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 기념 서명을 부탁하려고 가로세로 40㎝ 정도의 두꺼운 서명판을 준비하여 드렸다. 교종께 서명판을 돌려받았는데 서명이 안 보였다. 제대로 의사 전달이 안 되었나 싶어 서명을 해주시라고 다시 부탁드렸다. 교종은 잘 보라고 했다. 서명판을 다시 살펴보니 아래쪽에 깨알 같은 작은 글씨로 “프란치스코”라고 쓰여 있었다. 놀라서 다른 주교들에게 그 서명판을 보이자 모두 “와∼” 하고 감동과 경탄의 환호가 터졌다.
[강우일 칼럼] ‘교황’이라는 제왕적 칭호 / 강우일 베드로 주교
프란치스코, 나는 그분을 여러 기회에 만났다. 2014년 8월 한국을 3박4일 찾아오셨을 때 만났고 로마에서 개최되는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에서 만났다. 그분은 참 소탈하고 겸손한 분이다. 그분은 2013년 3월13일 로마에서 있었던 추기경단 비밀회의에서 세계 가톨릭교회의 수장으로 선출된 후, 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에서 발표를 기다리던 수많은 군중을 향해 아주 소박한 인사말을 건넸다.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보나 세라)? 아시다시피 콘클라베(비밀회의)의 과제는 로마의 주교를 뽑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형제 추기경들은 그를 찾기 위해 땅끝까지 갔네요.” 교황을 뽑기 위해 멀리 남미 아르헨티나까지 찾아갔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분은 “파파”(교황)라는 오랜 세월 사용된 직함을 피하고 “로마의 주교”라는 단어를 썼다. ‘로마의 주교’는 사도 베드로의 후계가 맡는다. 세계인들과의 첫 대면에서 그분은 역대 교황이 취임 때 입던 붉은 망토와 공식 예복을 착용하지 않았다. 가슴에 거는 십자가도 옛날에 쓰던 소박한 십자가를 걸고 나왔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의 수호자인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선택하고 그렇게 불리기를 원했다. 전세계 교회에 보내는 공식 문서에도 ‘파파’라는 직함을 생략하고 그냥 “프란치스코”라고만 썼다. 그분의 이런 소박함과 겸양이 나는 참 좋다. 나도 그분의 마음을 공감하며 우리말로 그분의 직함을 교황이란 말 대신에 ‘교종’이라고 쓴다.
가톨릭교회는 고대에서부터 베드로의 후계자에게 아버지라는 존경의 뜻을 담아 대대로 파파라고 불렀다. 가톨릭 신앙이 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한자 문화권에서는 교종, 교황, 법왕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지금도 한국주교회의에서는 교종과 교황 둘 다 공식 직함으로 채택하고 있다. 교종(敎宗)은 교회의 으뜸이라는 의미이고 교황(敎皇)은 교회의 최고지도자, 통치자라는 뜻이다. 가톨릭교회가 아시아에 복음 전파를 시작하던 16세기,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은 세계의 종교적 지도자일 뿐 아니라 방대한 영토를 보유한 제왕이었고 정치적으로도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 사람들이 교황이라는 어휘를 사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중국의 영향으로 교종과 교황이 함께 쓰였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교황이라는 용어가 고착되었다. 일본에서는 자신들의 왕을 천황이라 부르는 것이 관례였고, 로마 교황을 가리킬 때는 법왕(法王)이라는 용어를 썼다. 일본의 사회 관행과는 달리 일본의 가톨릭교회에서는 천황과 동급의 ‘황’을 선호하고 메이지시대 이후 지금까지 교황으로 불러왔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국 교회도 ‘교황’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나는 이 ‘교황’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마음이 너무 불편하여 교종을 고수한다. 중세의 교황은 종교적, 정치적 최고 권위를 행사하며 이스라엘 성지를 이슬람 세력에서 해방한다는 명분으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게 했다. 또 종교재판을 열어 유대인과 이교도들을 심판하고 박해했다. 15세기부터 유럽인들은 대항해시대를 열며 하느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미지의 땅을 정복하고 토착 원주민들을 종속시키고 그들의 문화를 폐기하면서 제국주의적 문명을 이식하였다. 1454년 니콜라오 5세 교황은 이러한 제국주의적 정복을 추진하는 포르투갈 군주들에게 새로운 땅에 대한 정복과 지배권을 보장하는 칙서까지 내렸다. “본인은 사라센인들과 이방인들과 다른 그리스도의 적들을,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침략하고 정복하고 전쟁하고 패배시키고 복종시킬 수 있도록 완전하고 자유로운 권한을 부여한다. 이 권력을 부여받은 알폰소 왕은 자신과 그의 후계자들에게 속해 있는 섬들과 땅들과 항구들과 바다들을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소유한다.
”이런 제왕적 통치를 구사한 교황은 어부 출신인 사도 베드로와는 하늘과 땅처럼 동떨어진 존재였다. 예수님은 생전에 세상의 영광을 꿈꾸는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교회가 성장하여 온 세상에 두루 퍼지자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당부를 까맣게 잊고 민족들의 통치자 위에 군림하고 세도를 부렸다.
현대의 가톨릭교회는 1960년대에 들어와 교회 전반의 개혁을 추구하며 과거 역사의 오류와 과오를 성찰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회심과 쇄신의 여정을 시작했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여 주교, 사제, 평신도로 이어지는 피라미드형 교회관을 벗어나 모두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형제자매들의 공동체라는 수평적인 교회관으로 이동하고 있다. 성직자들은 교회를 다스리고 이끄는 지도자보다 하느님 백성을 섬기는 봉사자의 정체성을 찾고자 애쓰고 있다. 교황도 지상에서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던 삼중관을 벗어버렸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종의 경우 제왕적 권위를 탈피하려고 즉위 후 바티칸궁 입주를 마다하고 일반 숙소에 입주하였다. 세계 어느 나라를 방문해도 그 나라 정부가 제공하는 고가의 방탄 리무진을 결코 타지 않고 소형 승용차를 고집한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종은 서울 도착 후 한국주교회의 본부를 방문하고 주교단 전체와 만났다. 방문 기념 서명을 부탁하려고 가로세로 40㎝ 정도의 두꺼운 서명판을 준비하여 드렸다. 교종께 서명판을 돌려받았는데 서명이 안 보였다. 제대로 의사 전달이 안 되었나 싶어 서명을 해주시라고 다시 부탁드렸다. 교종은 잘 보라고 했다. 서명판을 다시 살펴보니 아래쪽에 깨알 같은 작은 글씨로 “프란치스코”라고 쓰여 있었다. 놀라서 다른 주교들에게 그 서명판을 보이자 모두 “와∼” 하고 감동과 경탄의 환호가 터졌다. 나는 이 깨알 같은 작은 글씨의 서명을 보며 미국의 어느 대통령 서명이 떠올랐다. 그 대통령은 자신이 새롭게 서명한 행정명령서에 몇미터 밖에서도 알 수 있는 굵고 큰 글씨로 서명하고 자랑스럽게 카메라 기자들에게 과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프란치스코 교종을 마음으로부터 좋아하고 존경한다. 그런 분에게 여전히 교황이라는 제왕적 칭호를 습관적으로 붙이는 것은 역사를 올바로 성찰하지 않고 프란치스코 그분의 인품과 삶의 행적을 무시하고 욕되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원문보기] 한겨레 202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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