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묘비명' 김광규 (2021.12.13)

푸레택 2021. 12. 13. 20:39

■ 묘비명 / 김광규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학과지성사, 1979)

[감상]

‘묘비명’은 이번 수능에서 국어의 문학 영역 지문으로 출제된 시다. 수능 국어 영역에는 문학영역과 철학 경제 과학 등의 지문 이해능력을 측정하는 비문학 독서영역으로 나뉜다. 수험생들은 문학보다는 이러한 비문학 독서영역을 더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다. 특히 환율의 오버슈팅(시장 가격의 일시적 폭등 또는 폭락)과 관련한 경제학과 정책적 설명을 융합한 지문 등이 수험생들을 당황케 했던 모양이다. 그에 비하면 ‘묘비명’은 예상문제 범위 안에 있고 모범답안이 나와 있던 터라 그야말로 교과 과정을 충실히 공부한 수험생이라면 시를 독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이 시는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를 지배하는 현실을 비판한 김광규 시인의 1979년 발표 작품이다. 시에서 ‘시’와 ‘소설’은 정신적 가치를 대변하고 ‘돈’과 ‘높은 자리’는 물질적 가치를 상징한다. 정신적인 가치와는 아예 담을 쌓은 채 오로지 물질적인 가치만을 추종하며 산 사람이 부를 축적해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그를 기리는 묘비명’에 ‘어느 유명한 문인이’ 돈을 받고 차출되어 ‘훌륭한 비석’을 남기게 되는 빌어먹을 사회이다. 얼른 전두환에게 칭송시를 바친 미당을 떠올리지만 당시 곡학아세한 문인이 더러 존재했음을 알고 있다.

시인은 진정한 삶의 가치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이 시를 통해 물질에 아부하는 사람과 세상의 행태를 풍자 고발하며 반어적 표현으로 이를 비판하였다. 아울러 시인 자신을 포함해 역사와 시인의 역할에 대해 반성의 질문을 던지는데 김광규 시인은 자조적이면서 비관적인 전망을 내비치고 있다. 그때로부터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건만 지금의 세상이 그때보다 얼마나 더 정신적 가치들이 대접받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제 오후부터 대구경북작가회의 창립 30주년을 맞아 팔공산 대구은행 연수원에서 전국작가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한국 문학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원로문인들로부터 ‘지혜’를 듣는 시간도 가졌다. 

인생, 뭐 있어? 그냥 즐기는 거지 혹은 그냥 살다가는 거지. 요즘 유행하는 이 삶의 전략 안에 녹아내리지 않을 번뇌는 별로 없어 보인다. 쉽게 생각하며 살다가 죽자는 사람에게 문학의 효용이 얼마나 가닿을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으리라. 탐욕을 쉬 버리지 못하고 집착을 여의지 못하는 자의 죽음 직전은 더 괴롭고 두려운 법이다. 쌓아둔 물질이 많을수록,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즐기지 못하고 버려야한다는 억울한 생각이 미칠수록 그 미련은 죽음을 더 두렵게 할 수 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이승의 모든 것은 잠시 빌려 쓰고 가는 것이라 생각하며 욕심을 버리고, 베풀고, 비우고, 양보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죽음의 두려움도 훨씬 경감되리라.

그렇다면 묘비명 따위는 무슨 소용이랴. 어쩌면 그것들은 정신적인 가치의 기본이며 문학의 모색에 있어서도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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