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리의 악사 / 박경리(朴景利)
작년과 금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제일 인상에 남는 것은 거리의 악사(樂士)다.
전주(全州)에 갔을 때, 아코디언을 켜고 북을 치면서 약(藥) 광고를 하고 다니는 풍경에 마음이 끌렸고, 작년 가을 대구(大邱)에 갔을 때, 잡화(雜貨)를 가득 실은 수레 위에 구식(舊式) 축음기(蓄音機)를 올려놓고 묵은 유행가(流行歌) 판을 돌리며 길모퉁이로 지나가는 행상(行商)의 모습이 하도 시적(詩的)이어서 작품에서 써먹은 일이 있지만, 역시 작년 여름, 진주(晋州)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 때는 새로 착수한 작품을 위해 자료 수집과 초고(草稿)를 만들기 위해 여행을 떠났었다. 일 없이 갔었으면 참 재미나고 마음 편한 혼자 여행일 테지만 일을 잔뜩 안고 와서, 그것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하루하루 날만 잡아 먹는다고 초조히 생각하다가 답답하면 지갑 하나, 손수건 하나 들고 시장길을 헤매고 낯선 다방(茶房)에 가서 차(茶)를 마시곤 했었다. 그래도 늘 일이 생각 속에 맴돌아 뭣에 쫓기는 듯 휴식(休息)이 되지 않는다.
어느 날 아침, 조반(朝飯)도 하기 전에 나는 밀짚모자를 들고 여관 밖으로 나왔다. 서울서 내려간 듯 낡은 합승(合乘), 혼자 빌리면 택시가 되는―주차장으로 가서 차 한 대를 빌려 가매못으로 가자고 했다. 운전사는 아침 안개도 걷히기 전에 밀짚모자 든 여자가 가매못으로 가자 하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지 좀 떨떠름해 하다가 차를 내몰았다.
옛날 학교 시절에 몇 번 가 본 일이 있는 가매못 앞에서 두 시간 후에 나를 데리러 오라 알려 주고, 나는 천천히 가매못 옆에 있는 농가 길을 따라 저만큼 보이는 언덕 위에 나란히 두 개 있는 무덤을 향해 걸어갔다. 어떻게 길을 잘못 들어 가파로운 벼랑을 기어 올라 무덤에 이르렀을 때, 아침 안개는 다 걷혀지고 가매못 너머 넓은 수전 지대(水田地帶)와 남강(南江) 너머 댓숲이 바라보였다. 그리고 아침 햇볕이 뿌옇게, 마치 비눗물처럼 번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우두커니 혼자 앉아서 허겁지겁 달려 온 자기 자신의 변덕을 웃으며, 그러면서도 작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마 동안을 그러고 앉았다가 뒤통수를 치는 듯한 고독감(孤獨感)에 나는 쫓기듯 산에서 내려오고 논둑길을 걸어오는데,
“장판 사려어―”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바로 앞에 장판지를 말아서 짊어진 할머니가 다시 '장판 사려' 하고 외친다.
나는 그의 뒤로 바싹 붙어서 따라가다가,
“할머니?” 하고 불렀다.
할머니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을 했다.
“이러고 다니면 장판지가 더러 팔려요?”
사는 사람이 있으니께, 팔리니께 댕기지.”
“많이 남아요?”
“물밥 사 묵고 댕기믄 남는 것 없지, 친척집에서 잠은 자고……”
노파는 다시 외친다. 집이래야 눈에 띄는 농가(農家)가, 박덩굴 올라간 초가 지붕이 몇 채도 안 되는데, 뒤따라가는 내 생각으론 한 장도 팔릴 것 같지가 않다.
그래도 노파는 유유히 목청을 돋우어 장판 사라고 외치다가, 그것도 그만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연못 속의 금붕어가 어쨌다는 그런 노래였는데 너무 구슬프게 들려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다가, 여기도 또한 거리의 악사(樂士)가 있구나 하고, 어쩌면 이런 사람들이 진짜로 예술가(藝術家)인지 모르겠다는 묘한 생각을 하다가, 그 노파는 윗마을로 가고 나는 가매못 곁에 와서 우두커니 낚시질을 하고 있는 아이들 옆에 서서 구경을 한다.
부평초가 가득히 깔려 있는 호수(湖水)에 바람이 불어 그 부평초가 나부끼고 연꽃 비슷하기는 하나 아주 작고 노오란 빛깔의 꽃이 흔들린다.
“이게 무슨 꽃이죠?”
하고 물었더니 고기를 낚아 올리던 청년이,
“말꽃이라 하지요.”
“말꽃…….”
가련한 꽃이름이 말꽃, 어쩐지 잘못된 것 같아 꽃에 대하여 미안한 생각이 드는데,
“저 저, 선생님.”
하고 누가 뒤에서 부른다. 여기서 나를 부를 사람은 없다.
이십 년 세월이 지나 이제 이 고장은 낯설고 남의 땅만 같고, 그래서 일 생각만 잊는다면, 나는 외로움이 행복스럽게 될 수 있는 기분인데,
“저, 선생님.”
나는 하는 수 없이 돌아보았다. 여학생이,
“저, 박 선생님 아니어요?”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나를 알 사람이 있을 턱이 없다. 더욱이 이런 소녀는.
“그렇지만 어떻게 나를?”
“저 책에서 봤어요. 사진으로요.”
나는 아차! 싶었다.
그리고 나를 알아주어서 고마운 마음보다 나를 의식하게 하는 번거로움에 짜증스런 마음이 앞섰다.
얼마나 좋은 시간인가. 그 시간을 그 소녀는 찢어 버린 것이다.
나는 이 곳 여학교에 다니느냐고 소녀에게 물었다.
그리고 나도 이 곳 여학교를 옛날에 다녔노라고 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중학을 나와서 고등 간호학교에 다녀요.”
하며 소녀는 수줍어서 말했다.
나는 다시 이 마을에 사느냐고 물었다. 소녀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호수에 사람이 빠져 죽니?”
“네, 가끔. 작년에 할머니가 한 분 자살을 했어요.”
“그럼 저 둑에서 떨어져 죽겠구나.”
“글쎄요…….”
“여기서 물에 빠지려면 한참 걸어 들어가야잖니? 걸어 들어가는 동안 마음이 변할 텐데…… 그래도 죽는 사람이면 상당히 의지가 강할 거야.”
나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으시시 떨었다.
마침 부탁해 놓은 차가 왔기에 소녀와 작별하고 자동차에 올랐다.
가매못 옆을 지나가면서 나는 어릴 때 상두가(喪頭歌)를 구슬피 불러서 길켠에 선 사람들을 울리던 그 넉살 좋은 사나이와 농악(農樂)꾼에 유달리도 꽹과리를 잘 치고 춤 잘 추던 사람을 생각하며, 그들이야말로 예술가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거리의 악사(樂士)― 멀리 맑은 공기를 흔들며 노파(老婆)가 부르던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출전] 《Q씨에게》 (1966년 作)
◇ 어휘 풀이
*악사(樂士) :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
*잡화(雜貨) : 여러 가지 일용 상품
*축음기(蓄音機) : 레코드에서 음파를 재생하여 내는 장치. 유성기(留聲機)
*행상(行商) :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
*초고(草稿) : 시문(詩文)의 초벌 원고
*수전(水田) : 무논. 물이 늘 있는 논
*물밥 : 밥
*부평초(浮平草) : 개구리밥. 늪이나 연못의 물 위에 떠서 자라는 풀
이 작품은 작자가 창작을 위한 취재 여행 중, 삶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깨달은 참된 예술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 글이다.
*갈래 : 경수필
*성격 : 자기 고백적, 반성적, 개성적
*배경 : 1960년대, 경상 남도 진주 주변 시골
*제재 : 거리의 악사
*주제 : 참된 예술의 의미
*특징 : 단순한 이야깃거리를 특유의 감수성과 예리한 관찰력을 동원하여 의미 있게 포착해 냄.
*출전 : “Q씨에게”(1966)
◇ 이해와 감상
작자가 새로운 작품을 위한 수집의 준비 과정에서 체험한 사실을 담담하게 제시한 수필이다. 작자가 우연히 만난 삶의 현장을 통해 예술가의 삶과 생활인의 삶 사이의 이질성과 동질성을 발견하고, 자신도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소재로 작품을 써야겠다는 반성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외로움과 고독은 고통스런 창작의 과정에서 오는 것이며, 진정한 예술가는 삶의 현장이 곧 예술 창작의 현장이기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서사적인 요소인 삽화와 사건, 작자 자신의 생각, 대화의 적절한 구사 등은 여성 작가의 섬세함과 우아함이 잘 드러나고 있으며, 수필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 주고 있다.
◇ 작품의 구성상 특징
시간에 따른 추보식 구성
이 작품은 작자가 작품의 창작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진주에 내려가 있을 때 한나절 동안 겪은 체험을 사실적으로 담담하게 제시하고 있다. 서두는 거리의 악사에 대한 자신의 평상시 생각으로 구성하고, 본문은 진주 가매못 주변에서 겪은 체험을 사실적으로 서술하고, 맺음말은 진정한 예술가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반성을 담고 있다.
‘거리의 악사’의 의미
장판 파는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생활과 예술이 일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자가 말하는 ‘거리의 악사’는 생활 자체에서 우러난 신명을 표현하는 사람들로, 작자는 삶과 하나되는 예술이 진정한 예술임을 깨닫게 되었다.
‘거리의 악사’의 주제와 소재
작자는 아코디온을 켜고 북을 치며 약을 파는 약장사, 수레 위에 구식 축음기를 올려 놓고 묵은 유행가 판을 돌리며 잡화를 파는 행상, 장판을 팔러 다니며 제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는 할머니 등을 가리켜 ‘거리의 악사’라고 부른다. 이 글의 제목이면서 소재이기도 한 이 말은 예술 작품을 직업적으로 창작하는 예술가가 아닌, 생활 속에서 자신의 마음에 이끌려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거리의 악사’를 회상하면서 작자는 예술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고, 자신의 예술 활동을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 작가 소개
박경리(朴景利, 1926~2008): 소설가. 1955년 《현대 문학》에 단편 ‘계산’으로 등단하여 사회의식이 강한 문제작들을 발표하였다. 섬세하면서도 현실적인 관심을 주축으로 한 광범위한 작품 세계를 보여 준다. 25년 동안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는 서사의 방대함과 문학성으로 한국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된다. 주요 작품으로 《토지》, 《불신 시대》, 《김 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등의 소설과 《기다리는 불안》, 《Q씨에게》 등의 수필집이 있다.
/ 2021.11.13(토)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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