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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충기의 삽질일기] 헛기침의 용도 (2022.03.20)

푸레택 2022. 3. 20. 18:02

[안충기의 삽질일기] 헛기침의 용도 | 중앙일보 (joongang.co.kr)

 

[안충기의 삽질일기] 헛기침의 용도

지나가는 사람인가 하고 일하는데 다시 소리가 들렸다. 흡, 하며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어, 어 하며 나도 모르게 두어 걸음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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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둑에서 자라는 채소와 모종으로 심은 채소를 처음 거두었다. 머위, 참나물, 부추, 흑상추, 로메인, 오크리프, 고들빼기, 민들레. 잎에 묻어온 달팽이 한 마리를 찾아보세요. 사진을 찍고 창문 밖 풀숲으로 휙. 안충기 아트전문기자

[안충기의 삽질일기] 헛기침의 용도

2005년의 일이다. 지금은 서울에서 밭을 얻어 농사를 짓지만 그때는 인근 신도시에서 삽질을 했다. 내가 살던 아파트 앞으로 외곽순환도로가 지나갔다. 도로에서 가파른 언덕을 열댓 걸음쯤 내려가면 농수로가 있다. 너비 5미터에 깊이는 어른 키 두 배 정도 되는 꽤 큰 규모다. 농사철이면 시커먼 흙탕물이 쉭쉭 소리를 내며 파도처럼 흘러내려갔다. 비 오는 날이면 이언 매큐언의 소설 『나비』 속에 나오는 살인 현장인 음산한 수로 느낌이 났다.

때로는 물이 넘쳐흘렀다. 수로를 따라 들어온 한강물은 모세혈관처럼 퍼져 도시 너머 너른 들을 적셨다. 주민들은 수로 옆 좁고 긴 땅을 일궈 농사를 지었다. 시에서는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어느 늦은 봄날 수로 옆을 산책하다 메마른 잡풀 무성한 밭을 만났다. 며칠을 두고 봐도 그대로였다. 주인이 이사를 갔던지 무슨 사정이 있어 방치한 듯 했다. 삽과 괭이로 밭을 일구고 씨를 뿌렸다. 주인이 나타나면 돌려줄 생각이었다.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집 베란다에서 밭이 내다보였으니 출근 전 이른 아침에 다녀오곤 했다. 그때만 해도 그 외곽도로는 차가 드물었고 오가는 사람들은 어쩌다 보였다.

모종은 밭 가장자리에 심고 씨앗은 안쪽에 뿌린다. 안충기 아트전문기자

하루는 풀을 뽑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여자 목소리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인가 하고 일하는데 다시 소리가 들렸다. 가냘프고 스산하게 떨리는 목소리, 잘못 들었나 했지만 아니었다. 나지막한 중얼거림이었다. 길에서 밭으로 내려올 때는 분명 아무도 없었다. 일할 때 별안간 누가 나타나면 놀랄까봐 찬찬히 둘러본 터였다. 바로 옆에서 넘실대며 흐르는 물은 검고 깊었다. 이마에 땀이 나는 날이었는데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한 해 전 여름, 이 농수로에 어떤 할머니가 빠져 죽었다는 말이 퍼뜩 떠올랐다.

앞 다퉈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 올해는 성장이 예년보다 일주일 정도 느리다. 겨울은 춥지 않았는데 봄 되며 날씨 변덕이 유난스러워서다. 이달 말이면 먹을 만하게 자란다. 안충기 아트전문기자

난 무서운 거라면 질색이다. 어릴 때 영화 엑소시스트를 보고 한동안 밤마다 가위에 눌렸다.  언젠가 멋모르고 텔미썸씽을 보다가 핏빛화면에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지금도 귀신 영화나 피가 튀는 영화는 보지 않는다.

바글바글 올라오는 새싹들을 솎아냈다. 아깝다고 놔두면 망한다. 봄배추, 20일무, 아욱, 상추, 쑥갓. 한눈에 알아보면 당신은 고수. 안충기 아트전문기자

목소리는 젊지 않았다. 톤이 낮았고 어딘가 음산했다. 설마… 하면서도 혹시 하는 의심이 들었다. 검은 물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때 다시 흐느적거리며 들려오는 소리.

아…자…씨……
반사적으로 목을 홱 돌렸다. 눈앞에 하얀 여자가 서있었다. 모시옷을 입은 작은 할머니였다. 허리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흡, 하며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데 할머니가 고개를 들더니 손으로 내 쪽을 가리키며,
그…배추모종…사다가…심었쓰요?

20일무. 좁쌀만한 씨가 보름 만에 이만큼 자랐다. 씨앗 하나에 우주가 담겨있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안충기 아트전문기자

내 왼쪽 밭에서 농사짓는 분이었다. 나는 경계 안테나를 끄고 있었고 몸 가벼운 할머니는 사뿐사뿐 언덕을 내려온 거였다. 일부러 그랬을까마는 그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다음에 또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부아가 났다. 뭐라고 구시렁대며 밭을 돌아다니던 할머니가 어느 순간 조용했다. 돌아보니 바람처럼 사라졌다.

가운데 뽕뽕 뚫린 구멍이 고라니 발자국. 안충기 아트전문기자
고라니에게 밟히고도 상추는 잘도 자란다. 안충기 아트전문기자

며칠 지나지 않아 일하는데 또 뒷덜미가 서늘했다. 이번에는 하얀 할아버지였다. 언덕 위에서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내 쪽으로 내려왔다. 어, 어 하며 나도 모르게 두어 걸음 물러났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내 앞을 지나갔다. 오른쪽 밭주인이었다. 일하는 내내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나도 멀찍이서 풀만 뽑았다. 한참 일하다 보니 할아버지는 가고 없었다.

모종으로 심은 로메인 사이로 씨를 뿌린 상추 새싹이 올라온다. 새싹이 다 자라면 로메인은 꽃대를 올리고 임무완수. 안충기 아트전문기자

놀란 건 놀란 거고 공부는 공부다. 노인들을 만나면 나는 농사정보를 얻어듣느라 바빴다. 그때 내 밭에서 고추가 시원찮은 이유는 땅이 습해서였다. 농수로 물이 넘어와 땅이 젖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할머니는 고추를 심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고추농사 짓는 사람들을 보면 농약을 어찌나 많이 치는지 사다 먹기가 영 찜찜하다고 했다. 도라지 씨앗은 아무 때나 뿌려도 되지만 2,3년은 길러야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소나무꽃이다. 센바람 불 때 솔숲에서 송화가루가 날리는 풍경 본적 있으신가. 안충기 아트전문기자
밭 옆의 동산은 지금 신록에서 초록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안충기 아트전문기자

하여튼 사람들아, 그러니까 한적한 데 다닐 때는 제발 헛기침이라도 좀 하고 다니시라.

그림·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ㅣ중앙일보 2019.05.04

/ 2022.03.20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