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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골목길] 대전·옥천: ‘대전 블루스’로 기억되는 오래된 대전, 깊은 밤의 작별 (2022.02.16)

푸레택 2022. 2. 16. 13:43

대중가요의 골목길(33)-대전·옥천 < 투어&코스 < 기사본문 - 자전거생활 (bicyclelife.net)

 

대중가요의 골목길(33)-대전·옥천 - 자전거생활

대전하면 ‘대전 블루스’다. 노래의 각인은 깊고 넓어서 메울 수가 없다. 대중가요가 귀한 대전의 옛노래는 결국 대전역 플랫폼이나 광장으로 모인다. 블루스곡이 품고 있는 흐느적거림은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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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골목길] ‘대전 블루스’로 기억되는 오래된 대전, 깊은 밤의 작별

대전하면 「대전 블루스」다. 노래의 각인은 깊고 넓어서 메울 수가 없다. 대중가요가 귀한 대전의 옛노래는 결국 대전역 플랫폼이나 광장으로 모인다. 블루스곡이 품고 있는 흐느적거림은 흐느낌으로 변하여 애수를 불러온다. 기적소리 길게 토하며 떠나던 증기기관차의 정서가 세월을 건너뛰어서도 이어지는 것은 저마다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랑과 이별의 추억 때문이다. 안정애의 원곡에서부터 조용필과 장사익의 절창을 지나 숱한 가수들이 다시 부르고, 일본의 가라오케까지 명곡으로 자리잡은 「대전 블루스」의 힘이 자못 놀랍다. 이제 ‘대중가요의 골목길’도 이별의 기적소리를 빌려와 막을 내린다. 언젠가 못다 한 노래의 막이 다시 오를 그날을 기다리며 이 밤 대전역 플랫폼에 서 있다

세상에 끝이 없는 일은 없다. 끝이 없는 길도 없다. 코로나19로 세상이 휘청거리고 저마다 타격을 받아 사는 일이 녹록하지 않더니 결국 자전거생활도 종이 잡지를 접어야 하는 시간이 오고 말았다. 활자 매체의 힘을 의심하지 않던 믿음이 흔들린 건 꽤 오래전부터이긴 해도 그 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이제 대중가요를 찾아 골목길을 헤매는 순례도 거리두기 명령처럼 단호한 정지다. 그럼 어디를 마지막으로 정해야 하는가. 옛노래의 바탕색이 이별과 탄식을 주조로 채색되어 있지만, 유별나게 어울리는 무대는 ‘대전발 영시50분’이다. 역은 이별과 상봉이 숙명이기에 추억의 기적소리를 불러내 마지막 무대의 효과음으로 빌리려고 대전역을 찾는다.

1914년에야 회덕군, 진잠면과 공주목 일부를 떼어내 대전면이 신설된 것을 보면, 대전은 철도의 개통과 함께 생겨난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대전은 일본의 식민 지배와 함께 건설된 신도시”라고 한 일본의 경제학자 하시야 히로시(橋谷弘)의 단정은 씁쓸한 사실이다. 1931년의 대전읍, 1949년의 대전시 승격을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도시의 팽창이다. 물론 1993년 대전엑스포 이후 과학 미래가 있는 첨단도시를 강조한다고, “대전에 역사가 없다”고 오해해선 안 된다.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로 계족산성을 비롯해 곳곳에 산성이 축성된 흔적만 봐도 그렇다. “갑천, 유등천, 대전천이 두루 흘러 큰물이 지지 않고, 유성 들판이 너른데다 강경장(江景場)이 가까워 사람 살만한 곳”이라고 청담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말했다.

ㅣ호남선이 갈라지던 대전역, 가락국수가 있는 10분 정차의 추억

대전역은 우리나라 철도의 큰 분기점이다. 지금은 회덕을 내려서서 대전역 조차장에서 바로 호남선이 분기하지만 원래 대전역에서 증기기관차를 바꿔 단 열차는 대전선 철로를 따라 서대전역으로 이어졌다. 석탄을 화구에 퍼 넣어야 하는 둔중한 철마는 150km를 달리면 아예 통째로 20여분 안에 바꿔달아 먼 여정을 이어나갔다. 여기에 대전역 ‘가락국수’가 태어났다. 기차가 서면 출출한 승객들은 재빨리 플랫폼의 국수 매대로 달려갔다. 차 안에서 파는 얇은 나무피 도시락 안에 식어버린 밥보다 30원짜리 뜨끈한 가락국수는 요즘 말로 가성비가 높았다. 미리 키보다 높이 쌓아놓았던 가락국수 사발은 국수 다발을 넣은 철망을 국물에 몇 번 흔드는 토렴 끝에 덥혀 나왔다. 훌훌 들이키듯 국수 가락을 넘기면서도 힐끗힐끗 제가 내린 열차 칸을 되돌아보던 긴장된 시간, 채 썬 파 몇 점, 고춧가루 한 술과 단무지 몇 조각이 더해진 그 단순한 맛은 잊지 못할 대전역 명물이었다.

얼마나 맛있었으면 생후 6개월짜리 갓난아기를 객차에 두고 온 엄마가 가락국수를 먹는 사이 기차가 떠나버렸을까. 천안역에 가서야 아기를 찾았다 하니 큰 소리를 질러야 간신히 들리던 대전역 철도 전화는 그날 불이 났을 것이다. 기관사가 통표를 팔에 걸지 못하면 역을 통과할 수 없던 단선 철도 시절, 자석식 철도 전화는 그나마 오늘날 KT 못지않은 전국적 중요 통신망이었다. 적어도 10분은 보장되던 정차 시간이 디젤기관차로 바뀌면서 줄어들었어도, 대전역 가락국수를 위해 도착 몇 분 전에는 차내 방송으로 정차시간을 미리 알려주기도 했다. 고속열차 시대, 2시간이면 더 갈 데가 없는 이 땅에서 대전역 가락국수는 전설로 남았다. 대전역 맞이방은 온갖 즉석 음식이 점령했고, 국숫집은 아래층 한구석으로 밀려나 예산국수나 일본식 우동집으로 구색만 갖추고 있다. 차라리 역 앞 가락국수집이 그 시절 원형에 가깝다고나 할까.


ㅣ블루스의 여왕 안정애의 「대전 부루-스」, 다시 불러 국민의 노래로 만든 조용필


1956년 신신 레코드 영업부장 최치수는 출장 중 대전에 하루를 머문다. 0시50분에 출발하는 목포행 완행열차가 떠나기 직전 한 남녀가 헤어지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며 떠오른 노랫말 메모를 본, 시인이자 작사가인 손로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어 작곡가 김부해가 받아 3시간 만에 완성했다는 노래다. 1936년생 하동 부잣집 딸 안정애가 불렀다. 발매 3일 만에 배급요청이 쇄도하며 대박 조짐이 보였다. 데뷔곡으로 나와 잠자던 <밤비의 부루스>도 덩달아 떴다. 그 후 <순정 부루스> <도라지 부루스>까지 나오며 안정애는 자연히 ‘블루스의 여왕’으로 불렸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대전 블루스>를 조용필의 목청으로 접했다. 가왕이 부른 노래의 절절함에 사람들은 저 심저(心底)에 가라앉아 있던 이별의 기억을 단숨에 길어 올린다. 이미 미8군 무대를 통해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들의 한 맺힌 자기를 향한 노래, 진성(眞性) 블루스(blues)를 아는 조용필의 해석은 어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대마초로 인한 휴지기’에 산천을 돌며 단련한 판소리 바탕의 절규 또한 결 곱고, 가느다란 조용필의 이전 목소리가 아니었다. 기적(汽笛)처럼 토해내는, 뼈에 사무치는 그 노래에 가요 대중은 슬며시 눈을 감고 이별의 플랫폼에 선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
아~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

기적소리 슬피 우는 눈물의 푸렛트 홈 
무정하게 떠나가는 대전발 영시 오십분 
영원히 변치 말자 맹세했건만 눈물로 헤어지는 쓰라린 심정 
아~아~ 보슬비에 젖어오는 목포행 완행열차
<대전 부루스> 최치수 작사, 김부해 작곡, 안정애 노래, 1956, 신세기 레코드


안정애의 「대전 부르스」는 정통 블루스와는 거리가 있다. 「신촌 블루스」의 엄인호와 김현식이 추구하던 오리지널 흑인의 블루스가 아니라 이른바 일본식 ‘화제(和製) 블루스’다. 그 불루스 물결은 전후 시대의 허무와 보복 소비처럼 다가온 사교춤 바람과 함께 흐느적거리며 끈적이는 밀착의 배경음악으로 애용되었다. “대전발 영시 오십분이 아니라 서대전발 영시 오십분이 아니냐”는 질문 사이에는 세월의 틈새가 너무 크다. 서울역을 20시45분에 출발하던 제33 열차는 0시40분에 대전역에 도착해 화차(火車)를 갈고 목포행 0시50분 깊은 밤 열차가 된다. 1960년 2월 열차 다이아(시각표)의 전면 개편으로 사라진다. 그러니 그 열차를 타려고 대전역에 나왔던 승객이 낭패를 보는 일도 당시에는 흔했다고 한다.

내노라하는 명품 가수 17인의 「대전 블루스」 잇달아 듣기는 나훈아, 주현미, 장사익에서 심수봉, 김정호까지 제각각의 목소리로 애조를 담아 표현한다. <대전ブルス>는 가라오케의 원조 일본에서도 일찍이 음반에 올랐다. 개인적으로는 미즈모리 카오리(水森かおり)보다는 장은숙의 목소리와 닮은 아오에 미나(靑江三奈)의 끈적이는 저음이 색소폰 블루스 리듬에 감싸 안겨 더 좋다.

 

ㅣ노래가 귀한 대전의 그 한 곡 「대전 블루스」 노래비, 행방이 묘연하다

“대전의 주제가가 왜 슬픈 노래여야 하는가”라는 반문이 있다 해도, 대전이 <대전 블루스> 한 곡으로 깊게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은 피해 갈 수가 없다. 대전보다 더 큰 달구벌 대구나 호남의 웅도 광주조차 딱 떠오르는 대중가요 한 곡이 없는 처지에 이는 배부른 투정처럼 들린다. 어느 한 곡을 그 도시의 상징으로 내세우려 한다고 세워지는 게 아니다. 세월의 이끼가 끼고, 대중의 가슴속 인생 아카이브에 배경 곡으로 자연스레 흥얼거려져야 비로소 그 도시의 노래로 자리 잡는 것이다. 

2016년 4월, 갑자기 대전역 광장에 멀쩡히 서 있던 <대전 블루스> 노래비가 사라졌다. 철도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9년에 세운 추억의 노래비였다. 비문은 좀 길지만 명문이다.


청풍명월 유서 깊은 고장, 충절과 인정이 넘치는 한밭 너른 땅, 국토의 동맥을 달리던 철마도 이곳에서 한번 큰 숨을 고르나니 나날의 애환을 철마와 함께해온 겨레 또한 이 땅이 정겨웁다. 추억과 동경, 그리움과 애절함도 이런 정분에서 비롯되는 것, 그래서 사람은 가도 노래는 남는다. 한국 철도 100주년을 맞아 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민족의 길목 대전역 광장에다 모든 이의 가슴을 적시던 추억의 노래 <대전 부르스>를 새겨 돌을 세우나니, 이 땅 이 겨레 사랑하는 새천년의 이정표가 되리라. 철마여, 대륙의 심장까지 힘차게 달려라. 한밭이여 영원하라. 1999. 9. 18 한국 철도 100주년 기념


노래비 앞에서 추억을 새기던 사람들의 아쉬움이 인터넷을 도배해도 행방이 묘연하다. 그 자리엔 원형 꽃시계가 조성되어 있다. 철거 이유는 이랬다. “지반침하와 붕괴 우려가 있다” “노숙자들의 쉼터가 되고 취객의 싸움터가 되어 미관에 좋지 않다” 등등의 이유였다. 사실 애초에 조형미보다는 거대 물신주의에 사로잡혀 50t은 족히 되어 보일 자연석에 새긴 것이 문제였다. 대전의 한 대학교가 설치비용을 부담했다고는 해도, 대문짝만하게 노랫말 앞면에 대학교 명패를 박아 생색을 낸 것이 눈에 거슬렸었다. 

노래비 설치에 얽힌 웃지 못 할, 아니 가슴 찡한 에피소드 하나는 비석에 새길 노래 원 창자 문제였다. 처음 부른 안정애 씨는 한사코 자신의 이름을 사양했다. <대전 블루스>를 명곡으로 만든 공은 가왕 조용필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고 했다. ‘노래비건립추진위’가 어느 노래비에도 커버한 가수가 들어가는 예는 없다고 버티면서 미리 새겨놓은 안정애의 이름은 페인트칠이 벗겨지는 이상한 노래비가 되기도 했다. 없는 치적도 끌어다 자기 것으로 만드는 세상에 안정애식 겸양은 노 가수의 인품을 엿볼 수 있게 하여 또 다른 감동이다. 그게 뭐 그리 대수였을까. 안정애 원곡에 조용필의 공 또한 적지 않아 불후의 명곡이 되었노라고 표기하면 될 것을 말이다. 이제 세월도 흘렀다. 대전역 광장도 동광장이 생겨났다. 철도 100년의 철도 영웅의 조형물이 거대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그 한쪽 어디에라도 다시 노래비를 찾아와 세울 일이다. 그 또한 철도 100주년을 맞아 세운 천년의 징표가 아니던가. 그 큰 노래비를 쉽게 파쇄할 수도 없을 테니 어딘가 눈비를 맞으며 눈물 흘리고 있으렷다. 

여전히 대전역 광장에는 시주함을 놓고 중얼중얼 경을 외는 승려의 목탁소리가 들린다. 노숙자들을 모아 손뼉 치며 찬송가를 부르고, 하나님의 어린양들은 구원을 간구하라는 외침으로 졸음이 깬다. 노래비는 간 곳 없고, 전후 곤궁의 시대에 문을 연 성심당 빵집만 성업 중이다.

ㅣ옛 가수들이 노래한 대전 또한 기차와 대전역 언저리다

대전역 광장은 대전 여행의 시발점이다. 대전이 철도의 분기점이자, 철도 부설로 발전한 도시임은 도시 지하철로 들어가는 지하도 초입이 입 벌린 디젤기관차 형상을 한 것을 봐도 그렇다. 작사가 최치수가 <대전 블루스>를 만들기 전에 이미 대전역의 애수에 관심을 가졌던 흔적은 <눈물의 대전역>을 1958년에 발표했음에서 볼 수 있다. 남성봉이란 낯선 이름의 가수가 나온다. 남인수류의 가수이자 남백송, 방운아, 손시향, 백야성, 윤일로와 동시대의 가수다. 경북 칠곡 태생인 그는 조선레코드와 오리엔트레코드에서 활동하면서 <쌍가락의 논개> <싸이클 청춘> <이별의 아리랑 고개> <한 많은 오작교> <사랑이냐 돈이냐> 등을 노래했고, 기차와 관련된 노래도 <서울행 삼등실>과 <방랑 열차>가 있다.


달리는 경부선은 길도 많은데 그대로 부산으로 떠나를 가나

아, 옛 님을 못 잊어서 광주로 갈까 아 아 생각을 그만두고 서울로 갈까
세 갈래 길이 뻗은 열차가 달려간다 눈물의 대전역

사랑은 하나인 줄 나도 알건만 청춘이 하도 많어 이별이더냐
달 뜨는 그 저녁에 지은 맹서가 꽃 피는 아 그 아츰에 시들 적마다
세 갈래 정을 맺은 열차가 달려간다 눈물의 대전역

오는 길 가는 길에 정거장이란 대전역 정거장만 아니건마는
철길이 한데 모인 내 가슴 속에 에~ 죄 많은 신호등을 누가 끌소냐
세 갈래 목이 잽힌 열차가 달려간다 눈물의 대전역
<눈물의 대전역> 최치수 작사, 김성근 작곡, 남성봉 노래, 1958, 대도 레코드


윤일로, 박애경, 송민도의 노래 가운에 들어있는 남성봉의 <눈물의 대전역>은 흡사 설운도의 <나침반>을 연상케 하는 확대판이다. 을지로에 선 사나이가 종로로 갈지 청량리로 갈지, 아니면 영등포로 갈지 사랑 찾아 갈팡질팡하듯, 그는 외항선을 타러 부산으로 갈까, 옛 연인을 찾아 광주로 갈까, 아니 서울로 갈까 세 갈래길 대전역에서 방황한다. 내 마음 나도 몰라 세 갈래길에 목이 잡힌 채 열차는 달려가고, 죄 많은 인생을 떨쳐 버리려는 듯 노래는 칙칙폭폭 폭스 트로트의 리듬을 탄다. 추가열이 부르는 <눈물의 대전역>은 스탠다드 고고 리듬에 얹혀 쓰라린 이별마저도 그의 결고운 목소리에 실려 감미롭게 느껴질 지경이다. 한 시간 남짓이면 닿을 서울로 떠나간 이 시대의 여인은 선뜻 와 닿는 설정이 아니지만 2020년의 이별이야 어디 시공을 따질 문제겠는가. 저작권도 칼같이 설정되어있는 추가열의 노래에 비해 남성봉의 노래는 관리조차 안 되어 잊힌 옛노래가 되어버렸다.

또 한 곡, 아나운서 1호 가수 이정민(본명 이규환)이 노래 부르는 <대전역 광장>이 있다. 국기에 대한 맹세로 유명한 그는 KBS 이규항과 함께 아나운서로는 드물게 가수 데뷔를 했다. 타고난 끼와 아름다운 미성은 바지 주머니에 든 송곳처럼 숨길 수 없었다. 더구나 당대의 유명 작사작곡가인 <키다리 미스터 김>의 황우루와 <사랑은 눈물의 씨앗> <울려고 내가 왔나>를 작곡한 김영광이 포항고 동기동창이었으니 적당히 자극도 받았을 것이다.


기약 없이 떠나간 그 님이건만 행여나 오실까 나가봅니다

낯선 사람 물결치는 넓은 광장에 그리운 그 얼굴만 왜 안 보이나
그리운 그 얼굴만 왜 안 보이나

기차는 슬피 울고 떠나가는데 안 오시나 못 오시나 그리운 그님
오늘도 기다리는 하루가 지면 쓸쓸히 걸어가는 대전역 광장
쓸쓸히 돌아가는 대전역 광장
<대전역 광장> 지웅 작사, 최녹영 작곡, 이정민 노래, 1968, 오아시스 레코드


이정민의 <대전역 광장>이나 <춘천호의 밤>이나 주인공은 혼자다. 하기야 둘이 있을 때 그리움이 끼어들 틈이 없겠지만 주인공은 언제나 기다림의 연속이고 애련의 목마름에 애달파 한다. 배부른 흥정이라 못마땅히 여길지도 모르지만, 고속열차 시대에 이 땅의 기차역은 더는 기다림의 정거장 구실을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편지가 몇 날 며칠 걸리고, ‘급상경, 부친 위독’ 따위의 진짜 급한 일이나 전보로 대신하던 시절의 기억은 추억으로 불러내는 수밖에 없다. 레트로의 자연풍에 실린 한 시대 트로트의 재조명은 옛노래의 부활로 의미 있게 다가오고 있다. 

 

ㅣ마리안 앤더슨을 닮고 싶었던 안다성, 목척교에 기댄 「못 잊을 대전의 밤」

대전 중앙로를 축으로 삼아 자전거를 끌고 뒷골목을 걷는다. 대전역에서 옛 충남도청까지는 1km 남짓한 짧은 거리지만 대전 토박이들에겐 추억의 거리다. 어수선한 역전 풍경은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퇴락한 뒷골목마저 닮아있다. 아카데미극장 언저리에서 살그머니 다가와 “쉬었다 가지 않겠냐. 아가씨는 따로 있다”고 꼬드기는   할매는 그 바닥을 떠나지 못한 채 늙은 거리의 여자임이 분명하다. 대전을 찾은 사람들이 주먹만 한 깍두기를 잊지 못하는 한밭설렁탕도 옛 맛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중앙시장과 마주하고 있는 역전시장은 옛 홍등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대전역을 경유하는 편리한 버스 노선으로 금산, 옥천 손님까지 북적거린다. 

목척교는 대전 사람들에겐 미라보 다리만큼이나 소중한 이정표다. 대전천을 가로질러 놓인 목척교는 빛바랜 왜정시대 사진 속 이미지를 벗어버린 지 오래다. 2010년 새 단장을 하고 은빛 경관을 선사하며 곡선미를 살린 조형물로 사랑받는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목척교 좌측은 홍명상가가, 우측에는 중앙데파트가 밀도 높은 공간이었다. 홍명상가 깊숙이 홍명카바레의 희미한 불빛이 돌아가고, ‘중앙 6층’이라 부르몀 다 아는 가장 비싼(?) 나이트클럽의 싸이키 조명은 청춘의 박자에 맞춰 요동쳤다. 비싼 커피 값을 치르고 이내 잠에 빠져들어도 왠지 멋있었던 음악감상실 ‘반줄’의 이름도 불려 나오고, 목척교 아래 겨울이면 얼어버린 빙판 위를 칼 스케이트를 타던, 좀 사는 집 티가 나던 소년, 소녀들도 이미 무릎 연골을 걱정하며 추억에 잠겨 있으리라.

1960년대를 풍미한 가수 안다성은 목척교 가로등에 기댄 채 노래를 부른다. 그의 결 고운 미성은 때론 박력이 없다는 평가도 없지 않지만, 샹송에도 관심이 컸던 그는 남인수류의 야무진 세성(細聲)과는 다른 트렌드였다. 신흥대(현 경희대) 영문과를 다니다 6·25 전쟁 중에 군예대를 거친 안다성은 친구 생일파티 차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 근처에 있던 카바레 ‘여정’에 간다. 손님 자격으로 마이크를 잡고 부른 현인의 <서울야곡> 탱고에 당시 중앙방송 경음악단장이던 손석우가 놀라 이례적으로 3절까지 반주해 주고, 명함을 건넨 것이 안다성을 가요계로 이끌었다. 박춘석의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 칠 때> 같은 노래에는 미풍이 불고, 파도가 철썩거리는 낭만이 있다. 이름마저 세계적인 성악가 마리안 앤더스(Marian Anderson)을 닮고 싶어안다성이라고 지었다고 말한다.

가로등 흐미한 목척교에 기대서서
나 홀로 외로이 이슬비를 맞으면서
그 옛날 그 님을 안타까이 불러보는
첫사랑 못 잊는 대전의 밤이여

오늘도 가랑비 소리 없이 나리는데
쓸쓸한 이 마음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바람만 불어도 흔들리는 이 가슴은
옛사랑 못 잊는 대전의 밤이여
<못 잊을 대전의 밤> 이삼향 작사, 김현 작곡, 안다성 노래, 1962, 대도 레코드

첫사랑을 못 잊는 수많은 가요, ‘그 노래가 그 노래’라고 얕보지 마라. 그만큼 저마다에겐 가슴에 깊이 새겨진 강렬한 음각이라 무어로도 메울 수 없는 인생의 양념이다. 중앙역과 대전중부경찰서 사이의 ‘으능정이거리’는 중고등학생을 비롯해 피 끓는 청춘들이 몰려드는 거리다. 스카이로드로 불리는 거리의 밤 풍경은 거리를 덧씌운 캐노피 천장에 현란한 조명으로 메시지를 전한다. 대전역 가락국수 시대를 모르는 청춘들 앞에 코로나를 뚫고 ‘제1회 대전부르스 축제’가 열린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어 반가울 따름이다.

ㅣ‘대전 총각’들이 살던 관사촌과 시대물 영화 단골 촬영장이 된 옛 충남도청

충남도청, 충남경찰청 자리로 가본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전· 충남 품속에서 살았던 추억공간이다. 오래된 향나무는 충남도청과 경찰청이 홍성으로 옮겨가면서 함께 이사를 한 모양이다. 1930년대 모더니즘 양식으로 지어, 누른 외장 타일로 멋을 낸 충남도청 본관은 대전 근현대사 전시관으로 바뀌었고, 아직도 용도가 결정된 바 없는 경찰청 건물은 퇴락한 채 철거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노무현의 영화로 알려진 <변호인>의 촬영지 이후, 일제나 광복 후 시대의 관청, 관료의 강고한 이미지를 표현하기에 더 없는 시대물 공간이다. 이른 아침부터 영화 촬영 준비가 한창이다. 조명차와 발전차 엔진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는 뒤쪽에서 4성 장군 복장을 한 배우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대사 외우기에 한창이다. 스태프에게 물어보니 아직 개봉 일정도 정해지지 않은 <행복한 나라>라는 영화다. 아마도 5·18을 전후한 신군부의 역할을 표현하고 있는듯하다.

예전에 살던 관사촌으로 발길을 옮긴다. 일제 때 지은 충청남도 도지사 관사를 중심으로 10여 호의 관사가 대전 근대 문화예술의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해 있다. 이름도 그 동네 지명을 따서 ‘테미 오래’라 붙였다. 각종 전시와 시민 갤러리, 창작 공방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관사별로 이루어지는 신 명소가 되었다. 고만고만한 나머지 관사는 중앙에서 발령받아 오는 각 기관장이나 도청 실·국장들의 숙소로 이용되었던 유산이다. 대전으로 발령받아 오는 기관장들은 당연히 ‘단신 부임’이다. 대흥동 ‘부자 곰탕집’ 단골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둔산 쪽으로 도시의 몸피가 불어나면서 뿔뿔이 흩어졌어도, 업무상 매달 모임을 하고 기관 사이 서로 관심사를 만찬상에 올린다. 도지사, 법원장, 검사장을 비롯해 경찰, 국정원, 기무사까지 이름만 안 붙였지 훨씬 더 솔직하고 효율적인 ‘관계기관 연석회의’가 된다. 혼자 머무는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그들은 스스로 ‘대전 총각’이라 부르면서 서로의 객창감을 공감했다. 서울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건조하고 느슨한 연대가 아니라 대전을 떠나서도 모임은 이어진다. 다른 지방 도청 소재지도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멀수록 관계는 끈끈했다. 그 후 더러는 영전하여 기관의 최고 수장이 되고, 더러는 그 선에서 공직을 마무리하지만, 인생의 가장 빛나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시대를 공유했다는 기억으로 평생 우정을 나누게 된다.

ㅣ서대전역이 떠나보내는 장윤정의 「목포행 완행열차」

서대전역으로 발길을 돌린다. <대전 블루스> 이후 대전역이 목포행 완행열차를 떠나보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오정역에서 서대전으로 갈라지는 분기는 대전의 서부 개척(?)과 맞물려진다. 결코 떨쳐 버릴 수 없는 군대의 기억이 여기서 또 되살아난다. ‘대전서 유성 간에’ 자리 잡고 있던 항공병학교의 추억이다. 두어 세대 전 대전에서 유성으로 가는 길은 포플러 가로수 늘어선 시골길이었다. ‘자전거생활’에 실렸던 글을 그대로 옮겨 온다.

다시 기억의 필름을 1973년 겨울로 되돌린다. 지금은 둔산의 한 가운데가 되어 버린 대전의 외곽에 공군 항공병학교가 있었다. 장교든 병사든 이 학교를 거쳐 갔다. 뒤늦게 군대에 온 나훈아 형은 반년 전에 작대기 하나를 달고 지나갔다고 했다. ‘대전서 유성 간에 젊은 청춘이…’로 시작하는 군가는 유예된 청춘 3년에 던지는 절규였다. 굳이 훈련소라 해도 될 데를 ‘항공병학교’라고 부른다는 것은 서툰 이등병의 넥타이만큼이나 철없던 내겐 유혹이었다. 3년 동안 비행기 한번 못 타보고 활주로에 떨어진 돌을 줍는 일만 한다는 걸 알았더라면 결단코 택하지 않았을 해동청 보라매의 겉멋에 속았다. 

구릉에 자리한 1월의 내무반은 차디찼다.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은 단 한 가지는 윗도리만 군복을 갖춰 입고, 아랫도리를 벗은 내복 차림으로 서야 하는 불침번이었다. 거기다 총까지 들고 졸음을 쫓아야 하는 훈련병의 바짝 쫄은 자세라니, 그 몰골은 아마도 탈영을 방지하기 위한 원시적 ‘나무꾼’의 인질 수법이 아니었을까. 그 새벽, 나목으로 선 과수원 몇 겹 언덕 저 멀리 서대전역 언저리를 지나는 호남선 열차의 기적이 여기가 타관 땅 병영임을 일깨워 주었다. 


대전 전체로 보면 이제 서대전은 대전의 가운데쯤이 되어버렸다. 대학생들이 모이는 둔산 갤러리아 백화점 근처의 북적거림은 그저 상전벽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표현이 부족하리라. 트로트 르네상스의 견인차인 장윤정의 노래 <목포행 완행열차>는 대중가요가 귀한 대전의 노래로 편입시켜도 무리가 없겠다.


목포행 완행열차 마지막 기차 떠나가고
늦은 밤 홀로 외로이 한잔 술에 몸을 기댄다
우리의 사랑은 이제 여기까지가 끝인가요
우리의 짧은 인연도 여기까지가 끝인가요
잘 가요 인사는 못해요 아직 미련이 남아서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는 그날 그냥 편히 웃을 수 있게
우리의 사랑은 이제 여기까지가 끝인가요
우리의 짧은 인연도 여기까지가 끝인가요
잘 가요 인사는 못해요 아직 미련이 남아서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는 그날 그냥 편히 웃을 수 있게
그냥 편히 안을 수 있게 
<목포행 완행열차> 신유진 작사, 임강현 작곡, 장윤정 노래, 2019

 이 곡은 1, 2절 구분이 없다. 슬로우락 리듬에 취한 듯 읊조리면서도 이별의 인사, 할 말은 다 한다. 젊은 작사자의 감성이 장윤정 특유의 고음에 실려 가슴을 저미게 한다. <꽃> <초혼>에서 이미 입증된 감성의 작곡가 임강현을 다시 보게 된다. 미스트롯의 신예들에게 곡을 안기는 재능은 어느 날 뚝 떨어진 역량이 아니다. 미련은 내 안의 영역에 그를 새겨두면서, 그를 울타리 밖으로 보낸다. 따뜻하나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마지막 전송이 호남선 완행열차로 마무리되어 애잔하다. 미스터 트롯으로 선보인 신예 한이재의 혼성 듀얼 버전의 보이스에 한 몸 남녀의 ‘아수라 창법’으로 관객을 열광케 한 바로 그 노래다. 나도 한이재의 듀얼 버전 속편을 기대하는 광팬임을 고백한다.

 

ㅣ시와 대중가요의 콜라보, 정지용 시인의 「향수」의 무대 옥천 구읍

옥천으로 가는 길이다. 세천·증약의 긴 터널을 지나는 경부선, 대전 시내를 벗어난 고속철도도 판암에서 갈 길을 달리한다. 자전거로도 그리 높지 않은 고개 마달령을 넘는다. 충청북도와 대전광역시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옥천은 충청북도이지만 생활권은 대전권이다. 금산이 충남이면서도 대전권인 것과 같이 이웃하여 그렇다. 

신읍과 구읍의 구별은 결국은 신작로와 철길이 기준이다. 옥천 또한 그렇다. 다른 것은 젖혀두고, 크게 정지용 시인 생가의 문향과 육영수 여사 생가의 현대사적 의미가 주축이다. 대전이 조용필의 <대전 블루스>로 기억되듯 옥천은 정지용의 <향수>로 더욱 살갑다. 역시 사람들의 기억은 문학과 예술의 언저리에서 시 한 편, 노래 한 곡으로 깊이 박힌다. 한약방 집 아들 시인 정지용의 문재(文才)는 이미 휘문고보 시절 두드러진 문학 활동에서 더욱 커 간다. 해방과 6·25의 전후사에서 그의 행방은 월북인지 납북인지에 대한 무성한 설로 휩싸인 채 친북 성향의 인사로 분류되며, 엄혹한 시대에 갇혀 뛰어난 시인의 향토색 넘치는 명시마저 금기가 된다. 문화 예술의 해금으로 정O용으로 불리던 그의 작품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이미 사어가 되어버린 모국어의 시간은 캐어낼수록 빛나는 보석으로 문학 대중의 가슴을 흔들었다. 가요 대중의 노래가 된 <향수>는 가수 이동원과 성악가 박인수의 절묘한 콜라보로 더욱 명곡의 자리에 올랐다. 서로 닭 쳐다보듯 하던 대중음악과 클래식의 이례적 결합이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 정지용 시, 김희갑 작곡, 이동원·박인수 노래, 1989, 아세아 레코드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면 모두가 잃어버린 고향의 풍경이 저마다의 색깔로 일어선다. 단어 하나에 그리움이 묻어나고 줄 바꿈의 행간에 토담집 사립문의 서정이 물든다. 일렁이는 어유 등잔불에 창호지 속 그림자는 옛이야기에 빠져들어 어느새 무명 이불 속으로 몸을 누이는 가을밤이 거기에 있다. 

1989년 5월 <향수>가 발매되자, 정작 박인수는 성악가가 대중가요와 어울렸다고 국립오페라단에서 퇴출당하고, 그해 12월까지만 해도 70만 장이 팔린다. 170만 장의 초대박이었다니 인세를 1,000원씩만 어림잡아도 17억을 번 셈인데, 정작 박인수 교수에게 돌아온 건 없었다고 전한다. 본인이 “난 한 푼 받은 게 없다”고 말했다니 사실 여부를 떠나서도 참 많이도 섭섭했던 게다. 누구는 두 사람의 콜라보 후속작이 나올 법도 했는데도, 처음이자 마지막인 된 원인이 그 섭섭함 때문일 거라고도 했다. 하기야 “사람이 거짓말을 했겠는가. 돈이 거짓말을 한 거지”라는 옛말로 마무리하고 싶다. 

정지용문학관에서 훑어내리듯 본 시인의 삶과 시작(詩作)을 좁은 지면에 건성건성 펼치는 것은 국민의 사랑을 널리 받는 옛 시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정지용 생가를 나선다. 감나무에 감이 익어가는 풍경, 실개천에 드리운 초롱에는 정지용의 시어 하나하나가 생명력을 가지고 흔들거린다. 다시 어느 가을밤에 불 밝힌 실개천을 찾아 와 지용시를 읊조려 보리라. 

조용연 편집위원 기자 / 출처 자전거 생활

https://youtu.be/HKsqZmoHcd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