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뿌리' 김석윤 (2021.12.01)

푸레택 2021. 12. 1. 19:40

■ 뿌리 / 김석윤

가로수를 옮기고 있었다
굴삭기가 한 움큼씩 흙을 파낼 때마다
드러난 가늘고 굵은 뿌리를
인부들이 톱으로 잘라 냈다
잘린 부위에서 배어 나온 물기가
주변의 황토를 더욱 붉게 적셨다

깊게 둘러친 해자(垓子) 안쪽
고립된 채 완강히 버티던, 그가
마침내 쓰러졌다, 팔을 내둘렀지만
허공은 그의 손을 잡아 주지 못했다
그때 보았다
그가 지탱하고 있던 자리만큼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던 하늘과
퍼렇게 치켜뜬 잎들의 눈으로 지켜온
그늘이 사라진 것을

문득, 주위를 둘러보자
내가 걸어온 길이 사방으로
모두 뿌리가 되어 있었다
갈래갈래 길 더듬어 발품을 팔아온
발바닥의 물집이 쓰라렸다
그날 이후, 뿌리 깊다는 말에서는
물기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ㅡ 시집 『타르쵸 깁는 남자』 (2014.11.30)

시인의 눈이 머무는 자리는 늘 이렇듯 시의 발아 현장이다. 그러나 아무나 그곳에서 시를 꽃피우지는 못한다. 길을 가다 가로수를 옮기거나 겨울철 가지치기 장면을 목격하는 것 등이 시의 질료가 되기는 하겠으나 범상치 않은 눈과 날카로운 관찰에 의한 원천적 인식과정, 그리고 의미화와 형상화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시가 되질 않는다. 원천적 인식은 독서와 체험 사색을 통해 단련된 감성 능력으로 시로 꿰매어 질 것인지를 먼저 판단한다. 의미화 단계는 시적 인식을 뜻하며, 시적 인식의 개념이 명료하지 않으면 알맹이 있는 시를 쓸 수 없다. 그것은 관념, 사상, 미적 이미지, 감정 따위로 '의미 있는 생각'을 뜻한다.

하지만 자신만의 설익은 관념이나 질펀한 감정, 그럴듯한 단어로 주렁주렁 치장된 의미 없는 시들이 시중에 많이 나돌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누구나 시를 처음 쓸 때는 그랬고 나도 마찬가지다. 시를 쓰고 싶은 의욕을 갖게 되는 것은 인상적인 느낌이겠는데, 보통사람들에겐 무덤덤한 느낌이 시인에겐 심리적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것은 시적 인식의 핵심인 탁월한 감수성과 예리한 관찰력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감수성이 남다른 사람들은 대수로운 사건에서도 이런 충격을 자주 받게 된다. 감수성은 말 그대로 느끼는 능력. 느낌은 감각적 경험을 통해 우리의 정신 속으로 들어온다.

감수성은 타고난 것일 수도 훈련에 의해서도 길러질 수 있다. 김석윤 시인은 천부적인지 공부에 의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생의 바닥에서 끊임없이 시의 영감을 솟구치게 하는 정신의 어떤 샘물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그것에 더하여 그 샘물을 고이 담아내는 꽤 정교한 그릇도 마련되어 있다. 언어를 부리고 다듬어 형상화시키는 공정까지 거쳐 식탁에 올려놓는 것을 보면 천상 시인이라는 느낌이 든다. 아무리 맑고 신선한 샘물일지라도 그릇에 담겨지지 않는다면 무위자연의 현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이러한 시적 인식과 상상력의 발휘는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과정과도 매우 닮았다.

애정과 관심을 갖고 한 나무에게 집중적으로 마음을 열어 쉬 드러나지 않는 뿌리의 서정을 성찰하였다. 시인은 뿌리가 잘려나간 채 옮겨지는 나무를 보면서 나무 속에 승화된 생명력을 보았고, 나무와 생명력의 상관관계를 파악하였으며, 뿌리의 생명력이 뜻하는 그 의미와 사상을 읽었고, 젖은 뿌리에 몰려있는 삶의 고통과 흔적을 삶의 알레고리로 재해석하였다. (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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