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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칼럼] 그리움이라는 능력 (2021.12.12)

푸레택 2021. 12. 12. 12:20
그리워함은 사랑하는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영혼의 에너지다. 시련과 도전에 시달려 좌절하고 의기소침해 있다가도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의 에너지가 작동하면 포기하지 않고 원기를 회복할 기력이 생긴다. 임종을 맞아 체력이 다하고 생의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병자도 그리운 혈육이 돌아와 이름을 부르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마지막 사랑의 시선을 보낸다.

 

[강우일 칼럼] 그리움이라는 능력 / 강우일 베드로 주교

코로나 때문에 지인들과의 만남이 격감했다. 코로나 확진이 비교적 적은 제주에 살다 보니 비행기 타고 섬 밖으로 나가는 일이 망설여진다. 은퇴 후에 전에는 일 때문에 만나던 사람들도 만날 일이 많이 줄었다. 일로 만나던 사람들은 굳이 그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 만났던 사람들을 오래 못 보니 얼굴들이 아른거리며 그리움이 솟아오른다.

나는 성격이 본래 활달하거나 적극적이지 못한데다 34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교회의 주교직에 몸담고 살다 보니 나 자신도 조심스럽고 상대방도 부담을 느껴,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 인간관계를 많이 만들지 못했다. 그래도 여러 가지 인연으로 몇십년 전부터 알고 지내며 정을 나누던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고 그립다. 얼굴도 보고 싶고, 아프진 않은지, 별일 없는지 물어보고 싶고 쌓인 이야기 나누고 밥도 같이 먹고 싶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제일 그리운 것은 미국에 이민 가신 아흔도 훌쩍 넘기신 어머니와 형제들이다. 바빠도 해마다 한번은 시간을 내서 가뵈었는데, 작년에는 코로나 때문에 꼼짝을 할 수 없어 출국을 못 한 지 2년이 다 되었다. 코로나가 어느 정도 진정되거나, 적어도 백신을 맞은 다음이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아 자제해왔다. 최근에는 내 마음속에서 ‘그리움’의 꽃망울이 자꾸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그런데 이 그리움의 에너지는 오히려 영혼 내면의 혈액순환을 촉진해주고 물리적 거리, 사회적 거리를 뛰어넘어 내 혼이 혈육에게 달려가게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 내 안에서 도대체 ‘그리움’이란 뭘까 하는 물음이 자꾸 떠오른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어린 시절 살던 고향이 그립다, 옛날 포장마차에서 먹은 멍게, 해삼이 그립다고도 한다. 그러나 물건이나 장소가 대상인 경우는 마음속에서 작동하는 그리움의 에너지가 그리 간절하지 않다. 그리움이 불쑥불쑥 솟구치는 대상은 아무래도 사람이다. 그것도 그냥 스쳐 지나간 사람이 아니라 오랜 세월 정분을 나눈 사람, 내게 은혜를 베푼 사람, 사랑한 사람을 향한 그리움의 에너지가 훨씬 강력하다. 우리말 그리워하다는 말을 한자에서 찾으면 연(戀)이라는 글자로 그리워할 연이다. 일본어에도 그리워하다는 말을 ‘고이시이’라고 하는데 ‘고이(戀)=사랑’이라는 명사에 ‘시이’라는 어미를 붙여서 형용사화한 것이다. 즉, 그립다는 말의 뿌리에는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에게 그리움의 능력이 있음은 대단한 긍정적인 에너지다. 그리워함은 사랑하는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영혼의 에너지다. 시련과 도전에 시달려 좌절하고 의기소침해 있다가도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의 에너지가 작동하면 포기하지 않고 원기를 회복할 기력이 생긴다. 임종을 맞아 체력이 다하고 생의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병자도 그리운 혈육이 돌아와 이름을 부르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마지막 사랑의 시선을 보낸다.

최근에 청소년들의 고충을 상담하는 한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움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사람에게 활기를 주고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는 내 이야기를 들은 수녀님은 자신에게 상담하러 오는 청소년들에겐 그리워할 대상이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요즘 자신에게 상담하러 오는 중고생들 중에는 아무리 용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주려고 해도 영혼이 철벽처럼 닫힌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이미 몇번씩 자살을 시도해본 아이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결손가정의 자녀로 살아오면서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아본 기억이 없고 그리워할 대상이 없는 아이들이라고 했다. 아직 몸과 마음 모두 연약하고 힘없는 아이들에게 학교나 사회 모두 치열한 경쟁과 싸움만을 강요하니,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한번도 제대로 맛보지 못한 이들은 자존감도 자신감도 상실하여 세상을 살아갈 의욕과 의지가 없고, 쉽게 자해하거나 삶을 포기해 버린다.

최근 일본에서는 고독담당 장관이 임명되었다고 한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고독과 고립현상의 배가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젊은이들이 급증한 데 대한 대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2020년 코로나로 인해 문을 닫거나 직원을 해고하는 중소, 영세업체가 급증하자 임시직, 일용직, 비정규직 종사자들이 제일 먼저 타격을 입었다.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가 먼저 부서져 나가면서 청년 여성들의 자살 시도가 급증하였다. 상담기관에 걸려온 상담건수가 폭증하고, 상담내용도 과거에는 청년들이 문제해결을 위한 정보를 얻으려 하거나, 그냥 답답한 마음 상태를 털어놓는 정도였는데, 코로나 이후에는 “죽고 싶다” “삶의 의지가 없다” 등의 극단적인 표현이 굉장히 늘어났다고 한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 중에는 자라면서 그리움의 대상을 별로 만나지 못한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아파트 같은 콘크리트 공동주택에서 자라다 보니 눈을 감으면 아련히 떠오르는 그리운 마을 뒷동산이나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던 동네 공터가 없다. 학창시절은 어려서부터 대학입시라는 골라인을 향해 옆에 선 주자를 제치고 한걸음이라도 앞서야 하는 경쟁의 나날이니, 그리운 친구도 별로 없다. 아버지는 일찍 나가서 늦게 귀가하니 얼굴을 제대로 보거나 말을 섞은 기억도 별로 없고, 어머니도 맞벌이하면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가 이혼하면 가정은 황량한 벌판과 같아 그리움의 샘이 바닥부터 말라버렸다. 그리움의 결핍은 아이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결격이요 공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그리움이란 영혼의 능력과 에너지가 있다. 나는 해마다 모국을 방문하는 해외입양인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얼굴 생김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말도 다른 이들에게 입양된 이들이다. 이들은 성인이 된 후에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고 모국을 방문한다. 이들은 우리말을 모르고 통역을 통해서만 의사소통이 된다. 그래도 이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고 자신을 낳은 부모와 친지가 그리워 찾고 만나고 싶어 한다. 처음엔 부모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젊은이들도 있다. 그러나 정작 친부모를 만나게 되면 영혼의 밑바닥에 꼭꼭 숨겨두었던 그리움이 폭포처럼 쏟아져 눈물바다를 이룬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그리움의 원천이 있다. 현대의 물질문명은 사람들의 이러한 그리움의 능력을 잠재우고 그 에너지를 질식시켜왔다. 오늘의 젊은 세대가 그리움의 에너지를 회복하도록 돕고 싶지만 어떻게 도와야 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들 안에 그런 그리움의 능력을 심어주신 분이 계시니 그분께서 그들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이다. 


[원문보기] 한겨레 202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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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칼럼] 그리움이라는 능력

그리워함은 사랑하는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영혼의 에너지다. 시련과 도전에 시달려 좌절하고 의기소침해 있다가도 사랑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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