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색(暮色) / 이영도
지극히 그리운 이를 생각할 때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돌 듯, 나는 모색(暮色) 앞에 설 때마다 그러한 감정에 젖어들게 된다. 사람들의 마음이 가장 순수해질 때는 아마도 모색과 같은 심색(心色)일는지 모른다.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같은 빛, 모색은 참회의 표정이요, 기도의 자세다.
하루 동안을 겪어낸 번잡한 과정 다음에 밀려드는 영육(靈肉)의 피로와 허황한 감회는 마치 한낮의 강렬했던 연소(燃燒)의 여운이 먼 멧등에 서리듯 외로움이 감겨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유명한 화가 밀레도 한 가족의 경건한 기도의 모습을 모색 앞에 세우고 그림의 제목을 《만종(晩鐘)》이라 붙였는지 모른다.
황혼이 기울 무렵, 산 그림자 내리는 들녘에 서면 슬프디 슬픈 보랏빛 향수에 싸여 신의 음성은 사랑하라고만 들려오고, 원수 같은 것, 미움 같은 것에 멍든 자국마저 밀물에 모래알 가셔지듯 곱게 씻겨 가는 빛깔..... 어쩌면 내 인생의 고달픈 종언(終焉)도 이같이 고울 수 있을 것만 같아진다.
가끔 나는 해질 무렵에 경복궁 뒷담을 끼고 효자동 종점까지 혼자 거닐 때가 있다. 이 거리에 석양이 내릴 때 가로수에 서리는 빛깔을 보기 위해서다.
봄, 여름은 너울거리는 푸르름이 마음을 축여 주어 조용한 생기를 얻을 수 있지만 만추(晩秋)에서 초봄까지의 낙목(落木)일 경우엔 말 할 수 없는 눈물겨운 빛이 된다.
가물가물 일직선으로 열 지은 나목(裸木)들이 암회색 높은 궁창을 배경하고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에 비춰 선 정취는 바로 그윽이 여울져 내리는 거문고의 음률이다.
이 음색에 취하며 혼자 걷노라면 내 마음은 고운 고독에 법열(法悅)이 느껴지고 어쩌면 이 길이 서역 만 리, 그보다 더 먼 영겁(永劫)과 통한 것 같은 아득함에 젖어진다.
그 무수히 소용돌이치던 역사의 핏자국도 젊은 포효도 창연히 연륜 위에 감기는 애상일 뿐, 그날에 절박하던 목숨의 생채기마저 사위어져 가는 낙조처럼 아물어드는 손길! 모색은 진정 나의 영혼에 슬픔과 정화(淨化)를 주고 그리움과 사랑을 배게 하고 겸허히 가르치고, 철학과 종교와 체념과, 또 내일에의 새로움과 아름다움과...... 일체의 뜻과 말씀을 있게 하는 가멸음(富)의 빛이 아닐 수 없다.
모색 앞에 서면 나는 언제나 그윽한 거문고의 음률 같은 애상에 마음의 우울을 씻는 것이다.
◇ 이영도(1916~1976): 여류시조시인. 경북 청도 출생. 1945년 대구의 동인지 《죽순(竹筍)》에 시조 《제야(除夜)》를 발표하여 등단했다. 부산 남성여고와 마산 성지여고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부산여자대학(지금의 신라대학교)에도 출강했다. 1954년 첫 시조집 《청저집(靑苧集)》 출간, 1968년 오빠 이호우(李鎬雨)와의 공동시조집인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중의 1권인 《석류(石榴)》를 출간하였다. 그 밖에 수필집으로 《춘근집(春芹集)》 《비둘기 내리는 뜨락》 《머나먼 사념(思念)의 길목》 등이 있다.
/ 2021.11.19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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