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의 바다 / 심훈
흰 구름이 벽공에다 만물상을 초 잡는 그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맥파만경에 굼실거리는 청청한 들판을 내려다보아도 백주의 우울을 참기 어려운 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조그만 범선 한 척을 바다 위에 띄웠다. 붉은 돛을 달고 바다 한복판까지 와서는 노도 젓지 않고 키도 잡지 않았다. 다만 바람에 맡겨 떠내려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나는 뱃전에 턱을 괴고 앉아서 부유와 같은 인생의 운명을 생각하였다. 까닭 모르고 살아가는 내 몸에는 조만간 닥쳐올 죽음의 허무를 미리 다가 탄식하였다. 서녘 하늘로부터는 비를 머금은 구름이 몰려 들어온다. 그 검은 구름장은 시름없이 떨어뜨린 내 머리 위를 덮어 누르려 한다.
배는 아산만 한가운데에 떠 있는 '가치내'라는 조그만 섬에 와 닿았다. 멀리서 보면 송아지가 누운 것만한 절해의 고도다. 나는 굴 껍데기가 닥지닥지 달라붙은 바위를 짚고 내렸다. 조수가 다녀나간 자취가 뚜렷한 백사장에는 새우를 말리느라고 공석을 서너 잎이나 깔아 놓았다. 꼴뚜기와 밴댕이 같은 조그만 생선이 섞인 것을 해쳐 보려니,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 외로운 섬 속에도 사람이 사나 보다.’
나는 탐험이나 하듯이 길로 우거진 잡초를 헤치고 인가를 찾아 섬 가운데로 들어갔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홀로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어려서 부르던 노래를 휘파람 섞어 부르며, 뱀이 지나간 자국만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갔다. 과연 집이 있다! 하늘을 꿰뚫은 듯 열 길이나 까마아득하게 솟아오른 백양목 그늘 속에서 게딱지같은 오막살이 한 채를 발견하였다.
‘저기서 사람이 살다니 무얼 먹고 살까?’
나는 단장을 휘두르면 내려갔다. 추녀와 땅바닥이 마주 닿은 듯한 그나마도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속에서 60도 넘어 보이는 노파가 나왔다. 쑥방석 같은 머리를 쓰다듬어 올리면서 맨발로 나오더니,
“아, 어디서 사시는 양반인데...... 이 섬 구석엘 이렇게 찾아 오셨시유?”
하고, 바로 이웃집에서 살던 사람이나 만난 듯 얼굴의 주름살을 펴면서 나를 반긴다.
“여기서 혼자 사우?”
나는 그 노파가 말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을 이상히 여길 지경이었다.
“아들허구 손주새끼허구 살어유.”
“아들은 어디 갔소?”
“중선으로 준치 잡으로 갔슈.”
노파는 흐릿한 눈으로 아득한 바다 저편을 건너다 본다. 그 정기 없는 눈동자에는 무한한 고적에 속절없이 시들어가는 인생의 낙조가 비치지 않는가? 백양목 윗가지에는 바람이 씽씽 분다. 이름도 모를 물새가 흰 날개를 펼치고 그 위를 난다.
“쓸쓸해서 어떻게 사우?”
나는 저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여북해야 인간 구경두 못 허구 이런 데서 사나유. 농사처가 떨어져서 죽지 못해 이리루 왔지유.”
나는 차마 더 묻기 어려워 머리를 숙이고 돌아서는데, 노파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침침한 부엌 속으로 들어간다. 수숫대로 엮은 울타리 밖에는 마늘과 파를 심었다. 북채만한 팟종에는 씨가 앉아 알록달록한 나비가 쌍쌍이 날아다니다. 조금 있자,
“이거나 하나 맛보시유.”
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돌아다보니 노파는 손바닥만한 꽃게 하나를 들고 나왔다. 내 어찌 이 불쌍한 노파의 친절을 물리치랴. 나는 마당 구석에 가 쭈그리고 앉아서 짭짤한 삶은 게발을 맛있게 뜯었다. 그대로 돌아 설 수가 없어 백동전 한 푼을 꺼내어, 한사코 아니 받는 노파의 손에 쥐어 주고 나왔다.
“아아, 인생의 쓸쓸한 자태여!”
나는 속으로 부르짖으며 그 집 모퉁이를 돌아 나오려는데, 등 뒤에서,
“응아, 응아.”
어린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애가 우는구나? 그 늙은이의 손주가 우나 보다.’
나는 발을 멈추었다. 불현 듯 그 어린애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한번 안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어 발을 돌렸다. 토굴 속 같은 방 속에서 어머니의 젖가슴에 달라붙어 젖을 빠는 것은 이 집의 옥동자였다. 그 침침한 흙방 속이 이 어린애의 흰 살빛으로 환하게 밝은 듯,
“나 좀 안아 봅시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살이 삐죽삐죽 나오는 베옷 한 벌로 앞을 가린 젊은 어머니는 부끄러워 머리를 들지 못한다. 노파는,
“이 더러운 걸......”
하며, 손주를 젖에서 떼어다간 내 팔에 안겨 준다. 어린것은 젖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사지를 바둥거리며 내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본다. 울지도 않고 낯도 가리지 않고 반가운 인사나 하는 듯 무어라고 옹알거린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제 힘껏 감아쥐고는 놓지를 않는다.
까만 눈동자의 별같이 영롱함이여! 조그만 코와 입모습의 예쁨이여! 나는 가슴에 옮겨드는 어린 생명의 따스한 체온에서 떨어지기 어려웠다. 이 고도의 어린 주인을 떼치고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바다 위에는 저녁 바람이 일어 성낸 물결은 바윗돌에 철썩철썩 부딪친다. 내 얼굴에는 찬 빗발이 뿌리고 백양목은 한층 처창한 소리를 내며 회색빛 하늘을 비질한다.
내가 그 집에서 나오자 어린애는 다시 울었다. 걸어오면서도, 배를 타면서도, 등 뒤에서 '응아, 응아' 하는 소리가 바람결을 따라 들렸다. 머리 위에서 날으는 물새의 우는 소리조차 그 어린애의 애처로운 울음소리인 듯.
‘그 어린애가 잘 자라는가?’
‘그들은 그저 그 섬 속에서 사는가?’
그 뒤로 나는 바람 부는 아침, 눈 오는 밤에 몇 번이나 베갯머리에서 이름도 모르는 그 어린 아이가 병 없이 자라기를 빌어 주었다.
그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언제까지나 내 귓바퀴를 돌며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로 1년이란 세월이 꿈결같이 흘렀다. 며칠 전에 나는 마을의 젊은 친구들과 함께 숭어 잡는 구경을 하려고 나갔다가 '가치내' 섬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 노파와 젊은 며느리는 전보다도 갑절이나 반가이 나를 맞아 주었다. 그들은 1년에 한두 번 사람 구경을 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인 듯......
그러나 어린애는 눈에 띄지 않는다.
“어린애 잘 자라우?”
하고 묻는데, 때 묻은 적삼 하나만 걸친 발가숭이가 토방으로 엉금엉금 기어나오지 않는가? 작년에 내가 대접을 받은 꽃게 발을 뜯어먹으며, 두 눈을 깜박깜박 하고 우리 일행을 쳐다본다.
“오오, 네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나는 그 어린애를 끌어안고 해변을 거닐었다. 어린애는 1년 동안에 몰라보도록 컸다. 오래 안아 주기가 힘이 들만치나 무거웠다.
그 날은 바다 위에 일점풍도 없었다. 성자의 임종과 같이 수평선 너머로 고요히 넘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나는 석조에 타는 붉은 물결을 머리 보며 느꼈다. 이 외로운 섬 속, 쓰러져가는 오막살이 속에서도 우리의 조그만 생명이 자라나고 있지 않은가? 그 어린 생명이 교목과 상록수와 같이 장성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이 쓸쓸한 우리의 등 뒤가 든든해지는 것같이 느껴지지 않는가!
◇ 심훈(沈熏, 1901~1936): 독립운동가. 소설가, 시인, 영화인. 농민계몽문학에서 이후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여는 데 크게 공헌한 작가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으며, 대표작은 소설 《상록수》, 《영원의 미소》,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그날이 오면 / 심훈(沈熏)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曺)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처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시집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 1949)
이번 3.1절 100주년 중앙기념식에서 윤봉길 의사의 종손 윤주빈이 심훈 선생의 ‘편지’를 낭독했다. 심훈이 옥중에서 어머니께 보낸 이 편지의 낭독은 애절한 음악이 더해져 듣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경성고보 3학년이었던 심훈은 학생신분으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3월 5일 덕수궁 앞 해명여관에서 체포되어 11월까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어머님! 오늘 아침에 고의적삼 차입해주신 것을 받고서야 제가 이곳에 와있는 것을 집에서도 아신 줄 알았습니다. 잠시도 엄마의 곁을 떠나지 않던 막내둥이의 생사를 한 달 동안이나 아득히 아실길 없으셨으니, 그동안에 오죽이나 애를 태우셨겠습니까?” 투옥되고서 상당 기간이 지나 그해 8월에서야 어머니께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하오나 저는 이곳까지 굴러오는 동안에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고생을 겪었지만 그래도 몸 성히 배포 유하게 큰 집에 와서 지냅니다. 고랑을 차고 용수를 썼을망정 난생 처음으로 자동차에다가 보호순사를 앉히고 거들먹거리며 남산 밑에서 무학재 밑까지 내려 긁는 맛이란 바로 개선문으로나 들어가는 듯하였습니다.” ‘개선문’은 서대문형무소 인근의 독립문으로 짐작된다.
“어머님! 제가 들어 있는 방은 28호실인데 성명 삼자도 떼어버려 2007호로만 행세합니다. 두 칸도 못되는 방속에 열아홉 명이나 비웃두름 엮이듯 했는데 그중에는 목사님도 있고 시골서 온 상투장이도 있구요. 우리 할아버지처럼 수염 잘난 천도교 도사도 계십니다. 그 밖에는 그날 함께 날뛰던 저의 동무들인데 제 나이가 제일 어려서 귀염을 받는답니다.” 수인번호 2007호 심훈은 생선두름 엮이듯 수감생활을 보낸다.
“어머님!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려쪼이고 주홍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서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가며 짓무른 살을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그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은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마음에 꾹꾹 눌러 이 낭독을 들었다면 이 대목에서 울컥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때마다 눈물겨워하지도 마십시오. 어머님이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 한 알만 마루 위에 떨어지면 흘금흘금 쳐다보고 다른 사람이 먹을세라 주워먹기 한 버릇이 되었습니다.” 자신은 평소에 삶은 콩을 좋아하니 콩밥을 먹는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는 내용이다.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위로하려는 심훈의 절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심훈의 편지는 이어 감방에서 순국한 천도교 도사(천도교 경성대교구장 장기렴)의 죽음과 날이 밝도록 그의 주검 곁을 지킨 이야기를 담고 있다. 편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오늘은 아침부터 창대같이 쏟아지는 비에 더위가 씻겨 내리고 높은 담 안에 시원한 바람이 휘돕니다. 병든 누에같이 늘어졌던 감방 속의 여러 사람도 하나 둘 생기가 나서 목침돌림 이야기에 꽃이 핍니다.“
”어머님! 며칠 동안이나 비밀히 적은 이 글월을 들키지 않고 내보낼 궁리를 하는 동안에 비는 어느덧 멈추고 날은 오늘도 저물어갑니다. 구름 걷힌 하늘을 우러러 어머니의 건강을 비올 때, 비 뒤의 신록은 담 밖에 더욱 아름다운 듯 먼 촌의 개구리 소리만 철창에 들리나이다.” 이상(以上)은 1919년 8월 29일 쓴 편지로 기록되어있다.
“어머님, 우리가 아무리 울부짖어도 독립이라는 크나큰 소원이 하루아침에 이뤄질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합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고초를 괴로워하고 하소연 해본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도 적혀있다. 약관의 나이임에도 심훈의 조국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은 이토록 절절했다. 이 편지를 쓰고 얼마 안 있어 집행유예로 풀려난 심훈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문학공부를 한다.
사실 심훈은 사진으로 보는 그의 이미지에서 짐작하듯이 1901년 노량진에서 양반 가문(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파평 윤씨)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비교적 포시라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의 두 형은 친일파라 할 수 있고, 1917년 나이 18세에 왕족인 전주 이씨 이해영과 혼인한다.
그의 인생에서 분수령이 된 사건은 당연히 3·1운동이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새로운 세계질서의 개편이 요청되던 시기에 상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의 존재와 김규식 박사가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각성하였던 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조국광복의 그날을 염원하면서 1930년 3월1일에 쓴 것으로 알려진 이 시(그날이 오면)는 ‘그날’이 찾아왔을 때 폭발하듯 터져 나올 격정과 환희를 절규의 목청으로 노래하고 있다. 처음 시를 대했을 때 지나칠 정도의 극한적 표현과 자기희생의 비장한 목소리에서 오히려 진정성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낭독된 ‘옥중편지’를 듣고서 그 의구심은 거두어들였다. 심훈 선생이 조국광복의‘그날’을 강인한 신념으로 갈구하였듯 이 시대에도 통일조국의 ‘그날’을 절규하며 염원할 젊은이들이 있을까. (글=권순진 시인)
/ 2021.11.19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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