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치자’ 교도와 ‘냅둬유’ 신도의 뻔한 승부 | 중앙일보 (joongang.co.kr)
장미는 5월이 가장 예쁘다. 장미에는 파란색을 만드는 효소가 없어 자연에는 란장미가 없다. 꽃말이 ‘불가능’인 이 다. 그런데 2004년 일본기업 산토리홀 스가 유전자 조작기술로 개발에 성공했다. 완전한 청색은 아니고 연한 보라색이다. 2009년부터 판매에 나섰는데 당시 한 송이 값이 3만 원 정도였다.
[안충기의 삽질일기] ‘약 치자’ 교도와 ‘냅둬유’ 신도의 뻔한 승부
“또 쳤어유?”
“안 치면 안 돼요.”
“그깟 풀 낫으로 쳐내믄 되잖어유.”
“날 뜨거워지면 어림도 없어요.”
“제발 좀 냅둬유. 작년에도 내 밭은 낫으로 다 했잖어유.”
“사장님 밭만 빼놓을 수 없잖아요. 밭둑은 할 때 한꺼번에 쳐둬야 해요.”
“참나물 밭에도 뿌렸어유?”
“거기는 피했어요.”
“그럼 잘라서 먹어두 된다는 거유?”
“……”
“겁나서 뜯을 수가 읎잖어유.”
밭에서는 나도 사장님이다. 사장 아닌 사장인 나와 밭 쥔장은 매년 두세 번 입씨름을 벌인다. 농약 때문이다. 쥔장은 ‘약 치자’교 교도이고 나는 ‘냅둬유’교 신도다. 쥔장은 신성한 밭에서 신선한 채소만 자라야 한다고 믿는 유일신주의자라서 속세를 어지럽히는 풀들이 교세를 확장하기 전에 씨를 말리려 지극정성이다. 툭하면 약통을 짊어지고 구석구석을 수색한다.
안충기 삽질일기 만화
나는 공생을 추구하는 박애주의자라서 쥔장의 박해주의에 반기를 들고 웬만한 풀은 그냥 놔둔다. 일본에는 800만이 넘는 신이 있고 인도는 최대 6억분이나 된단다. 이 많은 신을 어떻게 셌겠나마는 어쨌거나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신이 악수하며 산다는 의미 아닌가. 밭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혼자 살겠다고 내가 심은 채소를 못살게 구는 놈들 아니라면 그냥 둔다. 풀과 채소가 함께 자라면 물 적게 줘도 되고, 벌레 적고, 노동하느라 힘도 덜 든다. 이십년 삽질하며 깨달았다.
농장에서 셋방살이 하는 이웃들 중 백에 아흔여덟은 쥔장의 지도방침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분양받은 밭들이 비질한 마당마냥 정갈하다. 그러니 청정한 성전 한가운데서 두서없이 어수선한 내 밭이 곱게 보일 리 없겠다. 쥔장은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삽질 경력 좀 있는 이웃들은 오며가며 한마디씩 보탠다.
하늘소 중의 하나일까. 상추 잎을 들추니 뭘 훔쳐 먹다 들킨 놈처럼 깜짝 놀라 허우적대며 도망간다. 떼 지어 오글거리는 쥐며느리를 잡숫고 계셨는지 모르겠다. 드시는 데 훼방해서 죄송합니다.
어느 해에는 아침에 갔더니 웬 아주머니가 작은 칼로 내 밭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같이 농사짓는 친구의 아내인 줄 알고 인사를 하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나 하고 번호판을 보니 맞았다. 누구신지요, 남의 밭에서 왜 이러시는 거예요 했더니 ‘너는 누구세요’라기에 당황했다. 밭주인이라고 하니, 풀이 무성해서 농사 그만둔 줄 알았다, 통통한 채소가 아까워 그랬다나 뭐라나. 6월로 넘어가면 내 밭은 풀 반 채소 반이 되니 오해할 만도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그새 빽빽해진 잎채소를 솎아내고 고추와 토마토 곁가지를 따주는데 쥔장이 저쪽에서 슬슬 다가온다. 교시 하달과 현장 지도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방향을 틀어 내 옆 밭으로 간다. 꼬맹이까지 3대가 동시에 출동한 행복이 가득한 집이다. 할아버지와 아들은 풀을 박멸하고 비료 넣고 물을 주고, 할머니와 며느리는 손바닥 두 개만한 상추 잎을 따내고, 손자는 밭 사이를 뛰어다니며 논다. 노인들은 대개 비료랑 친하다. 2004년 9월 6일 기록을 보니 옆 밭 할머니가 ‘약 안하고 비료 안주면 크덜 않어요’라고 했다. 그러면서 요소비료를 배추 밑에 아낌없이 집어넣었다. 질소가 주성분인 요소비료를 먹으면 채소 잎은 진초록으로 물들며 미친 듯이 자란다.
깔끔하게 이발한 로메인. 잎을 따낼 때는 아랫도리를 깔끔하게. 잎 중간을 분지르면 남은 부분이 계속 자라 보기 흉하고 양분 낭비다.
보름 만에 오니 상추가 나무가 됐잖아요, 속잎 두세 장만 남겨놓고 다 따내요, 일주일이면 또 금세 자라요. 아이고 이거 봐요, 비료를 너무 많이 줬어요, 그렇게 뿌리 가까이 한 주먹씩 놓으면 상추가 타버려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오늘의 말씀을 우렁차게 연설하던 쥔장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내 밭을 또 본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돌아서서 몇 발자국 가더니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며 그예 한마디 한다.
“약… 해야 되는데… 안 칠 거지요?”
애기똥풀 꽃이 한창이다. 꽃사과 하얀 꽃에 뒤이어 밭둑을 덮었 다. 저 위 밭 얻어 농사짓다가 지금은 둑 아래로 옮겼다. 이제 무릎보다 더 자란 풀숲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 것. 뱀 밟으면 간 떨어짐. 뒷 산에는 아까시 꽃이 하얗다.
얼굴 본 지 십년 됐으니 이제 쥔장도 내 일에 크게 간섭 않지만 그래도 속이 터지나 보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약=병이나 상처 따위를 고치거나 예방하기 위하여 먹거나 바르거나 주사하는 물질’이다. ‘약을 치다=뇌물을 먹이다’는 뜻이 있고 저잣거리에서 ‘약을 하다=마약을 먹다’는 의미로도 통한다. 나는 굳이 멀쩡한 채소에 뇌물 찔러주고, 마약까지 주사할 이유가 없다.
한때는 나도 이 밭 저 밭을 기웃거리며 심판을 봤다.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닫았는데 주제 모르고 훈수 두다가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 들으면 얼마나 남우세스러운가. 올해는 밭둑의 참나물을 구경만 하고 있다. 거기서 한참 떨어진 풀숲에 숨어있는 대타를 발견해서다. 바람에 날아간 씨가 뿌리를 내렸을 텐데, 하늘대는 잎은 연초록이고 낭창낭창한 허리는 30㎝가 넘는다. 줄기째 꺾어 씹으니 오래도록 단맛이 난다. 단비 내리자 비틀대던 대파가 일어섰다.
그림·사진·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ㅣ중앙일보 2019.05.25
? 2022.03.20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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