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학과지성사, 1979)
[감상]
이 시는 4.19세대인 시인이 18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그때 친구들과의 세밑 모임에서 느낀 소회를 담고 있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고 지금의 소시민적인 삶과 비교하면서 자조하며 회한에 젖는다. 젊은 한 때 내 삶이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방향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내 꿈과 신념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던 패기는 온데간데없고, 이젠 다들 현실에 순응하고 타협하면서 안주하는 모습들을 스스로 보인다.
혁명을 품었던 열기는 '옛사랑'이 되어 싸늘하게 식어 있으며, 오히려 지금은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그 ‘그림자’만 부끄럽게 추억할 뿐이다. 세월의 유수에 젊음과 열정, 순수와 이성은 다 깎여버리고 맹목과 복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까지 비열하게 망가진 삶이 아니라 해도 반항과 저항의 거친 목소리는 '양철북'에서 오스칼이 두드리는 북소리처럼 소시민적인 절망으로 흩어지고 마는 건 아닌가.
에리히 프롬은 ‘회의하고, 비판하고, 불복종하는 능력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종말을 막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이 곧 개혁이고 진보인 것이다. 그러나 핏대만 쏘아올릴뿐 ‘모두가 살기위해 살고’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기려 한다.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을 고개 떨군 채 수상히 지나치며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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