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꼬마리씨 하나 / 임영조
멀고 긴 산행길
어느덧 해도 저물어
이제 그만 돌아와 하루를 턴다
아찔한 벼랑을 지나
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
쓰라린 상흔과 기억을 턴다
그런데 가만! 이게 누구지?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억센 가시손 하나
나의 남루한 바짓가랑이
한 자락 단단히 움켜쥐고 따라온
도꼬마리씨 하나
왜 하필 내게 붙어 왔을까?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예까지 따라온 여자 같은
어디에 그만 안녕 떼어놓지 못하고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아내여, 내친 김에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다면
할부금 갚듯 정 주고 사는 거지 뭐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
ㅡ 시집 『귀로 웃는 집』 (창작과비평사, 1997)
[감상]
한겨울에도 조금만 나서면 사는데서 멀지않은 경안천을 끼고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이 있다. 오늘 유난히 찬 날씨이긴 하지만 마음먹고 집을 나섰다. 다른 계절에 비해 사람들이 좀 줄긴 했으나 풍광 좋은 경안천변에는 드문드문 오가는 발길이 보이고 한갓진 습지강가에는 겨울철새들의 날개 짓이 평화롭다. 나오길 잘했다며 익숙한 길을 한참 걷는데 한 노인이 강가 마른 숲 덤불 사이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뒤적거리고 있었다. 노인께 다가가 물으니 ‘창이자’라고 한다. 노느니 염불한다고 열매를 따다가 약재상에 가져갈 거란다.
짙은 갈색의 바짝 마른 열매란 다름 아닌 여름철 강가에 지천으로 널려 성가시게 달라붙던 그 ‘도꼬마리’였다. 도꼬마리는 고약한 성질머리로 자주 시의 질료로 등장하는데, 특히 이 시처럼 부부관계와 그 인연을 말할 때 요긴하게 차용된다. ‘이게 누구지’ ‘왜 하필 나이고 당신인가’ ‘우연인가 숙명인가’ 라면서 사유를 이끌어낸다. 결혼이란 전생의 원수가 다시 만나 한평생 함께 살면서 서로 원수 갚는 일, 빚 갚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허구한 날 지지고 볶으면서도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그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문정희 시인의 ‘남편’이란 시에서처럼 ‘이 무슨 웬수인가’ 싶다가도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도 저녁을 짓고 저녁밥을 맛있게 나눠먹는다. 그런데 ‘도꼬마리씨’ 같은 운명적 관계는 부부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동성들 간에도 간혹 그 특성을 드러내곤 한다. 평생 도움 안 되는 녀석인데도 끝까지 떨쳐버리지 못하는 친구가 있는가하면, 짓거리마다 마음에 안 들고 민폐를 끼치는데도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후배도 있다. 그것은 때로 동물이나 식물, 어떤 일과의 인연에서도 속성이 나타난다.
내 경우 최근 오래된 하나의 인연을 내려놓고 한참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다른 짐 하나를 다시 꺼내 집어들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도꼬마리의 꽃말은 애교, 고집이다. 그리고 창이자는 알려진 약효만도 감기, 해열, 두통은 기본이고 종기나 뾰루지 치료에도 쓰인다. 그러나 제 아무리 만병을 통치한들 도통 효험 없는 불량종자도 있겠고, 촘촘히 박힌 가시손이 무지막지한 고집으로 내내 깔쥐어뜯으면 그만 안녕 떼어놓고 싶을 때가 왜 없겠으랴. '깨끗하게 늙는 일'에 방해되고 성가시기만 한 도꼬마리도 있겠으나 일단 갈 데까지 가보는 것이다. (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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