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묵화의 행복론 / 신일철(申一澈)
달콤한 사탕을 먹던 입으로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심심하고 밍밍한 것이 영 맛이 없다. 사람의 미각은 달거나 맵고 짠 양념이 너무 강하면 음식의 제 맛을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향신료(음식물에 맵거나 향기로운 맛을 더하는 조미료)의 강한 맛이 우리의 혀를 마비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진한 양념으로 둔감해진 입맛으로는 음식의 감칠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인생의 맛도 행복감도 이와 같다.
오늘날의 야단스러운 산업 문명 속에서 살다 보면 눈에 보이는 색깔들은 너무 강렬하고 현란스럽고, 귀에 들리는 음향도 고막이 찢어질 듯한 고음이라서, 그 속에서 농도 짙은 쾌감만 좇다 보면 섬세한 감각은 모두 잃고 만다. 항생제도 그 단위가 높고 강력한 것을 쓰다 보면 그보다 낮은 것은 전혀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점점 더 단위를 높여가지 않으면 효력을 볼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강력한 쾌락에 탐닉(어떤 것을 몹시 즐겨서 거기에 빠짐)하게 된 현대인들은 즐거움도 행복도 좀처럼 느낄 수 없는 돌덩어리가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옛 시인들은 매일같이 뜨고 지는 달을 바라보고도 그 숱한 시상(詩想)(시를 짓기 위한 생각이나 상념)을 얻을 수 있었고, 예사로이 떨어지는 낙엽 소리에서 대자연의 리듬을 간취(보아서 내용을 알아차림)하였으며, 어디서나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베토벤의 교향곡보다 더 위대한 자연의 음악으로 감상할 수 있는 섬세한 귀를 가지고 있었다. 오늘의 우리들은 그래서 옛 사람보다 불행하다.
알베르 카뮈는 '인생은 부조리(不條理)(철학 용어로서, 인생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희망이 없는 절망적 상황을 가리키는 말)'라고 전제했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그러나 인생을 살지 않을 수 없다. 살면서도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부조리가 인생을 지루하고 따분한 권태의 연속으로 만드는 것이다. 산다는 것이 그저 시시하고 따분할 때가 정말로 많다. 월요일이 지나면 화요일, 그리고 수·목·금·토·일요일이 오고 다음에 또다시 월요일이 온다. 인생의 부조리에 대해서 카뮈는, 인생은 월·화·수·목·금·토·일, 월·화·수·목·금·토·일이라고 표현했다. 무의미한 요일의 명칭들이 돌고 도는 것과 같이 이처럼 의미 없는 지루한 삶의 쳇바퀴가 돌고 돈다. 무언가 신나는 일이 없을까, 화끈하게 재미가 쏟아지는 일이 없을까. 의미 있는 삶을 잃은 현대인들은 이 끈끈한 권태감을 잊게 해 줄 자극적인 흥분을 찾게 된다.
사람들은 대개 권태의 반대가 자극적인 흥분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권태감을 쫓기 위해 흥분과 쾌락을 찾는다. 생활이 지루하고 허전해지면 어디서든 짜릿한 흥분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술을 마시기도 하고 허리가 무너져라 디스코를 추어도 보고 거금을 거는 도박판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심심증은 우리를 강력한 자극적 흥분에로 유혹한다. 그래서 심심증을 다스릴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그 노예가 되어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자신을 구해낼 힘이 없는 것이다.
러셀이란 철학자는 미국의 교육을 돌아보고 나서, 지루한 공부 시간을 오래 참아내는 훈련을 시키지 않는 점이 틀렸다고 비판했다. 별로 재미가 없는 것 같은 학습에서도 잔잔한 지적(知的) 만족감을 느끼며 도서관에서 10여 시간을 꼼짝도 않고 참아내는 학생을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행복론도 강력한 자극적 쾌락에 중독된 흥분 중독자는 불행하다는 충고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현대인을 불행케 하는 요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우리의 눈을 너무 즐겁게 해주고 귀를 너무 자극하는 텔레비전 등의 오락 문화일 것이다. 화사한 쾌락에 탐닉하다 보면 그것이 끝난 뒤의 허전함과 따분함이 더욱 강해진다. 이것이 이른바 쾌락주의의 패러독스(모순)다. 너무 쾌감만 좇다 보면 불쾌감만 더 얻게 되는 이런 부조리의 굴레 속에 현대인들은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의 생활 문화는 온통 우리 안에 잠자고 있던 욕망을 깨워내어 무엇에나 강한 욕구를 느끼게 만들고 또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데서 오는 욕구 불만에 시달리게 한다. 텔레비전의 화려한 장면들은 수많은 아내들의 욕구 불만을 선동하여 남편을 부정 부패의 도박판으로 내몬다. 세일즈맨은 단 20분 간의 대화로 소비자가 처음에는 전혀 필요없다고 생각한 상품을 꼭 필요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앞으로 10개월동안 빚에 시달리게 할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한다. 잠자던 욕구를 부채질하여 4천만 국민을 쉽사리 장기 채무자로 만들 수 있는 희한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꼭 필요해서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행위에서 찰나적 쾌락을 얻기 위해 쇼핑을 하게 된다. 현대인은 온갖 행복을 다 잃고 그 대신 쇼핑의 사이비 행복감에 목마른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크레디트 카드는 현금 없이도 쇼핑을 즐길 수 있는 간편함의 대가로 과잉 구매의 큰 짐을 지워 주는 유혹자로 돌변하기도 한다.
세상에는 욕구 불만을 해소시킬 수 있다는 새로운 물건들이 끊임없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병 주고 약 주는 격이라서, 소비자에게 만족을 준다는 물건들이 범람(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이 크게 나돎)하고 있어도 욕구 충족의 상태는 좀체로 얻어지지 않는다. 이런 메커니즘 (어떤 사물의 작용 원리나 구조)속에서는 욕구 충족 자체가 언제나 임시적인 가짜의 만족이기 때문에, 조만간 더 큰 욕구 불만이 고개를 들어 더욱 단위가 높은 욕구 해소제가 등장하게 되고, 결국 소비자는 중독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스타는 높은 인기를 얻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대개는 잘못된 생각이다. 많은 스타들이 인기에 중독된 나머지 열광적인 인기가 계속되지 않으면 불행하게 느끼고, 또 보다 높은 인기에 대한 욕구 불만에 시달리다 보면 편안할 날이 없게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불만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그들이다. 물론 마약 중독과 같이 권력에도 중독증이 있어서 높은 자리를 즐기다 보면 그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여 불명예스러운 결과를 초래하는 이도 허다하다.
이렇게 해서 보다 강력하고 짜릿한 욕구에 목마른 자기와 진정한 자기와의 격차가 커진다. 그 격차가 더욱 심해지면 진정한 자기는 따분하고 너절한 것 같고 차라리 버리고 싶은 귀찮은 존재가 된다. 신기루 같이 자기를 기만해서 만든 과대 망상의 산물이 나 자신 속에서 진정한 나를 억압하고 나 자신을 잃은 상태에까지 몰아넣는다. 사이비 신(神)을 모시다가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 광적인 유사 종교의 맹신자처럼 현대인은 거짓 욕구의 과잉 개발에 시달리며 거짓된 자기를 좇다가 진정한 자기를 살지 목하는 비극의 굴레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기를 찾아 헤매는 더욱 벅찬 인생 수양이 현대인에게는 더욱 절실해진다.
나는 그림은 잘 모른다. 산수화나 수묵화 같은 동양화의 감식안(사물의 가치나 진위를 볼 줄 아는 눈)을 갖추지 못한 나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처지다. 그러나 어느 전시회에서, 검은색 하나만을 써서 그린 수묵화 앞에 섰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현란한 칼라 텔레비전으로 오염된 나의 시각에 아직 마비되지 않은 신경 오라기가 몇 줄 남아 있었을까. 검정색 하나의 그 그림에는 기운이 넘치고 5색, 7색의 찬란한 채색화를 능가(무엇에 비교하여 그보다 훨씬 뛰어남)하는 그 무엇이 있음을 발견했다. 매화도 먹으로 그리고, 일필휘지(단숨에 흥취 있고 줄기차게 글씨를 써 내림)로 힘차게 뻗은 난초 잎도 모두 검은색으로써 그 농담(濃淡)(짙고 옅음)의 기미와 상징 기호 같은 준법( 法)(동양이 산수화에서 산의 모양, 암석 따위의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쓰이는 기법)으로 유감없이 그려내고 있었다. 밖으로 나대는(까불거리고 나다니는) 외화(外華)(겉모양이 화려한 차림새)에 인색해서인지, 그런 이의 가슴속 깊은 곳의 마음의 여운이 은근하게 옮아온다. 자극성 있는 흥분 같은 야비한 것이 아니라 가슴속 깊은 곳에서 잔잔한 법열(法悅)(깊은 이치를 깨달았을 때 마음에 사무치는 기쁨)을 일으키는 귀한 감동이 있다.
오래 잊었던 잔잔한 호수의 거울같이 평정(平靜)(평안하고 고요함)한 행복감이 수묵화에서 나에게 다가온다. 병든 현대인에게는 고요한 마음으로 참다운 자기를 되찾게 해주는 수묵화의 행복론이 인생의 내면을 살찌게 해주는 보약이 되지 않을까.
글=신일철(申一澈, 1931~2006년) 철학자, 대학교수
◇ 작품 해설
이 글은 인간의 행복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지은이는 진한 양념으로 둔감해진 입맛으로 음식의 감칠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농도 짙은 쾌감만 좇다 보면 인생에 대한 행복감 또한 느낄 수 없음을 설파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강력한 쾌락에 탐닉하게 된 현대인들은 즐거움도 행복도 좀처럼 느낄 수 없는 '돌덩어리'가 되어가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의미 있는 삶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이 인생의 권태감을 잊게 해 줄 자극적인 흥분을 계속적으로 찾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현대인들은 '쾌락주의의 패러독스(역설)'에 빠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텔레비전 등의 오락 문화와, 물건을 사는 행위에서 찰나적 쾌락을 얻기 위해 쇼핑을 하게 되는 것 등은 화사한 쾌락에 탐닉한 뒤에 느끼게 되는 허전함과 따분함, 그리고 그로 인한 보다 강한 자극의 요구라는 쾌락주의의 패러독스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메커니즘 속에서는 욕구 충족 자체가 언제나 임시적인 가짜의 만족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일종의 중독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쾌락주의의 패러독스가 현대인들에게 주는 악영향은 바로 강력하고 짜릿한 욕구에 목마른 자기와 진정한 자기와의 격차를 크게 함에 있다는 점을 지은이는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즉 신기루같이 자기를 기만해서 만든 과대 망상의 산물이 나 자신 속에서 진정한 나를 억압하고, 나 자신을 잃은 상태에까지 몰아넣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를 찾아 헤매는 인생 수양이 절실하게 요구되는데, 지은이는 이러한 수양을 '수묵화'의 세계에서 찾는다. 지은이에게 있어서 수묵화는 그 농담(濃淡)의 기미와 상징기호 같은 준법을 유감없이 그려내는 것으로, 채색화와도 같은 세계에 자꾸 병들어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잔잔한 법열(法悅), 혹은 깨달음을 일으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에 병든 현대인들은 고요한 마음으로 참다운 자기를 되찾게 해주는 수묵화의 행복론에 매진하여야 할 것이다.
이 글의 문체는 간결하면서도 성실한 자세가 돋보인다. 특히 현대인들에게 자기 수양을 위한 노력이 요구된다는 사회적 차원의 주제를 쉬우면서도 적절한 비유와 인용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 2021.11.16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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