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안충기의 삽질일기] 잔머리 9단 까치, 혀놀림 10단 고라니 (2022.03.20)

푸레택 2022. 3. 20. 18:09

잔머리 9단 까치, 혀놀림 10단 고라니 | 중앙일보 (joongang.co.kr)

 

잔머리 9단 까치, 혀놀림 10단 고라니

"땅을 헤치니 씨앗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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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꽃은 5월에 핀다. 안도현은 이렇게 노래했다. 이 세상 가장 서러운 곳에 별똥별 씨앗을 하나 밀어 올리느라 다리가 퉁퉁 부은 어머니/ 마당 안에 극지가 아홉 평 있었으므로/ 아, 파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는 그냥 혼자 사무치자/ 먼 기차대가리야, 흰 나비 한 마리도 들이받지 말고 천천히 오너라

[안충기의 삽질일기] 잔머리 9단 까치, 혀놀림 10단 고라니

오월 밭은 천국이다. 햇살 좋지, 흙은 포실포실하지, 새싹 쑥쑥 자라지, 꼬리 물고 꽃까지 피어나니 온종일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풀은 손만 대면 쏙쏙 뽑히니 힘들 일도 없다. 삽질 초보나 베짱이형 농부도 그저 신난다. 유월로 넘어가며 밭은 서서히 지옥 본색을 드러낸다. 고춧대는 가슴까지 자라고, 토마토 줄기는 목까지 올라오고, 옥수수 키는 농구선수급이 되는데 풀은 그 틈을 비집고 악을 쓰며 올라온다. 새순에는 진딧물이 새카맣다. 얼굴에는 거미줄이 척척 달라붙는다. 땀내 맡은 산모기는 떼로 달려들고 뱀은 소리 없이 발 옆을 스쳐 간다. 풀숲에서 허리 펴고 일어나면 바로 앞에 모르는 사람 눈이 있어 기겁도 한다. 사람들의 웃음은 차츰 사라지고 풀 무성한 밭이 하나둘 늘어난다.

열무·봄무·알타리를 끝으로 봄 파종을 마쳤다. 더워지기 전에 상추 종류를 한 번 더 넣으면 된다. 씨 뿌리는데 뒤통수가 싸하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이상해서 다시 돌아보니 아이고 저놈들. 밭 한쪽에 있는 커다란 물통 가장자리에 까치들이 앉아있다. 놈들 간땡이가 커졌다. 평소에는 밭과 이어진 동산 나뭇가지에 앉아 내 동태를 살피더니 이제 대놓고 코앞까지 왔다. 얘들 관심은 내가 아니라 씨앗을 넣고 있는 내 손이다. 올해도 일용할 양식을 가져왔네, 저자는 은인인가 호구인가. 뭐 저희끼리 이런 수다를 떨 테다. 그래 너희 앞에서 머리 조아리고 조공을 바치니 내가 머슴 맞다.

씨앗도둑 까치는 전봇대에 둥지를 틀어 누전의 원인을 만든다. 때문에 한전은 마리당 6000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있다. 사냥이 쉽지는 않다. 까치는 4~5세 아이의 지능을 가져 한전 차량이나 사냥꾼의 모습을 기억했다가 나타나면 도망가기도 한다. 겨울 두 달 동안 까치를 잡아 1400만원을 번 선수도 있다.

농사지으며 처음 몇 해는 콩 수확이 시원찮았다. 싹이 올라오지 않았다. 종자가 부실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다음 해도 마찬가지였다. 땅을 헤치니 씨앗이 보이지 않았다. 줄줄이 다 그랬다. 깊이 묻은 씨앗이 간혹 싹이 텄다. 땅거죽을 가만 살펴보니 뭔가로 파헤쳐 씨앗을 쏙쏙 빼낸 흔적이 보였다. 범인은 새였다.

밭 주위에 영산홍이 한창이다. 모종으로 심은 채소들은 수확을 시작했다. 벌레들이 알을 까기 시작하니 맨 아래 잎은 아깝다고 생각 말고 떼어낼 것. 혹시 모르니 봄과 가을에 구충제를 꼭 복용할 것.

콩 심을 때는 세 알을 넣는다. 하늘과 땅과 내가 나눈다는 의미다. 까치·까마귀·멧비둘기 같은 날짐승과 흙 속의 생명과 같이 살자는 의미다. 그런데 타율 삼할삼푼이 쉽지 않다. 프로야구 지난 시즌 방망이 1등 김현수의 타율이 3할6푼2리다. 삼 분의 일이면 타격왕 급이지만 문제는 새들의 집중견제다. 겨우내 굶주렸으니 포동포동한 씨앗을 보면 눈이 뒤집힐 테다. 그러니 땅 몫이고 사람 몫이고 따지지 않고 보이는 대로 다 파먹는다. 출루 저지도 모자라, 삼중살까지 노리니 호의를 권리로 생각하는 치사한 놈들이다. 때를 놓치면 농사를 망치기에 나는 다시 붓고 새들은 또 파먹는다.

상추 사이에서 냉이꽃이 쑤욱 고개를 내밀었다. 수수해서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다.

새를 쫓는 방법은 가지가지다. 폭탄 터지는 소리를 내뿜는 폭음기, 독수리나 매가 움직이는 모형, 공기를 불어넣어 이리저리 몸을 꺾으며 움직이는 풍선 인형, 햇빛 받아 번쩍이는 CD와 은박지 등이 있다. 새들이 싫어하는 냄새가 나는 약을 치고, 그물로 밭을 덮기도 한다. 제 동료들을 잡아 장대에 걸기까지 한다. 밀짚모자 쓴 허수아비는 아득한 고전이다.

이렇게까지 모질 이유가 없어 나는 소박한 방법을 썼다. 씨앗을 깊이 묻었다. 기온이 확 올라가자 고개 들던 싹이 물러버렸다. 지그재그로 뿌려도 귀신같이 찾아 먹는다. 놈들 코가 개 못지않다. 싹 트면 치울 생각으로 심은 자리에 돌을 올려놨더니 발로 툭 치고 꺼내 먹는다. 잔돌이 오히려 나 여기 있소 하는 표시가 된 셈이다. 난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지만 먹지 않으면 죽는 새들은 집요하다. 공격은 자유롭고 방어는 난감하니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올해는 새들에게 복수했다. 콩을 심지 않았다. 강낭콩도 완두콩도 작두콩도 심지 않았다.

고라니가 훑어 먹은 로메인 잎. 심약한 놈이라 다 먹지도 못하고 줄행랑쳤다.

그렇다고 끝난 싸움이 아니다. 채소만 노리는 놈도 있다. 고라니다. 내 밭이 산에 붙어 있을 때는 집중적으로 당했다. 밭을 안쪽으로 옮기고 안심했더니 웬걸, 보름 만에 가보니 여기저기 발자국이 찍혀있다. 산에서 내려와 대각선으로 밭을 넘어왔다. 발자국은 줄지어 심은 모종 부근에서 어지럽게 엉겨있다. 주위를 살피며 살금살금 로메인을 뜯어 먹은 모습이다. 밤에 다녀갔을 텐데, 들어온 보폭이 좁고 나간 보폭이 큰 거로 보아 개가 짖자 고라니 살려 하고 냅다 튄 모양새다. 그래도 고라니는 새보다 양심범이다. 재작년 가을에는 놈이 김장 무 잎을 알뜰하게 훑어 먹었다. 핥고 간 무를 들여다보며 무릎을 쳤다. 생장점은 건들지 않았다. 자라면 또 올 생각이었는지, 양심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환상의 혀 놀림 아닌가. 다시 잎이 올라왔지만 왕성한 생장기에 일격을 당했으니 그해 무는 보잘 게 없었다.

그래서 농장의 명당은 쥔장네 집 가까이 있는 밭이다. 수도꼭지와 그늘막 옆이고 개까지 있으니 새며 고라니가 얼씬도 못 하는 자리다. 호시탐탐 이 자리를 노리지만, 동네 터줏대감들이 방 뺄 생각을 않는다. 싸움은 봄이 가며 끝난다. 신록이 초록으로 넘어갈 즈음이면 산에는 먹을 게 지천이다.

그림·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ㅣ중앙일보 2019.05.11

/ 2022.03.20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