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구두' 계용묵(桂鎔默) (2021.11.16)

푸레택 2021. 11. 16. 08:50

■ 구두 / 계용묵(桂鎔默)

구두 수선(修繕)을 주었더니, 뒤축에다가 어지간히도 큰 징을 한 개씩 박아 놓았다. 보기가 흉해서 빼어버리라고 하였더니, 그런 징이래야 한동안 신게 되고, 무엇이 어쩌구 하며 수다를 피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그대로 신기는 신었으나, 점잖지 못하게 저벅저벅, 그 징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심히 귓맛에 역(逆)했다. 더욱이, 시멘트 포도(鋪道)(포장한 길)의 딴딴한 바닥에 부딪쳐 낼 때의 그 음향(音響)이란 정말 질색이었다. 또그닥 또그닥, 이건 흡사 사람이 아닌 말발굽 소리다.

어느 날 초어스름이었다. 좀 바쁜 일이 있어 창경원(昌慶苑) 곁담을 끼고 걸어 내려오노라니까, 앞에서 걸어가던 이십 내외의 어떤 한 젊은 여자가 이 이상히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에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또그닥 소리의 주인공을 물색하고 나더니, 별안간 걸음이 빨라진다.

그러는 걸 나는 그저 그러는가 보다 하고, 내가 걸어야 할 길만 그대로 걷고 있었더니, 얼마쯤 가다가 이 여자는 또 뒤를 한 번 힐끗 돌아다본다. 그리고 자기와 나와의 거리가 불과 지척(咫尺)임을 알고는 빨라지는 걸음이 보통이 아니었다. 뛰다 싶은 걸음으로 치맛귀가 옹이하게 내닫는다. 나의 그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는 분명 자기를 위협하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따악딱 땅바닥을 박아내며 걷는 줄로만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여자더러 내 구두 소리는 그건 자연(自然)이요, 인위(人爲)가 아니니 안심하라고 일러 드릴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나는 그 순간 좀 더 걸음을 빨리하여 이 여자를 뒤로 떨어뜨림으로 공포(恐怖)에의 안심을 주려고 한층 더 걸음에 박차를 가했더니, 그럴 게 아니었다. 도리어 이것이 이 여자로 하여금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내 구두 소리가 또그닥 또그닥, 좀 더 재어지자 이에 호응하여 또각또각, 굽 높은 뒤축이 어쩔 바를 모르고 걸음과 싸우며 유난히도 몸을 일어 내는 분주함이란, 있는 마력(馬力)은 다 내보는 동작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한참 석양 놀이 내려비치기 시작하는 인적 드문 포도(鋪道) 위에서 또그닥또그닥, 또각또각 하는 이 두 음향의 속 모르는 싸움은 자못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의 뒤를 거의 다 따랐던 것이다. 2, 3보(步)만 더 내어디디면 앞으로 나서게 될 그럴 계제였다. 그러나 이 여자 역시 힘을 다하는 걸음이었다. 그 2, 3보라는 것도 그리 용이히 따라지지 않았다. 한참 내 발뿌리에도 풍진(風塵)(바람에 날리는 티끌)이 일었는데, 거기서 이 여자는 뚫어진 옆골목으로 살짝 빠져 들어선다. 다행한 일이었다. 한숨이 나간다. 이 여자도 한숨이 나갔을 것이다. 기웃해 보니, 기다랗고 내뚫린 골목으로 이 여자는 횡하니 내닫는다. 이 골목 안이 저의 집인지, 혹은 나를 피하느라고 빠져 들어갔는지 그것을 알 바 없었으나, 나로선 이 여자가 나를 불량배(不良輩)로 영원히 알고 있을 것임이 서글픈 일이다.

여자는 왜 그리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자를 대하자면 남자는 구두 소리에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가져야 점잖다는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라면, 이건 이성(異性)에 한 모욕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다음으로 그 구두징을 뽑아버렸거니와 살아가노라면 별(別)한 데다가 다 신경을 써 가며 살아야 되는 것이 사람임을 알았다. (1949년 作)

계용묵(桂鎔默, 1904~1961): 소설가. 세련된 언어로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다룬 소설을 발표했다. 대표작으로 「백치 아다다」가 있다.

[핵심 정리]


갈래: 경수필, 희곡적 수필
문체: 간결체, 건조체
주제: 세심한 일에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세상사의 어려움
특징: 사소한 일상의 경험담으로 깨달음의 즐거움을 주고 있다. 간결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문체를 사용하여 흥미를 더하고 있다. 사건 서술 과정이 소설적인 극적 구성. 사건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적절한 의성어 사용하고 있다. 창경원 곁담을 끼고 돌며 일어난 사건의 근본적인 갈등. 나와 그 여인과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 극적인 구성을 하고 있으면서 수필로 볼 수 있는 이유. 결말에 작가의 견해가 뚜렷이 드러나 있음.

[이해와 감상]

한편의 재미 있는 꽁트를 대하는 느낌이다. 지금은 구두에 징을 박는 일 따위는 없어져버렸지만 예전에는 구두를 조금이라도 오래 신기 위해 쇠로 된 징을 뒷굽에다 박았던 모양이다. 먼저 살고 간 사람의 글을 읽는 재미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던지를 살피는 것도 의미있지만, 당시의 풍속이나 생활양식을 엿보는 묘미 또한 크다.

구두는 1949년에 발표된 글이다. 구두 수선공이 박아준 징소리로 인해 빚어지는 이야기가 실감나게,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우리의 삶에는 이런 자잘한 오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오해 때문에 작품 속의 젊은 여자처럼 쓸데없는 긴장과 정신소모를 겪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짧고 우스운 이야기 속에 작자는 우습지만은 않은 인간의 허약한 한계와 사람 사이의 절망을 슬쩍 끼워 넣는다. 사람 아닌 말발굽 소리를 내는, 징이라는 비인간적인 요소에 그는 반발한다.

이 글의 문체는 간결하다. 그래서 속도감이 있다. 쉽게 읽힌다. 허구로 꾸며진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생활의 묘미와 의미를 깨닫게 하고 뒷맛에 깊은 여운을 준다.

또그닥또그닥, 또각또각하는 둘의 구두소리의 의성어는 고조된 긴장을 적절히 표현해주고 글의 맛을 더해주며 치맛귀가 옹이하게, 있는 마력을 다 내보는, 내 발뿌리에도 풍진이 일었는데 같은 묘사도 글의 흥을 돋운다. 입귀에 연신 웃음을 머금게 하는 표현이면서, ..... 되는 것이 사람임을 알았다가 담고 있는 여운은 그 웃음에 깊이를 보태준다.

/ 2021.11.16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