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산 / 이면우
머리 하얗게 세고 다리 힘 빠진 아버지, 누구랑 다투다 수틀리면 까불지마 이래봬도 내가 이종권이여 하셨다 물론 당신의 함자다 나는 뒤에서 꽉 붙잡다 말고 쿡쿡 웃었다 언젠가 누구랑 다투다 엉겹결에 까불지마 이래봬도 내가…… 이래봬도 내가…… 두어번 다음이 뭐드라? 더듬다가 앗참! 그렇지 이종권이 아들이여 했다 아이쿠 그만 쪼르르 따라 나와 버렸다 이번에는 뒤에서 꽉 붙잡던 아내가 입 가리고 웃는다 아아 정말 그렇다 대를 건너는 토란잎만한 달팽이 논 물꼬 싸움이란 것도 그렇고 나는 아버지만큼 모질고 여리고 총명하고 능청맞고 잘 생기고 호탕하고 쫀쫀하고 여자들에게 인기 있고 술 잘 마시고 오래 살며 자식을 여섯이나 당당하게 길러냈으면 하였으나 아무 것 하나 못 넘어섰다.
- 계간 『애지』2003년 겨울호
[감상]
두 달전 이사할 때 새 앨범을 마련하면 정리할 요량으로 비닐에 싸서 어머니 방 서랍에 넣어둔 옛날 사진 뭉치가 있다. 뭉치 맨 밑장에 놓인 것이 67년 전 1949년 봄 덕수궁에서의 두분 결혼식 기념사진이다. 사진 속 서른 둘 당시로서는 노총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세상 떠나신지 27년 만에 수습된 '찌라시'같은 기억들. 몇 소절의 억양 더 센 함경도 사투리, 저린 다리 마지못해 주물 때 코 비틀며 흡입해야했던 발 고린내. 너무나 거침없고 호방하게 사셨지만 난 당신에게 언제나 ‘머저리’였고, 내게 당신은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었으며 수직의 가파른 절벽이었다.
중학교 때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이력을 곁눈질하면서 내게도 ‘아버지가 차라리 없었으면’하고 이른 결별을 기도한 적도 있었다. 한때는 아마추어사진작가랍시고 유랑과 필름으로 내다버린 돈의 추정액 만으로 당신을 비위공무원이라 의심하기도 했다. 평생 폼나는 아호 하나 얻지 못했으나 대구에선 알아주는 ‘고바우’의 막무가내 똥배짱이 걸핏하면 동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고 나를 쪽 팔리게 했다.
언젠가 공평동 시절 머리가 하얗게 센 국회의장나리께서 오랜 단골집이라며 동네골목 어귀에 있는 식당에 출현했을 때, 술 취해 자전거를 끌고 귀가하던 당신은 길을 꽉 매운 차량에다 발길질을 해대며 “국회의장이면 다야, 나오라 그래, 까불고 있어 나 권혁무야 이거 왜 이래, 어디 남의 동네 골목을 지멋대로 막고 지랄이야” 고래고래 고함지를 때 동네사람들이 다 모여들어 ‘쯧쯧’ 뒷일을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 권혁무의 아들임에도 나는 당신의 눈치나 슬슬 살피며 사내답지 못한 사내로 커갔다. 한번도 권혁무의 아들임을 자랑스레 내세워본 적이 없다. 나와는 달리 사랑을 독차지했던 누이가 뺑소니 도라꾸에 치어 죽은 뒤 아버지의 포악과 내 우울은 극에 달했다. “차홍국이 아들은 서울의대에 단번에 걸렸는데...머저리 같은 놈” 함경도식 억양으로 핀잔할 때 나는 빨갱이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저러할 거라며 적개심을 품었다. 세월 속 당신은 내게 길고도 긴 ‘트라우마’였으며, 당신의 화려한 ‘남자다움’의 이력이 평생 내겐 부담이었다. 아버지만큼 빡세고 낯 두껍고 능청맞고 호탕하고 못 하는 게 없고 여자들에게 인기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저 술 마시는 일에만 당신만큼 쫒아갔을까. 어쩌면 여자 두엇 울린 전과만큼은 당신의 피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내 나이 아홉 때 송도 바다에서 보여준 다이빙 실력은 자랑이 아니라 일찌감치 내 눈엔 만용이었다. 아버지란 존재는 누구한테나 넘지 못할 산 같은 존재라지만 내게 아버지는 참으로 별난 악산이었다. 두려움과 부러움의 틈새로 더러 존경의 념도 스며들었겠으나 여전히 가실 때까지 미운 당신이었다. 가신 뒤에야 가끔 실눈 뜨며 문득 연민하는 게 고작이다. 지금도 내 얼굴에서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한 채 ‘아무 것 하나 못 넘어 서고’ 이렇게 늙어가고 있다. 그리고 당신의 지어미가 지어비를 향해 가는 손짓을 애써 말리며 속수무책 허우적거리고 있다.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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