 안경알은 금세 부옇게 흐려졌다. 술과 기름진 안주로 찌든 몸에서 육수가 빠져나며 흐늘대던 근육이 팽팽해졌다. 주말마다 몸을 쓰면 팔뚝이건 허벅지건 한 달이면 터미네이터 아놀드 슈왈제너거처럼 울퉁불퉁해질 거라는 꿈에 부풀었다. 기대는 확신으로 발전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휘둘렀다.

웬걸, 집에 가자마자 쓰러졌다. 저녁도 못 먹고 다음날 아침까지 혼수상태가 됐다. 일어나니 온몸이 빨래방망이로 얻어맞은 것처럼 결리고 장딴지와 넓적다리와 사타구니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등짝과 팔뚝도 찜질파스로 도배했다. 일주일 넘게 밤에는 끙끙 앓고 낮에는 어기적대며 걸었다.

숫돌에 물을 뿌려가며 올해 처음으로 낫을 갈았다. 6월부터는 손으로 풀이 잘 안 뽑힌다. 휙휙 슥슥 싹둑싹둑... 여름엔 낫이 최고다. 깎은 풀은 버리지 않고 흙 위에 던져놓는다.

낫 다룰 땐 그저 조심. 가볍다고 가벼이 보면 크게 다친다. 오른손잡이들은 왼손에, 왼손잡이들은 오른손을 많이 다친다. 내 왼손 검지에도 흉터가 있다.

삽으로 할 일을 괭이로, 그것도 힘 하나 믿고 마구 찍어댄 업보였다.

땅 뒤집는 데는 역시 삽이다. 보병으로 철책서 근무할 때 무너진 참호를 보수하고, 제설작업 하던 삽질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두 번째 봄을 맞으며 한 자루 장만하리라 마음먹었다. 밭에 가려던 날 비가 내렸다. 젖은 땅에 들어가면 밭 망가진다. 삽을 사러 나섰다. 신도시 백화점과 대형할인점에서는 팔지 않았다. 가까운 철물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망치·펜치·못·가위·청테이프·빗자루·전구·쇠톱·실리콘처럼 인테리어에 쓰이는 소소한 도구들이 사방 벽에 빽빽했다. 뚫어뻥과 머리털제거용 하수구마개까지 있었다. 삽은 없었다.

한 해 전의 악몽에 몸을 떨었다.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핸들을 돌려 교외로 나갔다. 파주 심학산 아래 시골길을 천천히 지나는데 동네 끄트머리에 조그만 농기구점이 보였다. 문을 밀고 들어가니 어른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가 삽을 내주며 오천 원이라고 했다. 생각보다 자루가 짧았으나  손에 쏙 들어왔다. 자루에는 불로 지진 상표가 새겨져있고 날은 페인트칠이 돼 있었다. 공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신상이었다.

고추를 심은 옆밭이다. 비질을 한 것처럼 풀 하나 없이 깔끔하다. 밭은 주인을 닮는다.

또 다른 밭이다. 비닐로 아예 땅을 덮어버렸다. 풀씨가 날아와도 침투할 수가 없다.

내 밭의 고추다. 고랑은 별꽃 바다. 낫으로 베어 이랑 위를 덮어주었다. 밭 쥔장은 이 장관을 가관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마이 웨이.

일주일 뒤 첫 삽을 떴다. 괭이가 무궁화호라면 삽은 KTX였다. 삽에는 어느 농기구도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서려있다. 진도가 팍팍 나갔다. 하루 노동에 삽날은 페인트를 벗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다시 일주일을 어기적대며 기어 다녔다. 군대서 만져봤다고 삽을 만만하게 다룬 죄과였다. 그리고 7년 뒤인 2005년 4월11일의 기록을 보니 이렇다.

초봄 내 밭에서 가장 노고가 많은 연장은 삽이다. 흙이 물러지면 땅을 뒤집어 이랑과 고랑을 새로 만들며 밭일을 시작한다. 이때 삽의 역할은 빛난다. 크기가 얼마 되지 않는 밭이기에 한해 농사 준비는 삽 한 자루면 너끈하다. 삽날의 머리는 다리 근육이 지시하는 힘을 정확히 받아들여 땅에 수직으로 작용한다. 세로로 꽂히는 삽날을 받아들이며 땅은 긴 잠에서 깨어나고, 가로로 들어 올리는 삽날에 실려 묵은 흙은 새로운 흙과 임무를 교대한다. 삽날 위에서 흙은 위와 아래가 뒤집히고 삽날 끝에서 밭은 지형을 바꾼다. 삽은 손으로 다루는 어느 연장보다 작업반경이 넓고 크다.  
 

호박 구덩이마다 거름을 담아 나른 삽날은 곧 무성해지는 풀들을 겨눈다. 쇠의 날카로움으로 뿌리의 질긴 생명력을 이길 수는 없는 일이어서, 유월 지나 햇살 따가워지면 삽날도 기진한다. 장마철 물꼬를 내는 삽날은 서늘하고, 무 배추씨 넣을 자리로 퇴비를 옮기는 가을 삽날에는 수확의 기대가 있다. 초겨울 되어 김장구덩이를 파고 묻는 일까지가 삽의 일이니 날은 녹이 날 틈이 없다. 내 한해 농사는 삽날에서 출발해 삽날에서 끝난다.

삽자루는 나무고 삽날은 쇠다. 단단한 쇠로 만든 삽날은 땅 쪽을 겨누고 그보다는 무른 나무로 만든 삽자루는 내 손 쪽으로 나 있다. 나는 나무를 통해 땅으로 다가서고 땅은 쇠를 통해 내게 다가온다. 사람 편의 나무와 땅 편의 쇠가 만난 삽은 연장 위의 연장이다. 나와 땅 사이에 있는 삽 한 자루는 생명과 생명을 잇는 매개다. 삽은 땅을 깨우고 나의 근육을 깨운다. 덕분에 침 맞으러 뻔질나게 드나들던 한의원에 발을 끊었다. 바빠진 삽날만큼 내 마음도 몸도 바쁜 나날이다.

한세월 지나서야 삽질의 묘미를 깨우친 셈이다. 일하는 듯 노는 듯 노동하는 노인들이 다시 보였다. 노인들의 동작은 부드럽고 무리가 없다. 도구와 몸이 하나가 되어 흐른다. 허투로 힘을 쓰지 않고 느릿느릿 움직인다.

잎 뒤에 붙은 벌레알. 잎을 딸 때 아래쪽 2장을 버려야하는 이유다.

상추 겉잎을 맨흙에 뉘어놓고 그 위에 키 큰 풀뿌리를 올려놓으면 땡볕에 금세 미라가 된다.

주말농장을 시작하기 몇 년 전, 배드민턴을 배우러 체육관에 나갔을 때였다. 몸을 풀며 경기 상대를 찾고 있는데 초보자라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때 칠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자존심 상했지만 기부하는 심정으로 코트에 들어섰다. 조금은 거만한 표정이었으리라. 15대0. 열 받아서 한 번 더 붙었지만 15대0. 그렇게 세 판을 연달아 깨지고 나니 이게 뭔가 싶었다. 할머니는 코트 가운데 서서 전후좌우로 한 두 발만 움직였다. 나는 할머니가 이 구석 저 구석으로 찔러대는 셔틀콕을 미친듯이 쫓아다녔다. 스텝이 실타래처럼 꼬이며 몇 번을 나자빠졌다. 어쩌다 기회가 오면 있는 힘을 다해 장작 패듯이 라켓을 휘둘렀다.

"힘으로 하면 안 돼"
땀 범벅이 돼 벌건 얼굴로 씩씩거리는 나를 보며 할머니가 말했다. 온몸의 관절이 제 위치를 이탈해 쑤시고 결렸다. 어깨가 콘크리트처럼 뭉쳐 머리를 제대로 감지못했다. 하도 빌빌 대니 동료들이 너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저 괜찮아요, 라고 말하며 간신히 버텼다. 보름이 지나니 70%쯤 몸이 돌아왔다.

식당에서 만나는 고수는 대부분이 하우스 재배라 부드럽고 가늘다. 내 밭에서 크는 고수는 키가 작고 거칠다. 향은 물론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다.

신도시 작은 땅에서는 온전히 삽으로 땅을 일궜다. 서울로 밭을 옮긴 뒤로는 크게 삽 들 일이 없어졌다. 땅이 넓어졌고 밭 쥔장이 이른 봄에 로타리를 쳐주는 덕이다. (경운기에 쇠 날을 달아 밭을 가는 일을 ‘로타리 친다’고 한다)

거미줄에 걸려 짧은 생을 마쳤다. 합장, 아멘, 옴마니반메홈.


삽.

가만히 불러보면 입술에 착착 감긴다. 글자 하나에 마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숨어있다. 삽을 도구나 장비라고 하면 어색하다. 공구도 아니다. 삽은 연장이라고 부를 때 비로소 빛난다. 삽은 사내들 장난감이다. 학창시절 농활 가서 삽날 위에 두발을 얻고 스카이콩콩 하며 뛰어다니다가 농부들에게 혼난 분들 꽤 있을 테다. 지금 해도 재미있는 놀이다. 시멘트 길에서 빨리달리기 시합을 하다가는 삽날 다 나간다. 0.1톤 쯤 나가는 사람은 삼갈 것. 날이 우그러져 삽을 폐기처분해야 된다. 군대서 ‘빳다’를 치거나 맞은 분들은 나이 좀 드신 분들이다. 그때 애용하는 연장이 야전삽이나 부러진 삽자루였다. 진창에 빠진 차가 탈출할 때도 필수 장비다. 들이나 산에서 급한 일 볼 때 구덩이 파고 증거인멸하는 데도 딱이다.

된장국을 끓이거나 데쳐서 무치거나 근대는 쓸모가 많다. 이즈음은 솎아서 먹고 포기가 커지면 잎을 따낸다.

양상추, 흑상추, 쪼글이상추, 고수. 씨앗 세알을 넣은 양배추는 두 포기로 자랐다. 시원찮은 포기는 뽑아서 쌈 싸먹는다.

상추를 색깔별로 섞어 심으면 눈이 즐겁다. 어머 예뻐라, 꽃밭이네요... 옆 밭 분들이 지나가며 한마디씩 한다. 풀은 좀 뽑지, 한마디를 더 보태서 탈이지만.

뽑지 않고 몇 포기 놔둔 시금치에서 꽃대가 올라오고 있다. 잎 배열의 규칙이 예술이다. 맨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적상추 고갱이다. 쌈을 쌀 때 한 가지 잎으로 싸먹기고 하고, 서로 다른 색깔의 잎을 섞어 싸먹기도 한다. 맛의 절반은 색깔이다.

지난 가을에 씨가 떨어져 자라던 갓이 봄 지나며 다시 꽃을 피웠다. 밭에서는 한 순간도 같은 게 없다. 피고지고피고지고 돌고 돈다.

토마토 첫 꽃이다. 고추와 달리 토마토는 병충해에 강하다. 무당벌레가 걱정이지만. 밭일 마치고 장화에 삽날을 탁탁 두드려 서로의 흙을 털어내면, 발바닥부터 저릿한 전율이 올라오며 뭉친 근육이 풀린다.

3년 전엔 밭둑을 덮었던 차조기.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더니 토마토 아래서 몇 포기가 자라고 있다. 들깨를 닮았다. 자줏빛도 있고 녹색도 있다. 쌈, 장아찌, 튀김, 비빔밥용으로 먹는다. 고급일식집에서 회 아래에 깔아 내놓기도 한다.

누가 일하다 걸어놓고 갔나본데 한 달째 저러고 있다. 그 동안에 비가 두 번 내렸다.

쥔장이 관리하는 주말농장은 웬만하면 갖가지 농기구를 갖추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굳이 돈 들여 따로 사지 않아도 된다. 도시에서 연장을 가지고 다니면 거추장스럽다. 나는 호미를 밭 옆 소나무 가지에 걸쳐놓고 다니는데 누가 또 하나를 걸어놓았다. 손에 잡히는대로 아무거나 쓴다.

내 차 뒤에 누워 있는 삽자루를 보면 든든하다.

그림·사진·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ㅣ중앙일보 2019.06.01

/ 2022.03.20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