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 / 배창환
고등학교 다닐 때였지
노가다 도목수 아버지 따라
서문시장 3지구 부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할매술집에 갔지
담벼락에 광목을 치고 나무의자 몇개 놓은 선술집
바로 그곳이었지 노가다들이 떼서리로 와서 한잔 걸치고 가는 곳
대광주리 삶은 돼지다리에선 하얀 김이 설설 피어올랐고
나는 아버지가 시켜주신 비곗살 달콤한 돼지고기를 씹었지
벌건 국물에 고기 띄운 국밥이 아닌, 살코기로 수북이 한 접시를(!)
꺽꺽 목이 맥히지도 않고
아버지가 단번에 꿀떡꿀떡 넘기시던 막걸리처럼
맥히지도 않고, 이게 웬 떡이냐 잘도 씹었지
뱃속에서도 퍼뜩 넘기라고 목구녕으로 손가락이 넘어왔었지
식구들 다 데리고 올 수 없어서
공부하는 놈이라도 한번 실컷 먹인다고
누이 형제들 다 놔두고 나 혼자만 살짝 불러 먹이셨지
얼른얼른 식기 전에 많이 묵어라시며
나는 많이 묵었으니까 니나 묵어라시며
스물여섯에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남몰래 울음 삼켰지
돼지고기 한 접시 놓고 허겁지겁 먹어대던 그날
난생 처음 아버지와의 그 비밀잔치 때문에
왜 하필이면 그날 그 일이 떠올랐는지 몰라도
지금도 서문시장 지나기만 하면 그때 그 선술집에 가서
아버지와 돼지고기 한번 실컷 먹고 싶어 눈물이 나지
그래서 요즘도 돼지고기 한 접시 시켜놓고 울고 싶어지지
- 시선집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 (작은숲,2012)
[감상]
대구 사람은 서문시장을 ‘큰장’이라고도 말한다. 그만큼 대구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전통 재래시장이다. 3지구 부근 ‘할매술집’을 잘은 모르지만 나도 어렴풋이 그림이 그려지고 분위기는 감지된다. 모퉁이를 돌면 식욕을 돋우는 누린내와 함께 하얀 김이 설설 피워 오르는 돼지고기와 국밥을 말아 파는 선술집이 어느 재래시장인들 몇 군데 쯤 없겠는가.
김해의 패총 등에서 돼지이빨이 많이 나온 것을 근거한다면 우리나라에서 돼지고기를 먹어온 역사가 꽤나 깊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서민과 애환을 함께 하며 이웃과 더불어 나누어 먹었던 나눔의 음식이며 일상 속에 깊게 자리매김한 '국민고기'이다. 주린 배와 마음의 허기까지 든든하게 채워주는 대표적 민중음식인 삶은 돼지고기는 일상은 물론 즐거운 축제와 잔치, 슬픈 상사 등에까지 널리 애용된다.
일상에 지친 아버지의 답답한 가슴을 풀어주고 어깨를 펴게 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삶은 돼지고기 한 접지 올려놓고 둥글게 앉으면 모두가 넉넉해지고 여유로워진다. 각박한 삶에 잠시 긴장 풀고 ‘비곗살 달콤한 돼지고기’ 한 점 목구멍을 넘길 때면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다. 게다가 돼지고기는 다른 육류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동물성 에너지원이라는 보편적 인식이 있다.
시인의 아버지는 공부 잘 하는 아들만 다른 식구들 몰래 살짝 불러내 원기를 북돋아줄 요량으로 ‘비밀 잔치’를 벌였다. 그때부터 시인은 삶은 돼지고기만 보면 그 ‘잔치’가 떠오르고 세상에 없는 아버지가 생각나고 울고 싶어진다. 서문시장에서 아버지가 사주셨던 삶은 돼지고기 한 접시는 돼지껍데기 보다도 더 쫄깃한 부자지간의 정이고 사랑이었던 것이다.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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