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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수필] '페이터의 산문' 이양하(李敭河) (2021.11.09)

푸레택 2021. 11. 9. 12:02

■ 페이터의 산문 / 이양하

   만일 나의 애독(愛讀)하는 서적을 제한(制限)하여 이삼 권(二三卷) 내지 사오 권(四五卷)만을 들라면, 나는 그 중의 하나로 옛날 로마의 철학자(哲學者), 황제(皇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冥想錄)을 들기를 주저하지 아니하겠다.  

   혹은 설움으로, 혹은 분노(憤怒)로, 혹은 욕정(慾情)으로 마음이 뒤흔들리거나, 또는 모든 일이 뜻 같이 아니하여 세상이 귀찮고, 아름다운 친구의 이야기까지 번거롭게 들릴 때 나는 흔히 이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 황제를 생각하고, 어떤 때에는 직접 조용히 그의 명상록을 펴 본다. 그리하면, 그것은 대강(大綱)의 경우(境遇)에 있어, 어느 정도(程度) 마음의 평정(平靜)을 회복(回復)해 주고, 당면(當面)한 고통(苦痛)과 침울(沈鬱)을 많이 완화(緩和)해 주고, 진무(鎭撫)해 준다.

   이러한 위안(慰安)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모르거니와, 그것은 모든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내 마음에 달렸다, 행복(幸福)한 생활(生活)이란 많은 물건(物件)에 의존(依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恒常) 기억(記憶)하라, 모든 것을 사리(捨離)하라. 그리고 물러가 네 자신 가운데 침잠(沈潛)하라… 이러한 현명(賢明)한 교훈(敎訓)에서만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도리어 그 가운데 읽을 수 있는 외로운 마음, 끊임없는 자기 자신(自己自身)과의 대화(對話)가 생활의 필요 조건(必要條件)이 되어 있는 마음, 행복을 단념(斷念)하고 오로지 마음의 평정만을 구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목전(目前)의 현실(現實)에 눈을 감음으로써, 현실과의 일정(一定)한 거리(距離)를 유지(維持)할 수 있고, 또 어떤 때는 현실을 아주 무시(無視)하고 망각(忘却)할 수 있는 마음에서 오는 편이 많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미(意味)에 있어, 그 위안(慰安)은 건전(健全)한 성질(性質)의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실, 일종(一種)의 지적 오만(知的傲慢) 또는 냉정(冷靜)한 무관심(無關心)이, 황제의 견인주의의 자연(自然)한 귀결(歸結)이요, 동시에 생활 철학(生活哲學)으로서의 한 큰 제한(制限)이 된다는 것은 거부(拒否)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반면(反面), 견인주의가 황제의 생활에 있어 가장 아름답게 구현되고, 견인주의자의 추구(追求)하는 마음의 평정이, 행복을 구할 수 있는 마음의 한 기본적(基本的) 자체(姿體)가 된다는 것만은 또 수긍(首肯)하지 아니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음에 번역(飜譯)해 본 것은 직접 명상록(冥想錄)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요, 월터 페이터가 그의 ‘쾌락주의자(快樂主義者) 메어리우스’의 일장(一章)에 있어서, 황제의 연설(演說)이라 하여, 명상록(冥想錄)에서 임의(任意)로 취재(取材)한 데다 자기 자신의 상상(想像)과 문식(文飾)을 가하여 써 놓은 몇 구절(句節)을 번역(飜譯)한 것이다. 페이터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세기말(世紀末)의 영국(英國)의 유명한 심미 비평가(審美批評家)로, 아름다운 것을 관조(觀照)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는 데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나는 그의 ‘문예 부흥(文藝復興)’의 찬란(燦爛)한 문체(文體)도 좋아하나, 이 몇 구절의 간소(簡素)하고 장중(莊重)한 문체도 거기 못지 아니하게 좋아한다. 그리고, 황제의 생각도 페이터의 붓을 빌어 잃은 것이 없을 뿐 아니라, 한층 더 아름다운 표현(表現)을 얻었다 할 수 있지 아니한가 한다.

   사람의 칭찬(稱讚) 받기를 원하거든, 깊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 그들이 어떠한 판관(判官)인가, 또 그들이 그들 자신에 관한 일에 대하여 어떠한 판단(判斷)을 내리는가를 보라. 사후(死後)의 칭찬받기를 바라거든, 후세(後世)에 나서, 너의 위대(偉大)한 명성(名聲)을 전할 사람들도, 오늘같이 살기에 곤란(困難)을 느끼는 너와 다름없다는 것을 생각하라. 진실(眞實)로 사후의 명성에 연연(戀戀)해하는 자는, 그를 기억(記憶)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의 하나하나가, 얼마 아니하여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기억 자체(自體)도 한동안 사람의 마음의 날개에 오르내리나, 결국(結局)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네가 장차 볼 길 없는 사람들의 칭찬(稱讚)에 그렇게도 마음을 두는 것은 무슨 이유(理由)인고? 그것은 마치 너보다 앞서 이 세상에 났던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

   참다운 지혜(智慧)로 마음을 가다듬은 사람은, 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하는 호머의 싯구(詩句) 하나로도, 이 세상의 비애(悲哀)와 공포(恐怖)에서 자유(自由)로울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恰似)한 것, 가을바람이 땅에 낡은 잎을 뿌리면, 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잎, 잎, 조그만 잎. 너의 어린애도, 너의 아유자(阿諛者)도, 너의 원수(怨讐)도, 너를 저주(詛呪)하여 지옥(地獄)에 떨어뜨리려 하는 자나, 이 세상에 있어 너를 헐고 비웃는 자나, 또는 사후에 큰 이름을 남긴 자나, 모두가 다 한 가지로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 그들은 참으로 호머가 말한 바와 같이 봄철을 타고 난 것으로, 얼마 아니 하여서는 바람에 불리어 흩어지고, 나무에는 다시 새로운 잎 이 돋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공통(共通)한 것이라고는 다만 그들의 목숨이 짧다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너는 마치 그들이 영원(永遠)한 목숨을 가진 것처럼, 미워하고 사랑하려고 하느냐? 얼마 아니 하여서는 네 눈도 감겨지고, 네가 죽은 몸을 의탁(依託)하였던 자 또한 다른 사람의 짐이 되어 무덤에 가는 것이 아닌가?

   때때로 현존(現存)하는 것, 또는 인제 막 나타나려 하는 모든 것이 어떻게 신속(迅速)히 지나가는 것인가를 생각하여 보라. 그들의 실체(實體)는 끊임없는 물의 흐름, 영속(永續)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바닥 모를, 시간의 심연(深淵)은 바로 네 곁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 때문에 혹은 기뻐하고, 혹은 서러워하고, 혹은 괴로와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 무한(無限)한 물상(物象) 가운데 네가 향수(享受)한 부분(部分)이 어떻게 작고, 무한한 시간(時間) 가운데 네게 허여(許與)된 시간이 어떻게 짧고, 운명(運命) 앞에 네 존재(存在)가 어떻게 미소(微小)한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리고, 기꺼이 운명(運命)의 직녀(織女) 클로토의 베틀에 몸을 맡기고, 여신(女神)이 너를 실삼아 어떤 베를 짜든 마음을 쓰지 말라.

   공사(公私)를 막론(莫論)하고 싸움에 휩쓸려 들어갔을 때에는, 때때로 그들의 분노(憤怒)와 격렬(激烈)한 패기(覇氣)로 오늘까지 알려진 사람들 ― 저 유명한 격노(激怒)와 그 동기(動機)를 생각하고, 고래(古來)의 큰 싸움의 성패(成敗)를 생각하라. 그들은 지금 모두 어떻게 되었으며 그들의 전진(戰塵)의 자취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야말로 먼지요, 재요, 이야기요, 신화(神話), 아니 어떡하면 그만도 못한 것이다. 일어나는 이런 일 저런 일을 중대시(重大視)하여, 혹은 몹시 다투고 혹은 몹시 화를 내던 네 신변(身邊)의 사람들을 상기(想起)하여 보라. 그들은 과연 어디 있는가? 너는 이들과 같아지기를 원하는가?

   죽음을 염두(念頭)에 두고, 네 육신(肉身)과 영혼(靈魂)을 생각해 보라. 네 육신이 차지한 것은 만상(萬象) 가운데 한 미진(微塵), 네 영혼이 차지한 것은 이 세상에 충만(充滿)한 마음의 한 조각. 이 몸을 둘러보고, 그것이 어떤 것이며, 노령(老齡)과 애욕(愛慾)과 병약(病弱) 끝에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또는, 그 본질(本質), 원형(原形)에 상도(想到)하여 가상(假象)에서 분리(分離)된 정체(正體)를 살펴보고, 만상의 본질이 그의 특수(特殊)한 원형을 유지(維持)할 수 있는 제한(制限)된 시간을 생각해 보라. 아니 부패(腐敗)란, 만상의 원리 원칙(原理原則)에도 작용(作用)하는 것으로, 만상은 곧 진애(塵埃)요, 수액(水液)이요, 악취(惡臭)요, 골편(骨片), 너의 대리석(大理石)은 흙의 경결(硬結), 너의 금은(金銀)은 흙의 잔사(殘渣)에 지나지 못하고, 너의 명주(明紬) 옷은 벌레의 잠자리, 너의 자포(紫袍)는 깨끗지 못한 물고기 피에 지나지 못한다. 아! 이러한 물건(物件)에서 나와 다시 이러한 물건으로 돌아가는 네 생명(生命)의 호흡(呼吸) 또한 이와 다름이 없느니라.

   천지(天地)에 미만(彌漫)해 있는 큰 영(靈)은 만상을 초와 같이 손에 넣고, 분주(奔走)히 차례차례로 짐승을 빚어 내고, 초목(草木)을 빚어 내고, 어린애를 빚어 낸다. 그리고, 사멸(死滅)하는 것도 자연의 질서(秩序)에서 아주 벗어져 나가는 것은 아니요, 그 안에 남아 있어 역시 변화(變化)를 계속(繼續)하고, 자연을 구성(構成)하고, 또 너를 구성하는 요소(要素)로 다시 배분(配分)되는 것이다. 자연은 말없이 변화한다. 느티나무 궤짝은 목수가 꾸며 놓을 때 아무런 불평(不平)도 없었던 것과 같이, 부서질 때도 아무런 불평을 말하지 아니한다. 사람이 있어, 네가 내일, 길어도 모레는 죽으리라고 명언(明言)한다 할지라도. 네게는 내일 죽으나 모레 죽으나 별로 다름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너는 내일 죽지 아니하고, 일 년 후, 이 년 후, 또는 십 년 후에 죽는 것을 다행(多幸)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도록 힘써라.

   만일 너를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네 마음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니까, 너는 그것을 쉬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만일 죽음에 부수(附隨)되는 여러 가지 외관(外觀)과 관념(觀念)을 사리(捨離)하고, 죽음 자체를 직시(直視)한다면, 죽음이란 자연의 한 이법(理法)에 지나지 아니하고, 사람은 그 이법 앞에 겁(怯)을 집어먹는 어린애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알 것이다. 아니, 죽음은 자연의 이법이요 작용일 뿐 아니라. 자연을 돕고 이롭게 하는 것이다.

   철인(哲人)이나 법학자(法學者)나 장군(將軍)이 우러러보이면, 이러한 사람으로 이미 죽은 사람을 생각하라. 네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볼 때에는 네 조상(祖上) 중의 한 사람, 옛날의 로마 황제의 한 사람을 생각하여 보라. 그러면 너는 도처(到處)에 네 현신(現身)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러한 것을 생각하여 보라. ―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는가? 대체 어디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네 자신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너는 네 생명이 속절없고 너의 직무(職務), 너의 경영(經營)이 허무(虛無)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머물러 있으라. 적어도, 치열(熾熱)한 불길이 그 가운데 던져지는 모든 것을 열(熱)과 빛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같이, 이러한 세상의 속사(俗事)나마 그것을 네 본성(本性)에 맞도록 동화(同化)시키기까지는.

   한때 통용되던 말이 폐어(廢語)가 되는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던 이름도 마침내는 잊혀진다. 카밀루스, 불레수스, 레오나투스, 조금 내려와서는 스키피오와 카토, 그리고 다음에는 아우구스투스, 하드리안, 안토니누스, 피우스, 이러한 큰 이름이 모두 그러하다. 또 수미(愁眉)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병상(病床) 옆에 섰던 얼마나 많은 의사가 그들 자신 병들어 죽었는가! 다른 사람의 운명을 신중하게 에언하던 저 형명한 칼에아의 복자(卜者)들도 자기 자신의 최후는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집에 살던 모든 사람, 티베리우스와 같이 카프리의 도(島)변(邊)을 사랑하고 정원(庭園)과 탕(湯)욕(浴)을 즐기던 사람들, 불멸(不滅)에 관하여 정밀(精密)한 철리(哲理)를 말하던 피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 또는 자기의 생명만의 영속(永續)할 듯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무찌른 알렉산더, 그와 그의 마부(馬夫)가 지금 다른 것이 무엇인가 ― 이러한 모든 사람들도 다 한 가지로 다음다음 가 버리지 아니하였는가! 안토니누스의 궁(宮)신(臣)도 태반은 죽었다. 판테아도 페르가무스도 벌써 그녀들의 임자의 분묘(墳墓) 옆에 앉아 있지 아니한 지 오래다. 하드리안의 모지기도 이미 사라졌다.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면 도리어 우스운 일일 것이다. 그들이 혹 아직 남아 있어 묘를 지킨다 한들 죽은 사람이 그것을 알고 기뻐하며, 또 그들이 영구히 지켜 주는 것을 즐겨하랴? 그들도 결국은 늙고 병들어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때는 누가 있어 군왕(郡王)의 분묘를 지킬 것인가? 이것이 무덤의 종말(終末)로 무덤에도 정명(定命)이 있는 것이다.

   세상은 한 큰 도시(都市). 너는 이 도시의 한 시민(市民)으로 이 때까지 살아 왔다. 아, 온 날을 세지 말며, 그 날의 짧음을 한탄(恨歎)하지 말라. 너를 여기서 내보내는 것은, 부정(不正)한 판관이나 폭군(暴君)이 아니요, 너를 여기 데려온 자연이다. 그러니 가라. 배우(俳優)가, 그를 고용(雇傭)한 감독(監督)이 명령(命令)하는 대로 무대(舞臺)에서 나가듯이. 아직 5막(五幕)을 다 끝내지 못하였다고 하려느냐? 그러나, 인생(人生)에 있어서는 3막으로 극(劇) 전체가 끝나는 수가 있다. 그것은 작자(作者)의 상관(相關)할 일이요, 네가 간섭(干涉)할 일이 아니다. 기쁨을 가지고 물러가라. 너를 물러가게 하는 것도 혹은 선의(善意)에서 나오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니까.

◇ 이양하(李敭河, 1904~1963)


1904년 평안남도 강서 출생. 평양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에 건너가 쿄토제삼고교(京都第三高校) 및 도쿄대학(東京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고, 1931년 동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귀국 후 연희전문에서 영문학을 강의했으며, 광복 후에는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학술원 회원, 서울대 문리대학장 서리 등을 역임했다. 평론 「리차즈의 문예가치론」(1933)을 비롯하여 「‘말’ 문제에 대한 수상(隨想)」(1935), 「조선현대시연구」(1935), 「바라던 ‘지용시집’」(1935) 등으로 문단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송전(松田) 풍경」(1939), 「내 차라리 한 마리 부엉이가 되어 외롭고자 하노라」(1949)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그의 문학 활동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수필은, 고독한 관찰자로서 경험한 생활에 대한 잔잔한 애정을 어린이나 나무와 같은 여린 소재에 곧잘 의탁해 드러내는 섬세함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필집으로 『이양하 수필집』(1947) 『나무』(1964) 등이 있다. 이밖에도 시집 『마음과 풍경』(1962), 번역서 『시와 과학』(1947), 『포켓영한사전』(권중휘 공편, 1954) 등을 간행하였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이양하[李敭河]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권영민)


/ 2021.11.09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