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모르는 연암과 다산 이야기] ㊵ 다산 정약용이 갖고 싶어 한 ‘토르’의 벼락 망치 / 문화평론가 박승규
그때 그 시절 학교 전체가 송충이 잡는 날이 있었다. 그날은 반드시 깡통 하나씩을 준비해야 했다. 즉석 나무젓가락을 만들어 송충이 포획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짓궂은 남자애들은 송충이로 여자애들을 괴롭혔다. 아예 징그러워 도망치는 애들도 있었다. 지금은 살충제를 실은 헬리콥터가 산허리를 훌쩍 넘어갔다 오면 ‘방제 끝’이지만, 그땐 송충이가 왜 그리 많았을까? 소나무는 한자로 송(松). 중국 진시황이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소나무 덕에 피할 수 있게 되자, 고맙다는 뜻으로 공작 벼슬을 내렸다. 그때부터 소나무를 ‘목공(木公)’이라 부른 데서 ‘松’자가 유래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솔나방 유충 송충(松蟲)이는 정말 솔잎을 먹고 산다.
1403년(태종3) 4월 21일, 개성 송악산에서 대대적인 송충이 잡기 행사가 벌어졌다. 이날 참가한 인원은 무려 1만명. 군사들과 대신의 노비까지 총동원됐다. 태종은 신하들에게 묻는다. “송충이는 어느 시대부터 있었는가?” “고려 원종(재위; 1259~1274) 때 300명의 사람을 시켜 잡아서 강물에 던졌습니다.” 태종은 송충이 박멸을 지시한다. “송충이의 재앙은 인력으로 이길 수 있는데, 경들은 어째서 소홀하게 생각하는가?” 수일 뒤 태종은 다시 확인한다. “송충이 잡는 일이 어찌 되었는가?” “예, 거의 다 잡고, 송악산의 몇 골짜기만 남았습니다.” 태종은 다시 말한다. “벌레를 잡는 것까지 내가 명해야 하겠는가?” 이해 유난히 송충이가 극성을 부렸던 모양이다. 실록에는 ‘개성 제릉(齊陵; 태조의 이성계의 왕비 신의왕후 한씨) 송충이 크기가 팔뚝 같고, 길이가 한 자나 되었다’고 적었다.
송충이 잡기 행사는 고려 시대에도 여러 번 있었다. 고려 때는 송충이를 잡을 뿐만 아니라, 벌레가 창궐하면 전란이 있을 징조로 여겨 액막이까지 했다. 1101년과 1102년(숙종7) 연이어 병충해가 극심했다. 왕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잘못을 뉘우치는 제사를 지내고, 군사 500명을 동원해 송악산의 송충이를 잡았다. 1122년(예종17)에도 궁궐 회경전에서 법회를 열어 7일간 기도를 했다. 고려 말 공양왕 때는 내리 3년 송충이가 들끓었다. 공양왕은 온 개경 사람을 동원해 송충이를 잡는 한편 구산사에 야단법석을 차려 부처님의 가피로 송충이 피해를 막으려 했다. 송악산의 소나무가 송충이로 말미암아 헐벗게 되자, 고려의 명이 다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ㅡ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소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나무.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전체 산림 면적의 27%를 차지한다. 혹한에도 변치 않는 푸름과 옹골진 자태는 강인한 기백과 지조의 상징으로 즐겨 회자됐다. ‘사군자’(매화•난초•국화•대나무)에는 못 들어도, 추운 계절의 세 벗인 ‘세한삼우’(소나무•매화•대나무)로 사랑받았다. 영생을 염원하던 우리 조상들은 해, 달, 바다, 거북, 학 등과 더불어 소나무를 십장생(十長生) 중의 하나로 여겼다. 조선왕조에 들어서서 소나무는 국가 상징이자 백성의 생명수가 됐다.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경전에는 ‘일월오봉도’가 걸려있다. 해와 달과 곤륜산을 주제로 그린 그림이다. 국사에 임하는 임금의 용상 뒤편에 자리 잡았다. 해와 달은 왕과 왕비, 천하제일의 성산(聖山)이라는 곤륜산은 왕실의 존엄을 상징한다. 전북의 마이산이 유명한 것도 이와 닮았기 때문. 천계(해와 달), 지계(산과 바다), 생물계(소나무)에 존재하는 모든 신의 보호를 받아 왕실과 나라가 번창하라는 바람을 나타냈다. 일월오봉도 속의 소나무는 조선왕조의 무궁한 번영을 상징하는 기원임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왕릉과 궁궐 주변에는 늘 좋은 기운이 에워싸도록 소나무를 심었다. 풍수 사상과 음양오행설을 반영해 왕조의 번영을 꾀한 것이다.
그런데 왜 조선왕조는 소나무를 왕실 상징으로 선정했을까? 조선왕조는 법치보다는 덕치를 우선하는 왕도정치를 지향했다. 왕도정치는 그 뿌리를 유학(성리학)에 둔다. 소나무는 명분과 의리, 충절과 기상을 상징한다. 소나무의 그런 상징성을 유학과 더불어 시대정신으로 삼고자 했다. 소나무는 백성의 생명수이기도 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삼칠일(3×7=21) 동안 솔가지를 끼워 금줄을 쳤다. 솔가지를 땔감으로 썼고, 소나무로 만든 집에서 성장했다. 또 송편과 송화 다식과 송순주를 먹고 마시며 살았고, 죽어서는 소나무로 만든 관에 들어가 뒷산 솔밭에 묻혔다. 조선의 아름다움을 뽐낸 백자를 굽거나, 소금을 생산하는데도 소나무가 필요했다. 소나무는 궁궐 신축과 사찰 등의 각종 건축 자재 등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흉년에는 구황식품으로 솔잎과 껍질을 먹었다. 한국인에게 그 어떤 나무보다 친근한 나무임이 틀림없다.
ㅡ 조선, 소나무 보호령을 발동하다
강원도 화천 평화의 댐 근처 비수구미 마을은 청정 환경을 자랑한다. 마을 이름은 뒷산 바위에 새겨진 ‘비소고미금산동표(非所古未禁山東漂)’에서 유래했다. 무단으로 벌목할 우려가 있는 소나무 군락지에 입산을 금한다는 표시다. 예로부터 이 마을은 자연환경 오염이 적고 사람의 접근이 쉽지 않은 오지였다. 그런데 이 깊은 산속까지 금표를 해놓은 이유가 뭘까? 소나무는 나무 중에서 가장 쓰임새가 많다. 군선을 만들고 건물을 짓는 용도 이외에도 송진 등의 부산물을 다양하게 사용했다. 조선 건국 후 인구가 증가하면서 자연스레 소나무 소비도 늘었다. 공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조선말 대원군 때 중건한 경복궁 근정전의 수종 분석 연구 자료를 보면, 약 20% 정도 전나무가 사용됐다. 일반 사찰에는 참나무와 느티나무도 사용됐다. 그 무렵 소나무 수급 상황이 좋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한양 낙산·인왕산·남산·북악산에서는 소나무 벌목을 금했다.
송금(松禁)이란 국가가 필요로 하는 목재를 확보하기 위해 소나무의 생장에 적당한 곳을 선정해 보호한 정책. 일찍이 고려 때부터 시행됐다. <고려사>에 의하면 1013년(현종4) “성내(城內)의 소나무 남벌을 금하고, 공용에 쓸 것 외에는 벌목을 일절 금지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충남 안면도는 지리적 여건과 적송의 재질이 우수해 고려 때부터 국가에서 특별 관리했다. 그리고 울진의 소광리 금강송 군락지에서 볼 수 있듯 누런빛이 나는 왕실용 황장목은 따로 관리했다. 궁궐 건축에 소나무를 쓴 이유는 소나무가 나뭇결이 곱고, 강도가 높고, 게다가 잘 뒤틀리지 않는 까닭이었다. 또 쉽게 벌레가 먹지 않으며, 송진이 있어 습기에도 잘 견뎠다. 특히 금강송은 일반 소나무에 비해 곧게 자라고, 재질까지 단단해 궁궐 건축 재료로 귀하게 대접받았다. 고려 말부터 한반도를 괴롭힌 왜구들은 소나무까지 노렸다
ㅡ 소나무 소비의 최고 우선은 군선 건조
1407년(태종7) 4월 7일, 각도의 수령들에게 소나무를 심을 것과 함부로 소나무 벌채를 금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군선 건조를 위해 쓸 만한 소나무가 나라에 거의 바닥났다는 보고가 올라온 직후 취해진 조치다. 조선 시대 소나무 사용의 제1순위는 군선 건조. 그 어느 왕조보다 강력한 송림 보호 정책을 펼쳤다. 4월 5일 식목일은 성종이 문무백관들과 밭을 갈았던 것을 기념하는 음력 3월 10일에서 가져왔다. 1469년(예종1)에는 함부로 소나무를 벤 자에 대한 처벌 규정까지 만들어 입산금지 지역에서의 벌목을 엄하게 다스렸다. 백성이 소나무 한 그루를 베면 곤장 100대를 때렸고, 열 그루를 베면 가족을 변방으로 보냈다. 산지기를 두어 벌채를 막고, 수령이 수시로 감독하게 했다.
중종 연간 삼포왜란 등에서 큰 공을 세운 황형(1459~1520) 장군은 소나무 식목 일화로 유명하다. ‘소나무 양병론’의 원조인 셈이다. 그는 강화도로 낙향해 연미정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항상 나무 심기를 좋아했다. 하루는 백발의 노장군이 소나무를 심고 있으려니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다. “대감께서는 이미 노쇠하셨는데, 그리 힘들게 나무는 심어 뭣에 쓰시렵니까.” 노장군은 “내가 죽은 뒤에 두고 보게”라고 답했다. 황형 장군이 서거한 지 72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한양을 되찾기 위해 강화에 들어온 의병장 김천일은 황장군이 조성한 엄청난 규모의 소나무를 군선과 무기 제작에 요긴하게 사용했다. 연미정은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청국(후금)과 굴욕적인 형제 조약을 맺은 비운의 장소가 됐다. 병자호란(1637년) 때도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1월 30일)’에 8일 앞서 강화도가 함락됐다. 1678년(숙종 4년)에는 연미정이 방어시설인 월곶진으로 바뀐다. 국방과 관련한 갖가지 사연이 담긴 장소다. 실록에는 왕이 직접 송충이 소탕작전을 명하거나, 송충이 피해에 대한 기록이 40여 번 나온다. 심지어 1512년(중종7)에는 대설이 지났는데도 송충이가 없어지지 않자, 괴상한 일이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송충이는 가뭄, 홍수, 지진과 함께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천재(天災)로 역사에 찬란한(?) 이름을 차지하고 있다.
ㅡ 왜 정조는 송충이를 삼켰을까
정조는 유난히 효심이 깊었던 걸로 유명하다. 어느 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행행했다가, 송충이가 득실거리자 진노했다. 내시를 시켜 잡아오라고 명한 뒤 그 자리에서 산 채로 씹어 먹었다. 정조의 이런 효심 때문이었는지 그 후로 무덤 주변에 송충이가 사라졌다는 일화가 생겼다. 야사와는 달리 <일성록>에 실린 사실은 이렇다. 1795년 3월 10일 정조는 현륭원 주변 고을 사람들에게 송충이를 잡게 한다. 수고한 백성들에게 상을 내리고, 잡아들인 송충이는 바다에 던졌다. 불로 태우거나 땅에 묻기보다는 내세에 물고기나 새우가 되어 다시 환생하길 바랐다.
정조는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나무를 ‘식목왕’이기도 하다. 재위 중9 전국 282개소 산의 벌채를 금지하고, 293개소의 솔밭을 출입 금지구역으로 지정해 산림 보호에 힘썼다. 나라 전역에 120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었고,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을 조성할 때도 소나무와 단풍나무 외에는 구황작물로 쓰일 수 있는 도토리와 자두나무 등 과실 수를 심도록 명했다. 정조 당시에 심었던 나무의 수종과 연도 등 관련 자료도 방대했다. 이 자료를 말끔하게 요약해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던 신하가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1795년 현륭원에서 7년간 진행되어왔던 식목사업이 끝났다. 인근 고을이 나무를 심을 때마다 보고서를 조정으로 계속 올려 보냈다. 하지만 7년간의 작업이라 너무 많은 문서들을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산시문집》에 실린 정조의 말을 빌리면, “7년 동안 8읍(邑)에서 나무 심은 것과 관련된 문서를 수레에 실으니 소가 땀을 흘릴 정도로 많구나”라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정조는 다산을 불러 “네가 간략하게 정리하되 한 권을 넘기면 안 된다”고 지시했다. 다산은 각 고을별로 심은 나무 수를 월별로 정리했다. 또 연도별 자료를 합산해 그 많던 공문서를 한 장으로 요약했다. 계산해보니 현륭원에 심은 나무는 총 12만 9772그루였다. 200년 전에 현대식 ‘엑셀’의 원리를 꿰뚫고 적용한 사례다. 다산이 며칠 만에 종이 한 장에 ‘현륭원 식목부’를 보고하자 정조는 크게 칭찬했다. 이미 다산은 곡산부사 시절 마을별로 오늘날 주민등록 통계표를 만들어 지방행정에 적용하기도 했다.
ㅡ 뇌공신의 벼락 망치와 ‘천둥의 신 토르’의 벼락 망치
천관산 가득 메운 소나무를 그대 보지 않았던가
천 그루 만 그루가 온 산을 덮었음을
큰 고목들이 울울창창 들어섰고
다보록이 돋아나는 어린 솔도 총총히 솟았는데
하룻밤 새 송충이가 온 천지를 가득 메워
뭇 주둥이가 떡 먹듯이 모조리 먹었구나
흉측한 새끼 송충이 살빛도 까만 것이
노란 털에 붉은 반점 자랄수록 흉하도다
처음에는 잎을 먹어 진액을 말리더니
살갗까지 파고들어 상처만 남겼구나
가지 하나 까닥 못하고 소나무가 점점 말라붙어
곧추서서 죽는 꼴 어찌 그리 공손한가
연주창에 문둥병 걸린 가지 바라만 본 들
시원한 바람 울창한 숲을 어디 가서 찾을 건가
하늘이 솔을 낼 때는 깊은 생각 있었기에
사시사철 보살피고 한겨울에도 푸르구나
뭇 나무 다 제치고 높은 사랑 받았는데
복숭아꽃 자두꽃과 시샘할 리 있겠는가
태실과 명당이 만약에 무너지면
긴 들보 우뚝한 기둥으로 조정에서 쓰려 했던 것이고
왜놈이나 유구국이 만약에 덤벼오면
큰 전함 만들어 적의 예봉 꺾으려고 했던 것인데
네가 지금 사사로운 욕심으로 마음대로 죽였으니
분노가 치밀어 말이 막히네
어찌하면 뇌공의 벼락 망치를 가져다가
네 족속들 모조리 잡아 시뻘건 화덕에다 처넣어버릴까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치웠네
ㅡ 다산 정약용, ‘충식송·蟲食松’
다산 정약용이 1803년(42세) 유배지 강진에서 한 백성이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것을 애달파 ‘애절양’을 짓고 난 뒤에 이어서 지은 장편 우화시다. 그래서인지 부패한 관리에 대한 증오심이 가장 격렬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도둑고양이를 탐관오리로 비유한 「이노행」(貍奴行), 이리와 승냥이 같은 존재로 매도한 「시랑」(豺狼), 쳐 죽일 뱀으로 묘사한 「격사행」(擊蛇解) 보다 한술 더 뜬다. 나라의 충신들이 간사한 무리들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어이없는 현실을 장흥 천관산 소나무가 송충이에게 고사당하는 것으로 풍자했다. 다산의 다른 우화 시문이 탐관오리의 행태에 대해 단순히 개탄하거나 질책 정도에 그쳤다면, 이 시는 강렬한 비난을 제기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모조리 불태워 죽이고 싶다고 할 정도다. 이를 위해 다산이 얻고 싶어 했던 것은 뇌공신(雷公神)의 벼락 망치. 뇌공신은 민속신앙에서 번개와 천둥을 일으키는 신이다. 군신(軍神)이자, 사악한 것을 쫓아내는 액막이 벽사의 신으로 여겨진다. 뇌공신이 구름 속에서 북을 두드리면 귀신들은 모두 도망가고 죄 많은 인간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우리의 천둥신 ‘뇌공신’은 잊힌 반면 ‘토르’는 영화 ‘천둥의 신’이나 ‘어벤저스’ 등에서 벼락 망치 ‘묠니르’를 들고 등장한다. 바야흐로 서양 최강의 신이 아닌 진정한 우리의 슈퍼 히어로가 필요할 때다.
글=문화평론가 박승규
[출처] 충남일보 2021.02.16
/ 2021.11.20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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