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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수필] '색난(色難), 가을 단풍에게 배운다' 김시천 (2021.11.22)

푸레택 2021. 11. 22. 12:51

■ 색난(色難), 가을 단풍에게 배운다 / 김시천 시인
 
바야흐로 가을이다.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왔음을 안다는 일엽지추一葉知秋의 계절이다. 따뜻한 햇살에 싱그럽게 피어나는 감성 덕에 모든 이가 시인詩人이 되는 봄과 달리 가을은 스산한 바람으로 누구나 철학자哲學者가 된다고도 한다. 그런데 나는 단풍이 드는 가을이 오면 울긋불긋 물들다 떨어지는 낙엽 속에서 자그마한 삶의 지혜를 떠올리곤 한다.

가을에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세상은 온통 형형색색의 전경이 펼쳐진다. 푸르디푸르던 이파리들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붉고 노란색으로 물들어 온갖 색色의 잔치를 열기 때문이다. 수종에 따라 형태도 다르고 색깔도 다른 색의 교향악은 우리 마음에까지 그대로 울려 우리 심장을 달뜨게 한다. 그런데 이런 단풍丹楓의 향연은 ‘왜 일어나는 걸까?

생물학자들은 단풍이 드는 현상을 안토시아닌 등의 색소와 잎 속에 함유된 당분이 빚어내는 마술이라 설명한다. 가을이 들어 해가 짧아지고 온도가 낮아지면 생장호르몬이 사그라들면서 나무줄기와 잎자루 사이에 떨켜가 생겨나 낙엽이 진다는 것이다. 낙엽이 지기 전 바로 그때 나무줄기로 빠져나가지 못한 당분이 짙어지면서, 푸른빛의 엽록소로 인해 보이지 않던 갖가지 색소色素들이 제 색깔을 뽐내는 게 단풍이라 한다.

엽록소의 푸른빛에 가려져 있던 온갖 색소들이 차가운 바람에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제 빛깔을 드러내는 가운데 이파리가 색색으로 물들게 된다. 색소에 따라 빨갛게 노랗게 누렇게 회색빛으로 물드는 단풍은 차가운 바람에 나무의 생명이 반응하는 온몸의 몸짓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울긋불긋한 색의 향연은 나무의 살아있다는 외침이고, 생명이 숨 쉬고 있다는 떨림이다.

만약 단풍이 들지 않거나 낙엽이 지지 않으면 나무는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하고 얼어 죽는다고 한다. 이파리에 머물던 물기가 낙엽과 함께 떨어지고, 낙엽들이 땅 위를 포근히 감싸, 차가운 바람과 눈의 냉기가 뿌리까지 스며들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는 것은 수목樹木에게만 해당하지는 않는 듯하다.

옛 선인들의 고전 《논어(論語)》에 보면 색난色難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색色이란 본래 사람들의 눈동자 색깔이 각양각색인 것을 상형한 것으로 색깔을 뜻하지만, 사람의 얼굴을 통해 드러내는 낯빛, 즉 표정表情의 뜻으로도 쓰인다. 그래서 색난이란 얼굴 표정 짓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논어》에서는 얼굴 표정 짓기가 어렵다고 한 것일까?

옛 선인들은 정情을 구분하면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네 가지 감정이나, 여기에 두려움[懼], 사랑[愛], 욕심[欲]을 더해 칠정七情을 말하곤 했다. 표정이란 마음속의 이런저런 감정이 얼굴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이 정이란 것은, 언제나 우리를 둘러싼 삶과 환경에 대해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반응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으면 마음이 기쁘고, 친구를 만나면 즐겁고, 자식이 아프면 슬픈 것은 인지상정이다. 어두운 산길을 혼자 걷다보면 두려움이 솟고, 매력 있는 이성을 만나면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도 한다. 게다가 부와 명예는 언제나 우리가 욕심내는 것들이기도 하다. 사실 감정이란, 우리의 생명이 인생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에 대한 판단이자 반응에 해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표정은 마음의 얼굴이다. 상대방이 욕하고 주먹을 휘두르기 전에 우리는 상대의 화난 얼굴에서 나에 대한 적의敵意을 읽어낸다. 손 내밀고 인사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상대의 웃는 얼굴에서 호의好意를 알아차린다. 그래서 무엇보다 표정을 관리하며 상대방을 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당연한 행동에서 누구나 잊어버리는 예외가 있다.

제자 자하子夏가 효孝에 대해서 묻자, 공자孔子는 이렇게 답한다. 부모님을 대할 때 얼굴 표정 짓기가 정말 어렵다. 힘쓸 일이 있을 때 자식이 수고스러운 일을 감수하고, 술과 밥이 있으면 웃어른이 먼저 드시게 하는 것을 어찌 효孝라 하겠는가? 힘을 써야 하는 어려운 일 먼저 하고, 식사할 때 순서에 맞게 숟가락 드는 것이 효가 아니라, 부모님 면전에서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을 짓는 것이 진짜 효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오히려 가깝고 친한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기 일쑤이다. 친구니까 편하게 말하고 가족이니까 편하게 대한다며, 실은 상대방의 감정이나 상황을 신경 쓰지 않고 막 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도 나이든 부모에게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있는 그대로의 표정을 감추지 않고 대한다. 나를 걱정하며 잔소리하는 나이 든 부모에게 정색正色을 하며 따지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는 일인 듯하다

단풍이 드는 계절이 오면, 난 그 속에서 곧 다가올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곤 한다. 말라가는 이파리 속에 감추어진 부모님의 온갖 감정의 잔해殘骸들이 떠오르곤 한다. 나를 키우고, 나를 걱정하고, 내게 잔소리하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런 감정의 단풍들이 땅 위에 떨어지는 것은, 또 내가 겨울 추위에 얼지 않도록 감싸는 낙엽이 될 것이기에.

이해관계로 얽히고 설킨 주위 사람에게 우리는 언제나 말 한마디, 표정 하나 주의를 기울이며 산다. 그런데 왜 나를 낳아주고 나를 길러주고 나를 걱정해준 부모에게는 표정 하나 고치지 못하고 사는 걸까? 색난色難, 그래서 공자는 그렇게 말했나 보다. 부모님 대할 때 얼굴부터 바꾸고 대해라. 그게 바로 효孝의 전부이다. 먹을 것, 입을 것 챙기는 것보다 얼굴부터 온화하고 부드럽게 할 일이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다가와서야 나는 철이 드나 보다. 올 가을 단풍을 보면, 오늘 저녁 부모님을 볼 때 얼굴부터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는 가을 단풍에게 배운다. / 글=김시천 시인

■ 안부 /
김시천 시인

안부를 묻고 산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이 어딘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그럴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사람 속에 묻혀 살면서
사람이 목마른 이 팍팍한 세상에
누군가 나의 안부를 물어준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가슴 떨리는 일인지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걸
깨우치며 산다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오늘 내가 아는 사람들의 안부를
일일이 묻고 싶다

■ 사는 게 궁금한 날 / 김시천 시인

사는 게 궁금한 날
술 한 잔 어떠하신가
봄날엔 해묵은 산 벚나무 아래 앉아
술잔에 꽃잎 띄워 쓰다 만 시 벗하여 마시고
여름엔 매미 소리 울창한 숲속 계곡에
벌거숭이로 들어 앉아
벗들 함께 별 하나 나 하나 산 놓으며 마시고
가을엔 저녁 예불 소리 들리는 절 밑 주막에 들러
발 밑에 뒹구는 낙엽 따라 진양조로 마시고
겨울엔 눈 쌓인 외딴 마을 타는 장작불같이
눈밭에 엎어져 통곡으로 마시고
사는 게 못내 궁금한 날
술 한 잔 어떠신가

아니면 그저 차나 한 잔 하시던가

/ 2021.11.22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