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0) / 회임을 예감하며 - 조명 시인의 ‘예감’ - 뉴스페이퍼 (news-paper.co.kr)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0) / 회임을 예감하며 - 조명 시인의 ‘예감’
예감 / 조명
비로소 그대의 프러포즈를 받았네
그것은 봄비 내리는 들녘을 통째로
선물 받았다는 뜻
머리카락이 젖을 때부터 상상은 시작되고
빗발은 가슴을 밟아즈리네
몸 밖으로 먼지가 풀풀 날아가네
겨우내 바위산을 홀로 서성이던 외각수는
털갈이를 마친 턱을 우아하게 치켜들고
컴컴한 동굴 속에서는 금갈색 껍질을 깨며
어린 짐승의 햇숨결이 들려오기도 하네
손바닥이 간질거리고 주먹이 근질거리는 일이네
그대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장대비가 푸르름 물큰대는 품을 열어젖히는
활엽수림을 고스란히 선물 받는다는 뜻
눈꺼풀 열리고 태양의 더듬이 자라나
마지막 날갯짓을 접을 때까지
나는 한 생의 비를 하룻밤에 맞네
그것은 깊이 잠들었던 영혼의 정낭과 난소를 깨우는 일
아득히 둥근 우주의 태반에서는
물방울 터뜨리면서 고물대는 것들이 생겨나네
달아오른 심장의 판막을 두드리면서
돌고래 같은 아이가 파닥이며 날아오르는 소리
그대와의 사랑이 깊어지는 일이란
그러나, 그렇네
비 오는 어느 겨울밤 더 깊숙한 소외를 그리워하며
빈 별자리를 찾아 서로 다시 떠나리라는.
― 『문학나무』(2005. 여름)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0) / 회임을 예감하며 - 조명 시인의 ‘예감’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해설>
남성은 여성에게 수백 혹은 수천 년 동안 온갖 못된 짓을 다하였다. 중국의 전족(纏足)이 그러했고 소말리아 등 아프리카 곳곳에서 행해진 음핵 제거가 그러했다. 후자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갑오경장 전까지 과부의 재가가 금지되었다. 서얼(庶孼, 첩의 자식)이라고 생애 내내 차별받는 자식을 보는 그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남성 중심의 인류 문화사는 여성에게 성욕을 갖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여성이 내 마음에 드는 남성과 만나서 몸 튼튼하고 똑똑한 자식을 가지려는 마음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된 것이 19세기 말엽의 일이다. 미국의 여성들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는데 1890년 와이오밍 주가 주헌법으로 여성의 선거권을 인정한 최초의 주가 되었다. 42년에 걸친 투쟁 끝에 얻어낸 결과였다. 뉴질랜드는 여성의 선거권을 인정한 첫 번째 나라로 그해가 1893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몇몇 나라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다수의 나라가 여성에게 참정권을 허용하였다.
여성 화자가 남자를 몸 안으로 받아들여 회임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생명체를 잉태하여 출산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표현한 시를 나는 지금껏 보지 못했다. ‘장대비’ 혹은 ‘한 생의 비’를 남성이 여성 화자의 몸 깊숙한 곳에 사정하는 정황으로 여기게 되는데, 그 이유는 “깊이 잠들었던 영혼의 정낭과 난소를 깨우는 일”이라는 표현 때문이다. 그 행위는 쾌락에서 시작하여 열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남녀상열지사가 아니다.
두 생명체의 결합은 또 다른 생명체의 탄생을 위한 위대한 역사(役事)인 것이다. 하늘을 나는 새도, 바다 속 돌고래도, 밀림의 맹수들도,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다. 양성생식을 하는 생물이라면 이성과의 뜨거운 결합을 꿈꾸는 본능을, 종족 번식의 욕망을, 생명 창조의 꿈을 버릴 수 없다. 하지만 두 개체는 때가 되면 헤어져야 한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 사랑의 종말은 이별 아니면 사별이므로.
비 오는 어느 겨울밤 더 깊숙한 소외를 그리워하며 빈 별자리를 찾아 서로 다시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생명체의 슬픈 운명이다. 시인은 에로티시즘의 극치를 보여주고자 이 시를 쓴 것이 아니다. 생로병사의 신비스러운 의미를 탐색해 본 것이다. ‘예감’이란 제목은 생명체의 탄생과 생장, 번식과 죽음의 과정에 대한 일종의 예감을 담은 것이 아닐까? 조명의 시집 『여왕코끼리의 힘』은 시인의 이런 생각이 집대성된 핫한 시집인데 조명이 제대로 안 되었다.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 뉴스페이퍼 2019.04.24
/ 2022.03.17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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