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흔적] 고향 학교 군대 교단

[추억여행] 초등학교 교과서 국어 2-2 ‘의좋은 형제’ (2022.02.22)

푸레택 2022. 2. 22. 21:40

■ 의좋은 형제

옛날 어느 시골에 형제가 의좋게 살고 있었습니다.
형제는 같은 논에 벼를 심어서 부지런히 김을 매고 거름을 주어 잘 가꾸었습니다. 벼는 무럭무럭 자라서 가을이 되자 곧 벼를 들이게 되었습니다.

“형님, 벼가 잘 되었지요. 이렇게 잘 여물었어요.”
“참 잘 되었다. 언제 곧 베어야 할 거야.”

누렇게 익은 논을 바라보며 형제는 기뻐하였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형제는 벼를 베기 시작하였습니다.

“형님은 동쪽에서 베어오세요. 저는 서쪽에서 베어갈 테니.”
“그래라, 누가 더 많이 베나 내기를 할까?”

형제는 부지런히 벼를 베었습니다.
형제는 온통 땀에 젖었지만, 쉬지 않고 열심히 베어나갔습니다.
넓은 논도 어느덧 다 베어, 훤한 벌판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 누가 많이 베었나 한군데 쌓아보자.”

형제는 자기가 벤 벼를 각각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형님은 동쪽에 커다란 낟가리가 되게 벼를 쌓았습니다.
동생은 서쪽에 높다랗게 쌓았습니다.

“누가 많이 베었을까?”

서로 대보았지만 둘은 똑 같았습니다.
형제는 서로 한더미씩 의좋게 나누어 가지기로 하였습니다.
그날 밤, 동생은 저녁을 먹고 나서 문득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벼를 형님과 똑같이 나누어 가졌지만, 잘 생각해보니 암만해도 안 됐어. 형님댁엔 식구가 많거든.”

동생은 형님에게 벼를 보내드리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먼저 말을 하였다가는 형님이 받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옳지. 형님 몰래 갖다드려야지.”

동생은 깜깜한 논으로 가서, 벼를 나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자, 이제 이만 하면 형님이 더 많겠지.”
동생은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형님도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동생과 같이 똑같이 벼를 나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했어. 동생은 살림을 새로 시작했으니까 살림에 드는 것이 더 많을 거야.”
형님은 밤중에 논으로 나갔습니다.

“영차!”
형님은 자기의 벼를 동생의 낟가리에 갖다 쌓았습니다.
“자, 이만 하면 되겠지. 아마 살림에 도움이 될거야.”
형님도 웃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동생이 아무 것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에 퍽 기뻤습니다.
날이 밝아서 해가 동쪽 하늘에 떠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생은 논에 나가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젯밤에 그만큼 많은 벼를 형님 낟가리에 옮겨놓았는 데, 이게 어찌된 셈입니까? 벼는 조금도 줄지 않았습니다.
“참 이상도 하다.”

형님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날 밤 형님은 또 몰래 논으로 가서 자기의 벼를 동생 낟가리에 쌓았습니다.
“이만하면 동생 것이 더 많겠지.”
형님은 기뻐하며 동생의 낟가리를 처다보았습니다.

형님이 집으로 돌아간 뒤, 이 번에는 동생이 논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벼를 끙끙 짊어 지고 가서 형님의 낟가리에 잔뜩 쌓았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 형님과 동생은 몰래 다시 논에 나가보았습니다.
그러나 낟가리에는 여전히 똑같이 쌓여있었습니다.

“참 이상도 하다.”
“참 이상도 하다.”

형님과 동생은 아무리 생각해도 까닭을 몰랐습니다.

다시 밤이 되자, 형님과 동생은 몰래 논으로 가서 또 벼를 나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 저쪽에서 누가 옵니다. 형님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 때였습니다. 구름 사이에서 달님이 환히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아이구, 형님 아니십니까?”
“아, 너였구나.”

이제야 형제는 벼 낟가리가 줄어들지 않은 까닭을 알았습니다.
형제는 저도 모르게 볏단을 내던지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얼싸 안았습니다.

하늘에서 달님이 웃으며 보고 있었습니다.

- 1964년 2월 초등학교 국어 2-2 처음 수록, p72-81

의좋은 형제상

「옛날 어느 마을에 의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땀 흘리며 열심히 농사를 지어 추수를 하고 서로가 벤 벼를 똑같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날 밤 동생은 형님을 걱정하면서 ‘형님은 식구가 많으니 아무래도 나보다 들어가는 것이 많을 텐데 벼를 더 가져다주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밤에 몰래 나가서 볏단을 형님의 낟가리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형님도 ‘동생은 새로 살림을 차렸으니 아무래도 필요한 것이 많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동생의 낟가리에 볏단을 져다가 옮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두 형제가 아침에 일어나 들에 나가보니 낟가리는 하나도 줄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두 형제는 속으로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라며 그 날 밤 또 낟가리를 서로 옮겨 놓았습니다. 이번에는 형님이 먼저 낟가리를 옮겨 놓고, 뒤를 이어 동생이 나와 땀을 흘리며 자신의 낟가리에 쌓여있는 볏단을 형님의 낟가리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보니 또 그대로인 것을 알았습니다.

형제는 밤에 또 다시 들에 나가 서로 볏단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이 날은 둘이 서로 마주쳤습니다. 마침 구름 속에 가려져 있던 달이 얼굴을 내밀어 두 형제는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형제는 서로를 알아보고 볏단을 내던지고 한참을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1964년 2학년 2학기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를 정리한 내용이다. 어릴 적 이 글을 읽으면서 나도 이다음에 크면 이런 의좋은 형제처럼 살아야지 하면서도 그저 단순히 옛날이야기요, 학생들에게 형제의 우애를 가르치기 위한 글이려니 생각을 했다. 그런 지어낸 줄로만 알았던 이야기가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임을 알았을 때 조금은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몹시도 반가웠다.

예당저수지를 끼고 돌아 예산군 대흥면사무소 앞에 가면 을 조성하고 있다. 한편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성만(李成萬) 형제 효제비(孝悌碑)가 서 있다. 1497년(연산군 3년)에 세워진 높이 142cm, 폭 43.5cm, 두께 25cm의 화강암 석비인 이성만 형제 효제비는 두 형제의 우애가 얼마나 깊었는가를 알려준다.


이 비는 원래 가방교(佳芳橋) 앞에 서 있던 것을 예당저수지의 조성으로 물에 잠길 위기에 놓여있자 이곳으로 옮겨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대흥호장(大興戶長) 이성만, 이순(李順) 형제가 모두 지극한 효자로서,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성만은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고 순은 아버지의 묘소를 지켰다. 3년의 복제(服制)를 마치고도 아침에는 형이 아우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을 찾았으며, 한 가지 음식이 생겨도 서로 만나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1497년에 후세 사람들의 모범이 되게 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이 비를 건립하였다.

비는 비각을 세워 그 안에 있으며 의좋은 형제상이 우뚝 서 있다. 이곳저곳을 들러보느라고 오후에 도착한 공원에는 넘어가는 석양에 두 형제의 얼굴이 더욱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형은 지게에 볏단을 가득지고, 동생은 가슴에 볏단을 한 아름 안고 서로 마주 서있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를 반성해 본다. 어릴 적 그 내용을 보면서 우애 있게 살리라고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바보 같은 생활을 해왔구나 하는 마음이다. 저 형제들처럼 저렇게 살아가지 못했다는 것도 미안한 생각이지만 이런 실제 인물들을 단순히 옛날 이야기로만 알았던 무지를 먼저 탓해야 할 것인지.

조각상 앞에 당시 2학년 2학기 국어책의 겉장과 11쪽에 달하는 책의 내용이 그대로 동판에 새겨져 있다. 하나하나를 읽어가면서 옛 기억들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그 동안 전국의 많은 곳을 다녔지만 오늘처럼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참이나 발길을 떼지 못하고 바라다보는 두 형제의 상 사이로 넘어가는 해가 더욱 밝은 빛을 비친다. 이제 만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아이들을 데리고 꼭 한번 이 곳을 들려 가보라고 권해야겠다. (2006년 7월 20일 블로그뉴스 송고)

/ 2022.02.22(화) 옮겨 적음

https://youtu.be/NcDQtA3PMB4

https://youtu.be/UiY7uiFx3Gs

https://youtu.be/u7hkdAlO-q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