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 빠진 날 / 무명인
친구 생일 축하 모임을 가졌다. 코로나도 있고 해서 한동안 어울리지 못했는데 친구들끼리 단톡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한 명이 귀 빠진 날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렇잖아도 다들 마음은 주저주저하면서도 몸은 근질근질했는데 좋은 구실이 생긴 거다. 모처럼 모여 한잔 했다. 자연스레 생일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아침에 미역국은 얻어 먹었냐”부터 “이제 우리 여생에 생일이 몇 번이나 남았을까”하는 쓸쓸한 대화까지 나누다 생각지 않게 많은 걸 깨닫게 됐다.
쓸데없이 한 친구가 물었다.
“생일을 왜 귀 빠진 날이라고 부르는지 알아?”
“그러게 코나 눈 빠진 날도 아니고, 왜 하필 귀 빠진 날이지?”
태아는 머리부터 세상에 나오는데 산모에겐 그때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산부인과도 제대로 없던 시절, 시골집에서 순산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옛날 어머니들은 해산을 할 때 댓돌 위에 고무신을 벗어놓고,
‘내가 다시 저 신을 신을 수 있을까’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태아는 머리가 어깨 너비보다 크다. 그래서 일단 귀가 보이는 게 중요했다. 귀가 빠져나오면 몸통과 다리는 순조롭게 따라나오니 출산은 다 한 거나 다름없다고 한다.
한 친구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 그런데 생일은 어머니가 가장 고생한 날인데 왜 생일 축하는 저희들끼리만 하지?”
결혼을 해서 아내가 아이를 낳는 걸 보며 생일의 주인공은 자기가 아니라는 걸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생일에는 꼭 어머니 아버지에게 미역국을 끓여드리거나 맛있는 걸 사 드리고 선물을 드렸다고 한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그의 아이들도 자신의 생일에는 그렇게 따라 한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나는 결혼 후 내 생일에 부모님을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멀리 계시긴 하셨지만 아내와 아이들하고만 즐겁고 오붓하게 생일상을 먹었다.
어머니는 오히려 내 생일에는 가족과 좋은 데 가서 외식하라고 전화를 하시곤 했는데, 나는 정작 어머니에게 스웨터 하나 선물한 적이 없다.
다른 때는 문안 전화를 곧잘 하면서도 막상 생일에는 “저를 낳느라고 얼마나 힘드셨어요”라는 감사의 전화 한 번 한 적이 없다.
생일은 내 것인 줄만 알았다. 친구는 생일 아침에 미역국을 먹는 관습은 출산의 고통을 겪으며 생명을 주신 어머니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의미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귀 빠진 날에는 자기가 미역국을 먹는 게 아니라, 귀를 빼준 어머니에게 미역국을 끓여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진위는 모르겠으나 귀는 귀퉁이에 붙어있어서 ‘귀’가 됐다고 한다. 사람이 잘났다고 말할 때 왜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반듯하다고 할까. 눈, 입, 코도 있는데 왜 귀(耳)를 앞세웠을까?
귀는 얼굴의 핵심 지점도 아니고 변방에 달려있는데도 말이다. 그건 그만큼 귀가 소중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맨 앞에 간 거라고 한다. 늘 남과 세상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귀엽다’는 단어는 남의 말을 잘 귀담아 듣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는 우스개까지 곁들였다.
말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지만, 듣는 것은 가려들을 수는 없다. 듣는 것은 그래서 신의 뜻이라고 한다. 남이 내 험담을 할 때 ‘귀가 가렵다’는 표현을 생각해 보라
입은 하나인데 눈과 귀가 두 개인 건, 말하는 것보다 듣고 보기를 두 배로 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공자는 나이 60을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耳順)이라 했다. 이는 원래 무슨 말을 들어도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한다는 의미이지만, 무슨 말을 들어도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관용이 진짜 의미라고 한다.
선현들은 나쁜 말을 들으면 곧장 달려가 시냇물에 귀를 씻는다 했다. 나도 이제 이순의 나이가 넘었으니 그 경지에 언제나 도달할 수 있으려나.
늘 내 얼굴 귀퉁이에 붙어있지만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귀. 오늘 친구의 귀빠진 날에 많은 걸 생각하고 깨달았다.
2022.02.22(화) 《받은 글》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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