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모송론(母頌論)' 김진섭(金晋燮) (2021.11.16)

푸레택 2021. 11. 16. 07:52

■ 모송론(母頌論) / 김진섭(金晋燮)

  인생(人生)이 너무나 불행한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어머니를 모실 수 있다는 점만은 행복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 생(生)을 받은 우리의 찬송(讚頌)은,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첫째 우리들의 어머니 위에 지향(志向)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려서 이미 어머니를 잃고, 클수록 커지는 동경(憧憬)의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아들의 신세가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는 큰 불행이라면, 어려서는 어머니의 품안에 안기고 커서는 어머니의 덕을 받들어 모자(母子)가 한 가지로 늙는 사람의 팔자(八字)는 이 세상에서는 다시 구할 수 없는 큰 행복일 것입니다. 아니지요. 이러한 구구한 경우를 떠나서도 모든 사람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다는 단순한 사실, 그것이 벌써 한없이 행복스러운 일입니다.

  생각만이라도 해 보십시오. 만일에 어머니라 하는 이 아름답고 친절한 종족이 없다면, 대체 이 세상은 어떻게나 되어 갈까요? 이 괴로운 세상을 찬란하게까지 장식하고 있는 모든 감정, 가령 말하자면 저 망아적(忘我的) 애정, 저 심각한 자비(慈悲), 저 최대한의 동정, 끝이 없이 긴밀한 연민(憐憫) 저 절대한 관념(觀念) - 이 모든 것은 이곳에서 사라져 버리고야 말 터이지요.

  그리하여 이때, 이 세상이 돌연히 한없이도 어두워지고 우울해지고 고달파질 터이지요, 참으로 어머니와 아들의 결합과 같이 힘차며, 순수하며, 또 신비로운 결합은 어떠한 인간 관계 속에서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고향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새로 생긴 자에 대해 그에게 영양을 제공하고, 그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어머니야말로 참된 향토(鄕土)가 아닐까요? 어린아이 만 아니라 성장하여가는 아동에 있어서도 어머니는 영원히 그들의 괴로워할 때의 좋은 피난소이며, 그들의 즐거워할 때의 좋은 동감자(同感者)입니다.

  어린아이가 어찌하여야 할 바를 모를 때, 그는 반드시 어머니를 향해 웁니다. 아프고 괴로워 위안이 필요할 때, 그는 바삐 어머니의 무릎 위로 기어갑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신뢰는 참으로 한이 없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도움이 있을 것을, 어머니에게는 도움이 있을 것을, 어머니에게는 귀의심(歸依心)이 있고 이해력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입니다. 사실에 있어서 어머니의 손이 한 번 가기만 하면 모든 장애물은 가벼웁게 무너지고, 모든 것은 좋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인(成人)의 어머니에게 대한 신빙(信憑)이 이에 못할 수 없겠지요.

  어머니가 생존하여 계시는 동안 우리에게는 고요히 웃는 마음의 고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외로울 수 없으며, 우리는 결코 어두움 속에 살 수 없습니다.

  참으로 어머니는 저 하늘에 빛나는 맑은 별과 같이도 순수합니다. 그것이 무엇이 이상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어머니 피로부터, 어머니 정신으로부터, 어머니의 진통으로부터 나온 까닭입니다. 어머니는 우리의 뿌리인 것입니다. 어머니는 인간의 참된 조국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자기 나라말을 가르치고 모어(母語)라 부르는 것은, 이 점에 있어서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아이는 어머니에게서 도덕과 지식 일반의 최초의 개념, 저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지극히도 자극적인 노래와 유희(遊戱)를 처음 배우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결합에 있어서 어머니와 아들의 사이와 같은 그렇게도 긴밀한 인간적 결합은 실로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여기에 있어서 곧 아버지의 엄연한 존재를 생각할 터이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집 안에 앉아 계시기보다는 집 밖에 많이 나가 계십니다. 아버지라는 이들은 흔히 어머니 가까이 있어 한 가지 아이를 애무하기에는 너무나 바쁜 몸입니다. 그는 가정 밖에 직업을 가지고 있고, 또 밖에 나서서 사업을 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이에게 사랑할 인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존경할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암만 친절한 아버지라도 아이들은 거의 예민한 식별력(識別力)으로 아버지를 어머니같이 만만하게는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어머니가 ‘친밀(親密)의 원리’를 가지고 항상 아이들을 양육하는 입장에 서 있는 데 대해서, 아버지는 ‘엄격(嚴格)의 원리’에 사는 하나의 교훈적 존재인 까닭이겠지요.

  커 가는 아이가 사랑하는 어머니를 떨어져 자기의 길을 자기 홀로 걸어가려 할 때,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이때, 반드시 퍽이나 괴로운 시간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의 디디는 발은 처음엔 위태로워 보이고 무색(撫索)하는 듯이 보이지마는, 그러나 나중에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일정한 목적을 향하여 용감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에는 언제든지 아들이란 그가, 얼마나 나이를 먹었어도 결국 어린아이로서밖에는 비치지 않는 까닭으로, 어머니는 이때 적지 않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머니 없이는 한시를 살 수 없는 것 같은 아이가, 이제는 어머니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무용(無用)의 장물(長物)로서까지 여김를 받을 때, 즉 이제까지는 말하자면 어머니의 일부분이던 아이가 나중에는 어머니를 완전히 떨어져 자기 혼자서 생활을 꾀할 때, 어머니 되는 사람의 근심과 슬픔은 비할 곳 없이 크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나 나이 젊은 아들이 택할 길과, 어머니가 그네들의 사랑하는 아들을 위하여 꿈꾸고 있는 길이 전혀 다를 때, 어머니의 실망이 일시에 커져 갈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여기 모자간에 서로 다리를 걸 수 없는 한 개의 큰 분열은 생기고야 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어머니와 사랑하는 아들 사이에 피할 수 없는 하나의 두터운 소원(疏遠)이 일어나고야 마는 수도, 물론 이 넓은 세상에는 드물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이겠지요. 어머니는 자기와 그리고 자기 견해에 아들을 복종시키려고 만반의 책(策)을 강구하여 봅니다. 그러나 대개 이 방법은 수포로 돌아가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때, 어머니는 고적(孤寂)을 느끼고, 냉대(冷待)를 느끼고, 모욕(侮辱)을 느낄 터이지요. 왜 그러냐 하면 원래 성장의 시기에 있는 아이들이란 은덕(恩德)을 알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들은 자기네의 길만 이기적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그들의 이기주의를 어찌 나쁘다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이기주의는 모든 새로운 시대가 자기 자신의 독특한 이상(理想)을 가지는 데 유래하여 있는 까닭이올시다. 즉 하나의 새로운 시대에 속하고 있는 이 젊은이들은, 청년의 의기(意氣)를 가지고 그들 자신의 이상을 실시하여 함에 문제는 그치는 것입니다.

  시대와 시대 사이에는 항상 격렬한 투쟁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다를 때마다 싸움은 새로운 것입니다. 이들은 이리하여 어머니의 영향을 철두철미(徹頭徹尾) 물리치고 드디어 이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인격이 강하면 강할수록 아들의 반항은 크고, 아들의 태도는 적의를 품은 듯이 보이는 것입니다. 어려서는 어머니의 치마를 밟는 것이지마는, 커서는 어머니의 가슴속을 박차는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현명한 아들들의 큰 비애에 틀림없습니다만 애정과 정의와는 스스로 별자(別者)인 것을 사람은 인정하여야 되겠지요.

  그러나 아들의 발에 아무리 짓밟힌 어머니도, 어머니는 결코 그네들의 아들을 버림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참으로 이른바 인생의 황야를 잘못 방황하고 있는 많은 무리가 있습니다. 어떠한 자는 악한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자는 도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자는 모반자(謀反者)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자는 범인(犯人)이 되고, 어떠한 자는 살인수(殺人囚)가 될 수도 있겠지요. 이때, 이렇게 까지 된 아들에 대한 어머니 심중(心中)은 어떻겠습니까? 최후의 한 사람까지도 이  범죄자를 벌써 용서하여 주지 않을 때라도 어머니만은 그를 용서하여 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타락자에 대해 넘칠 듯한 증오와 기피(忌避)의 정을 보낼 때라도 어머니의 사랑만은 실로 부동(不動)입니다.

  어머니는 오직 아들의 심사를 이해하려 할 따름입니다. 참으로 어머니의 마음같이 이같이도 감동적인, 이같이도 숭배에 값할 것은 없겠지요. 참으로 어머니의 마음같이 이같이도 그 움직일 수 없는 암석연(岩石然)한 물건도 이 세상에는 없겠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속 깊이는, 설사 그가 퍽은 흉맹(凶猛)한 자라 할지라도, 어머니에 대한 신앙(信仰)만은 끊어짐이 없이 존속되어 있습니다. 저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신앙, 저 어머니의 한도 없는 연민에 대한 불요불굴(不搖不屈)의 신앙이 말이지요

  보십시오. 가령, 교살(矯殺) 대상의 사형수는 그의 목 위로 도끼가 떨어지기 직전에 과연 누구를 찾아 부르짖습니까? 물론 그것은 어머니올시다. 보십시오. 가령, 전지에 죽어 넘어지는 청년은 구원을 비는 최후의 비장한 규환(叫喚)을 누구에게 향하여 발하는 겁니까? 물론, 그것은 어머니올시다. 최후의 고민과 최후의 절망에 있어서 사람은 될수록 그들의 낯을 어머니에 향해 돌리려 합니다. 그들이 어렸을 때에 하던 그 모양으로 말이지요. 어떠한 다른 수단으로써는 벌써 구제할 수 없는  경우에라도, 어머니는 일개 신성(神性)의 자격을 가지고, 오히려 또한 아들의 최후를 건지는 수가 있는 까닭이올시다.

  운명의 손에 이미 버림을 받은 몸이지만, 아들에 대한 무한애(無限愛)의 전능적 역한(力限)에 의하여 어머니는 아들의 천명(天命)을 다시 한 번 연장시킬 수도 없지 않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타오르는 심장의 불꽃이 역시 운명의 매를 막을 수 없을 때엔 모든 희망은 간 것입니다. 여기 결국 최후의 공포는 슬픔에 찬 밤에 싸여 오고야 맙니다.

  세상의 많은 어머니시여! 당신네들은 이미 우리가 당신네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버린 줄 알고 계시겠지요만, 우리들 마음속 깊이는, 그러나 아직도 오히려 말살할 수 없는 세력을 가지고 당신에게 얽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여성(女性)은, 그들이 사람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점에 있어서 참으로 이 위에도 없이 신성(神聖)한 존재입니다.

◇ 이해와 감상

  이 글은 1947년에 수필집 《인생 예찬》에 실린 수필로 어머니의 모성애(母性愛)를 찬송한 글이다. 누구에게나 어머니가 있지만, 공기나 물처럼 그 존재를 잊고 사는 어머니의 위대성을 일깨워 주는 논설적인 중수필이다. 심오한 철학을 온화하고 부드러운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생에 있어서 어머니가 계심은 큰 행복이다. 전체 요지는 '어머니의 망아적 애정, 심각한 자비, 최대한의 동정, 끝이 없는 긴밀한 연민 등이 모성의 특질이 된다. 어머니의 절대적 사랑으로 인한 모자관계의 결속은 끊임없으며 모성은 항상 신성하게 유지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표현상의 특징은 경어체를 사용하고 있으며, 독자에 대한 권면을 전체로 한 강연문과 같은 유사한 느낌을 준다. 대조와 비유법이 많이 사용된 것도 이 글의 특색이다. 여기에 인용한 부분은 글의 서두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글의 주된 요지가 천명된다. 즉 어머니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행복감과 그러한 어머니에 대한 찬송이 있어야 할 기본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문장의 구성은 `불행`, `행복` 대립에 의한 대조의 논리를 주된 축으로 해서 전개되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어머니가 있지만 공기나 물처럼 그 존재에 대해서 잊고 사는 어머니의 위대함을 일깨워 주는 작품이다. 작자는, 인생은 너무나 불행하지만 모든 사람이 어머니를 모실 수 있다는 점은 행복한 일이라고 말한다. 모자(母子)가 같이 늙어 간다는 것 또한 이 세상에서 다시 구할 수 없는 큰 행복이라고 하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어머니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가를 '망아적 애정, 심각한 자비, 최대한 동정, 긴밀한 연마, 절대한 관념'의 다섯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곧 '자신을 잊을 만큼 타인을 사랑하고, 깊은 경지에 이르는 자비심과,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마음의 동정심과 아주 가깝게 생각되는 애틋한 마음,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생각과 사상이다.

  이 수필은 다분히 논리적인 중수필이다. 심오한 철학을 부드러운 문장으로 표현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진한 감동과 진솔한 각성을 하게 한다.

  김진섭은 한국 현대 수필을 개척하였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은 생활에 뿌리내린 문학으로, 김진섭은 그의 생활에 대한 관찰, 사색과 철학적인 부분을 수필에 잘 담아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를 거친 후 그는 수필을 썼다. 그래서 김진섭에 와서 우리 나라의 수필, 현대 수필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는 시종일관 생활을 사랑하는 사색적 수필을 썼는데 그의 문장은 호흡이 긴 만연체의 특징이 있다.

◇ 김진섭(金晋燮, 1903~?)

  수필가. 독문학자. 호 청천(聽川). 경북 안동(安東) 출생. 일본 호세이(法政) 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외국문학연구회’, ‘극예술연구회’의 동인으로 세칭 ‘해외문학파(海外文學派)’의 한 사람이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장, 성균관대학교 교수, 《서울신문사》출판국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그의 수필은 생활인의 철학을 재치 있게 표현하면서, 깊이 있는 생활 관찰과 인생에 대한 사색을 꾸밈없는 소박한 문체로 엮어낸 것이 특징이며, 그는 한국 수필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공로자로 평가받고 있다. 주요 저서로 수필집 《인생 예찬》, 《생활인의 철학》과 논문집 《교양의 문학》이 있고, 1958년 유작 40편이 수록된 《청천수필평론집(廳川隨筆評論集》이 출간되었다.

/ 2021.11.16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