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천지간 / 윤대녕
여기까지 어떻게 왔냐구요? 믿을 수 없겠지만 걸어서 왔습니다. 물론 읍내 터미널에 내려 바로 군내버스로 갈아타면 된다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었지요. 그래요, 눈이 내리고 있었어요. 폭설이었죠. 하지만 그 여자가 터미널에서부터 줄곧 여기까지 걸어왔던 거예요. 네, 한 시간도 넘게 걸리더군요. 글쎄요, 제가 왜 그 여자의 뒤를 따라왔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따라온 겁니다. 뭐라구요? 전에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 아니냐구요? 아녜요, 생면부지인 여자예요. 오늘 광주에서 처음 봤다니까요. 거기서부터 완도 읍내까지는 함께 직행버스를 타고 왔지요. 세 시간 반이 걸리더군요. 아무튼 저는 문상을 가던 길이었어요. 발인요? 아마 내일일 겁니다. 글쎄요, 내일 아침에라도 첫차를 타고 광주로 가야 할지 어쩔지 아직 모르겠군요.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것도 왠지 장담할 수가 없군요.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정도리 구계등이다. 저녁 여덟 시에 나는 이곳에 왔다. 어제 낮에 나는 외숙모의 부음을 들었다. 그녀는 쉰 살이라는 아직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숨졌다. 암 선고를 받은 것은 9개월 전이었다. 그때 담당 의사는 앞으로 길어야 3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녀가 3개월에서 무려 6개월을 더 버틴 것은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던 큰아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들의 합격통보를 받고 나서 불과 이틀 만에 숨졌으니 그렇게밖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어머니가 내려가 있기 때문에 굳이 나까지 문상을 가지 않더라도 모양새가 나쁘달 수는 없었으나 외숙을 생각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그리고 군에서 제대했을 때 외숙이 각각 쌀 한 가마니씩을 화물 열차에 실어 보내왔던 것이다. 요즘 세상에 쌀 두 가마니가 무슨 대수로운 것이랴만 외숙에게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그게 묘하게도 빚 감정으로 작용하는 것만큼은 어쨌든 사실이었다. 외숙모가 서울 백병원에서 암 선고를 받던 날도 나는 외숙의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그날 저녁 광주로 내려가며 그는 또 무슨 정신으로 하는 소린지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어서 혼례를 올려야지. 그때 또 쌀 한 짝 올리마."
외숙은 쌀이라는 것을 무슨 제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하기야 어머니만 해도 아직 바늘 쌈지와 쌀을 화폐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물포를 하고 있는 외숙은 젊어서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무슨 이유로 마흔 살까지 잡고 있던 교편과 서양화를 하루아침에 집어치웠는지는 모른다. 다만 백색에 미쳐 있다가 그만 붓을 놓게 되었다는 말을 전에 한번 들은 기억이 있을 뿐이다. 하얀색이 아니고 백색 말이다. 단지 어감 차이 밖에는 없다고 생각되는 이 하얀색과 백색을 외숙은 아직도 완전히 다른 색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오전 10시 30분 서울발 광주행 고속버스. 나는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검은 구두까지 신고 있었다. 누가 봐도 상가에 가는 사람이란 걸 알았을 것이다. 요즘은 굳이 옷차림까지 따져 문상을 가는 사람도 없으려니와 암만해도 그런 차림을 하고 있으면 어딜 가나 남들의 퀭한 시선을 받게 돼 나도 꺼려하는 편인데, 몇 년 전인가 어머니가 우격으로 양복점으로 데려가 할 수 없이 맞춘 옷이었다.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얘기였다. 당신이 수의를 미리 지어 놓았으니 이를테면 나도 상복을 준비해 놓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여간해서는 잘 입지 않지만 아무래도 집안 사람이 상을 당하게 되면 또 갖출 것은 갖추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두 번 꺼내 입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검은 양복을 입고 있으면 그때마다 얼굴이 뻣뻣해지는 느낌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여자를 본 것은 오후 세 시쯤이 되어 광주종합터미널에 도착해서였다. 보았다, 라는 말은 맞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버스에서 내려 나는 택시 승강장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가다 툭 하고 서로 어째가 부딪쳤던 것이다. 좀 세게 부딪쳤던 것 같기도 하다. 순간 여자의 몸이 휘청하니 흔들렸고 이어 아!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귓전에 날아와 박혔다. 딱히 해침이라도 당한 듯한 단말마의 소리였다. 얼결에 놀라 돌아보니 노란 바바리코트를 입은 여자가 미간을 찌푸린 채 손으로 배를 싸쥐고 있었다. 몰랐는데, 내 몸이 그녀의 배까지 스친 모양이었다. 곧바로 내 입에서 죄송합니다, 라는 말이 튀어나왔지만 여자는 들은 척도 않고 곧바로 몸을 추슬러 매표 창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로부터 약 5분 후에 나는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된다. 가본 사람은 알지만 광주종합터미널은 직행버스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이 상가를 사이에 두고 연결돼 있다. 그녀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직행버스터미널로 가기 위해 상가 보도의 중간 께에 있는 택시 승강장을 막 지나치고 있었다. 핸드백조차 지닌 것이 없는 단출한 바바리 차림이었다. 베이지색이 아닌가 싶어 눈여겨보니 역시 연한 노란빛이었다.
(중략)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자는 벌써 떠나고 없었다. 잊은 듯 홱 이불을 걷어 보니 요 위에 그녀가 흘린 머리카락이 몇 올 남아있었다. 섬뜩한 느낌...... 아, 그렇다면 이제 넋이라도 건져진 것인가. 허나 못할 짓을 한 사람처럼 나는 되게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여자는 임신 4개월째였다. 3개월 전 한 남자와 이곳 구계등에 왔다가 첫 관계를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보리 싹이 팰 때 결혼하자던 남자가 1개월 전에 여자의 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여자는 광주에서 검은 양복을 입고 있던 나를 본 순간에야 자신이 죽으러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뱃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한 것도 그때였다고. 내가 구계등까지 따라오게 내버려둔 것도 실은 아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누군가 아이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자신이 부러 여기까지 나를 끌고 온 것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구계등까지 걸어온 건 읍내 터미널에 내려서도 확실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탓이었다. 다른 한편으론 내게 돌아갈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처 따라오게 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작정이었다. 여자는 자신의 전생을 지우기 위해 나와의 관계를 원했고 그리하여 아이는 살리되 아이의 아비에게서는 놓여날 수 있었다고 중얼거리며 내 팔 안에서 깊이 잠이 들었다.
여자가 개놓고 간 옷을 챙겨 입고 아래로 내려와 나는 주인 사내가 미리 챙겨 놓은 밥상을 받았다. 어느덧 비가 그치고 햇살이 바다 위에 내려와 너울거리고 있었다. 늦게까지 주무셨군요, 하며 주인 사내가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그새 열 시였다. "여자 분은 먼저 내려와 아침을 먹고 떠났습니다. 소리꾼들도 오늘 다 떠난다고 하더군요." 새벽녘에 있었던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무심한 얼굴로 낚싯대를 닦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묵묵부답으로 수저질만 하고 있었다. 오늘도 베란다에선 붉은 스웨터의 여자가 유리를 닦고 있었다. 내가 밥을 다 먹어 갈 때쯤 웬 젊은 여자 하나가 유리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혼자인 듯 여자는 주저하는 몸짓으로 주인 사내에게 다가가 며칠 방을 빌릴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흘린 듯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서른 살쯤 돼보이는 마른 여자였다. 여자는 돈을 내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표정을 숨기고 주인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누가 또 온 모양이군요." "내 집에 드는 사람을 어쩌겠어요. 그저 조용히 왔다 가기를 바랄 뿐이죠." 밥상을 물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백이 피었나 한바퀴 돌아보고 가시죠. 오늘쯤엔 봉오리가 터졌을 텐데요." 동백. "그냥 가겠습니다. 어쩌면 본 것도 같으니 말입니다." 아리송한 얼굴로 사내가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묻지 않았다. 다만 구두를 신고 있는 내 등에 대고 이런 말을 했다. "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 여자분이 전에 우리 집에 들었던 사람이란 걸요. 소리꾼들이 내려오고 나서 며칠인가 뒤에 웬 남자와 함께 와서 하루 묵고 갔죠." "어쨌거나 목숨은 구하고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처음 문을 들어설 때부터 느낌이 그랬거든요." 나는 대꾸 없이 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사내가 따라 나오며 내게 가는 길을 알려 주었다. "저 느티나무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면 바로 큰길이 나옵니다. 거기서 군내 버스를 타면 읍내까지 족히 20분이면 닿을 겁니다." "아뇨 걸어서 들어왔으니 걸어서 나가야지요." 나는 사내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걸음을 옮겨 놓다 말고 나는 문득 사내를 돌아보며 이렇게 묻고 있었다. "전에 어디서 무얼 하셨는지요. 구계등에 오기 전에 말입니다." 그러자 사내가 빙긋이 웃으시 대꾸해 왔다. "새삼스럽게 서로 그런 걸 물어 뭘 합니까. 만인이 다 혹자인 걸요.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회나 한 접시 드시러 오세요."
생각해 보니 나는 새벽에 함께 있던 여자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물론 어디서 온 여자인지 무얼 하는 여자인지도 모르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인연이 되면 또 만나겠죠" 라며 사내가 먼저 등을 돌려 횟집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장님처럼 꺼이꺼이 길을 짚어가며 흘로 그 곳을 돌아나오고 있었다.
(1996년 이상문학상수상작품)
◇ 윤대녕 (尹大寧, 1962~ )
대전에서 중‧고교를 마친 후 1981년 단국대학교 불문학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 1988년 졸업하였다. 198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원(圓)」이 당선되었으며, 1990년 단편 「어머니의 숲」으로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단편 「사막에서」(1990), 「눈과 화살」(1991), 「그들과 헤어지는 깊은 겨울밤」(1992),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1993), 「은어낚시통신」(1994) 등을 발표하면서 1990년대의 새로운 문학적 감수성을 대변하는 신인 작가로 주목받았다.
첫 창작집 『은어낚시통신』을 출간한 후 본격적인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이후 단편 「사막의 거리, 바다의 거리」(1994), 「새무덤」(1994), 「신라의 푸른 길」(1994), 장편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1994), 중편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1995), 「천지간」(1996), 「빛의 걸음걸이」(1998) 등을 발표하며 새로운 소설 경향을 주도하였다.
그의 소설들은 이념적 요건에 의해 크게 좌우되던 1980년대 이전의 소설과는 달리 진정한 문학성의 천착을 목표로 함으로써 민주화와 개방화로 치닫는 새로운 시대 상황과 특이한 대응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존재의 시원에 대한 탐구’로 요약되고 있는 그의 작품 세계는 획일적인 인간관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인간의 가치를 독특한 구성과 미학적인 문체를 통해 추구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주제의 무게를 넘어서서 하나의 소설적 미학으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새로운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소설집 『은어낚시통신』(1994),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1995), 『남쪽 계단을 보라』(1995), 『추억의 아주 먼 곳』(1996), 『지나가는 자의 초상』(1996), 『달의 지평선』(1998), 『코카콜라 애인』(1999), 『사슴벌레여자』(2001), 『눈의 여행자』(2003), 『장미창』(2003), 『누가 걸어간다』(2004),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2004),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2005), 『제비를 기르다』(2007) 등이 있고, 콩트집 『정육점 여인에게서』(1996)가 있다. 1994년 문화체육부 제정 제2회 오늘의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하였고, 1996년 「천지간」으로 제20회 이상문학상을, 1998년 「빛의 걸음걸이」로 제43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출처] 네니버지식백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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