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하급반 교과서' 김명수 (2021.12.28)

푸레택 2021. 12. 28. 11:14

■ 하급반 교과서 / 김명수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 읽기여
우리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 시집 『하급반 교과서』 (창작과비평사, 1983)

[감상]

이 시를 읽은 어떤 어른 독자는 씩씩하게 글을 읽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며, 우리민족의 기상과 밝은 미래를 보는듯하다고 했습니다. 시를 대충 읽으면 그리 이해할 수 있겠고 ‘이 봄날 쓸쓸한’이란 꼬투리가 없다면 나름의 시 해석이라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쓸쓸한’이란 단서가 재고를 권유하며 거듭 읽고 신중하게 독해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사실 이 시는 군부독재시절 자유가 억압되고 일사불란한 획일주의가 강요되었던 당시의 현실을 꼬집고 풍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한 아이’는 지도자를, ‘아이들’은 민중을 의미하는 것일 텐데요. 지도자의 선창에 이은 우렁찬 복창은 아무 비판 없이 따르는 민중의 맹목적인 추종을 나타냅니다. 그 지배이데올로기는 스탈린 치하 소련의 상황을 비유한 정치우화소설 ‘동물농장’까지는 좀 먼 듯해도,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연상케 합니다.

‘참새!’하면 ‘짹짹!’, ‘오리!’하면 ‘꽥꽥!’이 자동으로 튀어나와야 하고 ‘쿵!’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인줄 즉각 알아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초등 저학년에선 이런 식으로 따라 읽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와 같은 '교과서'적 교육방식이 모범이 될 리는 없고 썩 훌륭해 뵈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읽지 않고 다른 사람이 읽는 대로 똑같이 따라 읽고 암기하는 방식은 통제사회에서나 유용한 낮은 단계의 낡은 교육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스리기 쉽고, 민중의 입장에서도 주체적으로 고뇌할 이유가 없어 편하긴 하지요. 큼지막하게 제시된 '활자'처럼 목표도 단순하고 선명합니다. 그저 따라오기만 하면 되고 가르치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창의와 다양성이 결핍된 ‘일사분란’한 그때가 더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적지 않습니다. 다양성을 군더더기로 보고 잘라내야 사회통합이 이뤄진다고 착각하는 이들조차 있습니다.

군데군데에서는 시대착오적인 생각과 오판으로 사람들을 얕잡아보고 알아서 기어주기를 바라는 조직과 세력이 눈에 뜁니다. 민주와 독자적 사고가 용인되지 않는 사회와 교육을 꼬집었던 30여 년 전 시를 다시 대하면서 지금은 격세지감을 느낍니다만 변함없이 하급반 수준의 선창과 복창소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이들을 생각하면 이 봄날이 다시 또 씁쓸해지고 맙니다. (글=권순진 시인)

/ 2021.12.28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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