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이사' 박영근 (2021.12.01)

푸레택 2021. 12. 1. 21:08

■ 이사 / 박영근

1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
더듬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 잔의 커피와,
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 기침소리
누가 왔다갔는지 때로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그 환한 자리에 더운 숨결이 일고,
계절이 골목집 건너 백목련의 꽃망울과 은행나무 가지 위에서 바뀔 무렵이면
그 집엔 밀린 빨래들이 그 작은 마당과
녹슨 창틀과 흐린 처마와 담벼락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햇살에 취해 바람에 흔들거릴 것이다
눈을 들면 사내의 가난한 이마에 하늘의 푸른빛들이 뚝뚝 떨어지고
아무도 모르지, 그런 날 저녁에 부엌에서 들려오는
정갈한 도마질 소리와 고등어 굽는 냄새
바람이 먼 데서 불러온 아잇적 서툰 노래
내가 떠난 뒤에도 그 낡은 집엔 마당귀를 돌아가며
어린 고추가 자라고 방울토마토가 열리고
원추리는 그 주홍빛을 터뜨릴 것이다
그리고 낮도 밤도 없이 빗줄기에 하늘이 온통 잠기는 장마가
또 오고, 사내는 그때에도
혼자 방문턱에 앉아 술잔을 뒤집으며
빗물에 떠내려가는 원추리꽃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부러져나간
고춧대와 허리가 꺾여버린 토마토 줄기들과 전기가 끊긴
한밤중의 빗소리······ 그렇게
가을이 수척해진 얼굴로 대문간을 기웃거릴 때
별일도 다 있지, 그는 마당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누군가 부쳐온 시집을 읽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물결을 끌어당기고 내밀면서
내뱉고 부르면서
강물은 숨쉬는가

2
그 낡은 집을 나와 나는 밤거리를 걷는다
저기 봐라, 흘러넘치는 광고 불빛과
여자들과
경쾌한 노래
막 옷을 갈아입은 성장(盛裝)한 마네킹들
이 도시는 시간도 기억도 없다
생(生)이 잡문이 될 때까지 나는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때로 그 길을 걸어 그가 올지 모른다 밤새 얼어붙은 수도꼭지를
팔팔 끓는 물로 녹이고 혼자서 웃음을 터뜨리는,
그런 모습으로 찾아와 짠지에 라면을 끓이고
소주잔을 흔들면서 몇 편의 시를 읽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가난한 겨울밤은 눈벌판도 없는데
그 사내는 홀로 눈을 맞으며
천천히 벌판을 질러갈 것이다

ㅡ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 창비, 2007)

 

[감상]

일반 독자들은 박영근 시인을 잘 모를 수도 있다. 안다 하더라도 평균치의 수명에 훨씬 못 미친 삶을 살다간 ‘노동시인’ 쯤으로나 알고 있다. 그리고 술로서 시대의 울분을 토했던 ‘참여시인’ 정도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격동의 한 시대를 건너오면서 도시변두리 노동자와 함께한 삶을 산 것도, 세상의 부조리에 아파하고 저항하면서 ‘요주의’성향의 시를 쓴 것도, 술깨나 마셔댔던 것도 사실이었으나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특히 그토록 열망했던 21세기에 들어 세상은 더 화려해졌지만 사람들이 비겁한 자본의 일상 속으로 더욱 깊게 빠져들었을 때 그의 고독도 깊이 침잠하였다.

결의는 꺾이고 연대는 느슨해지면서 타당한 분노마저 사라진 세상을 못 견뎌했다. 허위와 기망으로 치장한 꽃들이 불편했다. 술맛도 예전 같지 않았다. 대신 ‘솔아솔아 푸른 솔아’를 노래하며 그의 시세계는 깊어졌다. 내팽개쳐진 이웃에 대한 연민과 함께 그늘 속에서도 치열한 서정의 꽃을 피웠다. 다른 시인의 시를 용맹정진으로 읽으면서 그는 시를 ‘사는’ 사람으로 거듭났다. 2004년「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라는 시해설서이자 감상문을 책으로 엮으면서 그는 ‘책머리에’ 이렇게 고백한다. “온밤을 꼬박 새우면서도 그 비유의 세계의 씨줄과 날줄 사이를 아슬히 휘청거리듯 걸으며 느끼는 행복감을 달리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

시를 대상화하여 해석하고 평가하는 비평가들의 시해설서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는 그의 해설서는 가히 ‘시의 내밀한 자궁’을 보는 듯했다. 어설픈 감상 글을 붙여 시를 소개하고 있는 내 처지에서 배우고 깨닫는 바가 적지 않다. 지난 주말 5월11일은 그의 13주기였다.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문단 말석에도 끼지 못하는 나는 그의 생전에 어디서건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지난해 김수상 시인이 제4회 ‘박영근작품상’을 수상할 때 인천 신트리공원에서 그의 흔적을 둘러본 게 고작이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그리고 뒤풀이에서 생전 그와 가까이 지냈던 문우들과 수줍게 막걸리 한잔을 기울였다.

가로늦게 그의 작품을 읽고서 살아생전 그가 목젖으로 삼켰던 고통의 물방울들을 어른어른 이해하게 되었다. 유고시집 끄트머리에 수록된 이 시는 생의 고달픔과 외로움을 하루하루 견디면서 살다간 그의 막막한 삶과 문학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마치 저 세상으로 '이사'가서 어느 비오는 밤 문지방에 기대어 쓴듯한 문장들이 시적 영혼의 고백과 반응하면서 그의 삶을 오롯이 반추한다. 그의 글들은 시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단 한 줄의 문장과 어휘를 위해 어떤 극단에까지 가보고 싶도록 욕망을 솟구치게 한다. 그 쓸쓸함과 침묵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면서, 시대의 절망적 현실에 맞서 어떻게 시로써 현실의식을 지켜내는지를 잘 보여준다.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그의 시 <길>의 일부다. "물 위로 꽃을 올리지 못한 봉오리 하나/ 몸이 얼마나 썩어야 자궁이 열릴까// 숨을 틔울 바람 한점 없는 저 물속에/ 꽃도 뿌리도 없이 내가 꿈꾸는 것// 한번은 미쳐버리고 싶은데/ 미쳐/ 활짝 깨어나고 싶은데// 산마루엔 노을의 빛들이 벌겋게 터져 흐르고/ 저 봉오리 홀로 숨가쁘다" <수련>의 전문이다. 가쁜 숨 다 몰아쉬고 '홀로 눈을 맞으며 천천히 벌판을 질러가'는 그의 뒷모습이 아련하게 보이는 것 같다. (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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