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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 '알베르트 슈바이처' (2021.11.11)

푸레택 2021. 11. 11. 12:49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 '알베르트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

독일의 의사, 음악가, 철학자, 개신교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 중앙아프리카 서부 지역의 랑바레네에 알베르트 슈바이처 병원을 세우고 당시 비참한 상태에 있던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평생 의료봉사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독일 국적 때문에 전쟁포로로 잡히는 등 수모를 겪었으나 결국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왔고, 인류의 형제애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1952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 알베르트 슈바이처 (1875~1965)

세기의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슈바이처 박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들의 슬픈 시대에 한 사람의 위인이 살고 있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찬사가 아닐까.

슈바이처는 1875년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 지역인 알자스 카이제르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카이제르스베르크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슈바이처의 전 생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루터교 목사인 아버지는 아들이 성서를 읽으며 궁금해하는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고, 성찬예배 시 아프리카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자주 설교의 주제로 삼아서 슈바이처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했다.

또한 주변 교우들의 대부분이 가난한 농부였기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고, 1899년 철학 박사학위, 그 이듬해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Von Reimarus zu Wrede)》라는 저서로 예수 역사 연구 분야에서 인정받았고 오르간 연주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한 가지 뚜렷한 인생철학이 있었다. 나는 30세가 될 때까지 학문과 예술을 위하여 살도록 허락받았다. 그 후에는 직접 인간에 대한 봉사에 이 몸을 바치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유복한 가정에서 마음껏 공부하는 것을 늘 미안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행운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고민거리는 단지 그것을 실천하는 방식이었다.

30세가 되던 해 가을, 그는 파리의 선교사협회 홍보물에 수록되어 있는 아프리카 콩고 지방의 비참한 상태를 읽고 자신이 할 일이 바로 의료봉사임을 깨닫게 되었다.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전도양양한 젊은이 슈바이처는 1905년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1912년에 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의과대학을 졸업했지만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현지에서 병원을 짓고 운영할 막대한 자금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는 오르간 연주부터 출판한 책의 인세, 약간의 사재를 모아 아프리카로 떠났다. 곁에는 간호사 일을 맡아줄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가 있었다.

1913년 3월, 38세가 된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의 랑바레네에 도착했다. 이곳은 적도의 남쪽 약 60킬로미터 지점으로 프랑스 선교단의 거점이기도 했다. 지금의 가봉 공화국인 그곳에서 슈바이처는 병원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도착하자마자 환자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병원을 채 세우기 전이어서 닭 사육장이었던 곳을 임시로 수리하여 진료를 시작했다. 아프리카 인들에게 만연되어 있는 질병은 너무나 많았다. 파상풍, 이질, 말라리아, 폐렴, 수면증, 나병, 정신병, 폐결핵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의 작은 진료소는 아프리카 인들의 작은 희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는 이 작은 병원을 지나치지 않았다. 독일 국적을 가진 그가 프랑스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전쟁포로로 억류된 것이다. 그 후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나서 슈바이처의 고향인 알자스가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인 가봉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 국적을 프랑스로 바꿨다. 그리고 7년 만에 랑바레네 병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지난번보다 더 큰 규모의 병원을 지었다. 농지를 개간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하고 간호사와 의사들의 수도 늘렸다. 그의 봉사활동이 대외적으로 알려지자 수많은 봉사자들이 그의 병원을 찾아들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슈바이처의 병원 운영은 한결 수월하게 운영되었다. 그는 나병환자 거주지도 추가로 세웠다.

물론 현지인들과의 적응 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었다. 부족 간의 반목이 심해 아무리 심각한 상황의 환자라도 타부족일 경우는 운반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병원에서 제공하는 식사 대신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병실 안에서 불을 피우기도 했다. 수술을 하는 의사들을 칼을 휘두르는 마귀로 여기는 것은 다반사였고, 병원의 모기장을 뜯어서 도망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는 슈바이처에게 사소한 마찰일 뿐이었다.

가봉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그의 생명 존중 철학은 더욱 깊어졌고, 《문화철학(Kulturphilosophie)》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발표했다.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그의 철학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윤리원칙으로, 문명의 존속에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1952년 슈바이처는 오랜 봉사활동에 대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슈바이처의 병원은 현재 가봉 정부에 의해 슈바이처 평화기념병원으로 존속되고 있다.

슈바이처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우리의 운명을 알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봉사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여 깨달은 사람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출처]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 2010)

/ 2021.11.11(목) 책을 읽고 옮겨 적다

https://youtu.be/zj2BYSYXfV0

https://blog.daum.net/mulpure/15857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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