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지조론(志操論) - 변절자(變節者)를 위하여’ 조지훈(趙芝薰) (2021.11.09)

푸레택 2021. 11. 9. 11:49

■ 지조론(志操論) / 조지훈(趙芝薰)

― 변절자(變節者)를 위하여

지조(志操)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强度)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名利)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와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者)이기 때문에 배신하는 변절자를 개탄(慨嘆)하고 연민(憐憫)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의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警醒)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지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는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識見)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지사(志士)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 다 지사(志士)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운동의 단계에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정당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정책을 통해서의 정상(政商, 정치가와 상인의 결합, 정치가와 결탁하거나 정권을 이용해서 사사로이 이익을 꾀하는 사람)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구복(口腹)과 명리를 위한 부동(浮動)은 무지조(無志操)로 규탄되어 마땅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이 난국을 수습할 지도자의 자격으로 대망하는 정치가는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능한 직업정치인보다 지사적 품격의 정치 지도자를 더 대망하는 것이 국민 전체의 충정(衷情)인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염결공정(廉潔公正, 성품이 청렴결백하며 공평하고 정대함) 청백강의(淸白剛毅, 성품이 깨끗하고 강직하며 씩씩함)한 지사정치(志士政治)만이 이 국운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모든 정치 지도자에 대하여 지조의 깊이를 요청하고 변절의 악풍을 타매(唾罵)하는 것은 백성의 눈물겨운 호소이기도 하다.

지조와 정조는 다같이 절개에 속한다.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라고들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생활의 이욕(利慾)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정치인의 무절제를 장사꾼의 이욕과 계교와 음부적(淫婦的) 환락(歡樂)의 탐혹(眈惑)이 합쳐서 놀아난 것이라면 과연 극언이 될 것인가.

하기는, 지조와 정조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오늘에 와선 이미 시대착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하긴 그렇다. 왜 그러냐 하면, 지조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요, 시세를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부나 홀아비가 개가(改嫁)하고 재취(再娶)하는 것은 생리적으로나 가정생활로나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또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가와 재취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면서도 어떤 과부(寡婦)나 환부(鰥夫, 홀아비)가 사랑하는 옛짝을 위하여 또는 그 자녀를 위하여 개가나 속현(續絃)의 길을 버리고 일생을 마치는 그 절제에 대하여 찬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능히 어려운 일을 했대서만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본능고(本能苦)를 이성과 의지로써 초극(超克)한 그 정신의 높이를 보기 때문이다. 정조의 고귀성이 여기에 있다.

지조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양심과 주체는 일찌감치 집어던지고 시세(時勢)에 따라 아무 권력이나 바꾸어 붙어서 구복의 걱정이나 덜고 명리의 세도에 참여하여 꺼덕대는 것이 자연한 일이지, 못나게 쪼를 부린다고 굶주리고 얻어맞고 짓밟히는 것처럼 부자연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 얼핏 들어 우선 말은 되는 것 같다.

여름에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다가 가을바람만 불면 단팥죽 장사로 간판을 남 먼저 바꾸는 것을 누가 욕하겠는가. 장사꾼, 기술자, 사무원의 생활 방도는 이 길이 오히려 정도(正道)이기도 하다. 오늘의 변절자(變節者)도 자기를 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처한다면 별 문제다. 그러나 더러운 변절의 정당화를 위한 엄청난 공언(公言)을 늘어놓는 것은 분반(噴飯)할 일이다. 백성들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먼 줄 알아서는 안 된다. 백주대로에 돌아앉아 볼기짝을 까고 대변을 보는 격이라면 점잖지 못한 표현이라 할 것인가.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고 항거(抗拒)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困辱)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존 자시(自尊自恃)를 위해서는 자학(自虐)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奇癖)까지도 지녔던 것이다. 신단재(申丹劑) 선생은 망명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다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弟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한용운(韓龍雲) 선생의 지조가 낳은 기벽의 일화도 마찬가지다.

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다. “한 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菜根譚)》의 한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 힘도 없으면서 뜻있는 야당(野黨)의 투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狡智, 교활한 슬기, 약은 꾀)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辱人)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바닥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라는 뜻이 깃들어 있다.

변절(變節)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 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親日派)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나머지 하나 협의(狹義)의 변절자, 비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전선(野黨戰線)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

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치욕에 김상헌(金尙憲)이 찢은 항서(降書)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은 당시 민족정기(民族正氣)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瀋陽)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이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士)가 아니요 남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朴重陽), 문명기(文明琦)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되기는 하였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다. 앞에 든 최명길도 그런 범주에 들거니와, 일제 말기 말살되는 국어의 명맥을 붙들고 살렸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민족 해방의 날을 위한 유일한 준비가 되었던 《맞춤법 통일안》, 《표준말모음》, 《큰 사전》을 편찬한 ‘조선어학회’가 ‘국민총력연맹 조선어학회지부(國民總力聯盟 朝鮮語學會支部)’의 간판을 붙인 것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었다면 그 간판은 족히 변절의 비난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옹(佐翁), 고우(古友), 육당(六堂), 춘원(春園) 등 잊을 수 없는 업적을 지닌 이들의 일제 말의 대일 협력(對日協力)의 이름은 그 변신을 통한 아무런 성과도 없기 때문에 애석하나마 변절의 누명을 씻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이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을 우리의 기억이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반민특위(反民特委)’에 불리었고, 거기서 그들의 허물을 벗겨 주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못하고 누명만 쓸 바에는 무위(無爲)한 채로 민족정기의 사표(師表)가 됨만 같지 못한 것이다.

변절자에게는 저마다 그럴 듯한 구실이 있다. 첫째, 좀 크다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나도 될 수 있다, 나만 깨끗이 굶어 죽으면 민족은 어쩌느냐가 그것이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는 투의 이론이요, 그 다음이 바깥에선 아무 일도 안 되니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요, 가장 하치가, 에라 권력에 붙어 이권이나 얻고 가족이나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굶어 죽기가 쉽다거나 들어가 싸운 다거나 바람이 났거나 간에 그 구실을 뒷받침할 만한 일을 획책(劃策)도 한 번 못해 봤다면 그건 변절의 낙인밖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어떤 선비도 변절하여 권력에 영합해서 들어갔다가 더러운 물을 뒤집어쓰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온 예를 역사상에서 보지 못했다. 연산주(燕山主)의 황음(荒淫)에 어떤 고관의 부인이 궁중에 불리어 갈 때 온몸을 명주로 동여매고 들어가면서, 만일 욕을 보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 놓고, 밀실에 들어가서는 그 황홀한 장치와 향기에 취하여 제 손으로 그 명주를 풀고 눕더라는 야담이 있다. 어떤 강간(强姦)도 나중에는 화간(和姦)이 된다는 이치와 같지 않는가.

만근(輓近, 근래에, 최근에) 30년래에 우리나라는 변절자가 많은 나라였다. 일제 말의 친일 전향, 해방 후 남로당의 탈당, 또 최근의 민주당의 탈당, 이것은 20이 넘은, 사상적으로 철이 난 사람들의 주책없는 변절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궤(同軌)다. 감당도 못할 일을 제 자신도 율(律)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민족이니 사회니 하고 나섰다라는 말인가. 지성인의 변절은 그것이 개과천선이든, 무엇이든 인간적으로는 일단 모욕을 자취(自取, 제 스스로 만들어서 됨)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우리가 지조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말은 다음의 한 구절이다. “기녀(妓女)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좇으면 한평생 분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貞婦)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貞操)를 잃고 보면 반생(半生)의 깨끗한 고절(苦節, 어떤 고난을 당해도 변하지 아니하고 끝내 지켜 나가는 굳은 절개)이 아랑곳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後半)을 보라”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 리를 날아간다(늦게 배운 잘못은 더 큰 잘못을 저지른다)는 우리 속담이 있거니와, 늦바람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아직 지조를 깨뜨린 적이 없는 이는 만년(晩年)을 더욱 힘쓸 것이니, 사람이란 늙으면 더러워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직 철이 안든 탓으로 바람이 났던 이들은 스스로의 후반을 위하여 번연(飜然)히 깨우치라. 한일합방(韓日合邦) 때 자결한 지사시인(志士詩人) 황매천(黃梅泉)은 정탈(定奪)이 매운 분으로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 매천의 붓 아래에서는 온전한 사람이 없다 - 매천의 날카로운 비평과 지조를 일컬음)이란 평을 듣거니와 그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보면 민충정공(閔忠正公), 이용익(李容翊) 두 분의 초년(初年) 행적을 헐뜯은 곳이 있다. 오늘에 누가 민충정공, 이용익 선생을 욕하는 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 분들의 초년을 모른다. 역사에 남은 것은 그분의 후반이요, 따라서 그분들의 생명은 마지막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도도(滔滔)히 밀려오는 망국(亡國)의 탁류(濁流) - 이 금력과 권력, 사악 앞에 목숨으로써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지조의 함성을 높이 외치라. 그 지성 앞에는 사나운 물결도 물러서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천하의 대세가 바른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때에 변절이란 무슨 어처구니없는 말인가. 이완용(李完用)은 나라를 팔아먹었어도 자기를 위한 36년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가졌었다.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권력에 뒤늦게 팔리는 행색(行色)은 딱하기 짝없다. 배고프고 욕된 것을 조금 더 참으라. 그보다 더한 욕이 변절 뒤에 기다리고 있다.

“소인기(少忍飢, 잠깐 굶주림을 참으라)하라.” 이 말에는 뼈아픈 고사(故事)가 있다. 광해군의 난정(亂政) 때 깨끗한 선비들은 나가서 벼슬하지 않았다. 어떤 선비들이 모여 바둑과 정담(情談)으로 소일(消日)하는데, 그 집 주인은 적빈(赤貧)이 여세(如洗) 그 부인이 남편의 친구들을 위하여 점심에 수제비국이라도 끓여 드리려 하니 땔나무가 없었다. 궤짝을 뜯어 도마 위에 놓고 식칼로 쪼개다가 잘못되어 젖을 찍고 말았다.

바둑 두던 선비들은 갑자기 안에서 나는 비명을 들었다. 주인이 들어갔다가 나와서 사실 얘기를 하고 추연(愀然)히 하는 말이, 가난이 죄라고 탄식하였다. 그 탄식을 듣고 선비 하나가 일어서며, 가난이 원순 줄 이제 처음 알았느냐고 야유하고 간 뒤로 그 선비는 다시 그 집에 오지 않았다. 몇 해 뒤 그 주인은 첫 뜻을 바꾸어 나아가 벼슬하다가 반정(反正, 광해왕 15년(1623)에 이귀, 김류 등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왕 및 집권파인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인 인조를 즉위시킨 인조쿠데타를 가리킨다) 때 몰리어 죽게 되었다.

수레에 실려서 형장(刑場)으로 가는데 길가 숲 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한 다음, 가지고 온 닭 한 마리와 술병을 내놓고 같이 나누며 영결(永訣)하였다. 그때 그 친구의 말이, 자네가 새삼스레 가난을 탄식할 때 나는 자네가 마음이 변한 줄 이미 알고 발을 끊었다고 했다. 고기밥 맛에 끌리어 절개를 팔고 이 꼴이 되었으니, 죽으면 고기 맛이 못 잊어서 어쩌겠느냐는 야유가 숨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찾은 것은 우정이었다. 죄인은 수레에 다시 타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탄식하였다. “소인기, 소인기(少忍飢 少忍飢)하라”고…….

변절자에게도 양심이 있다. 야당에서 권력으로 팔린 뒤 거드럭거리다 이내 실세(失勢)한 사람도 있고, 지금 요추(要樞)에 앉은 사람도 있으며, 갓 들어가서 애교를 떠는 축도 있다. 그들은 대개 성명서를 낸 바 있다. 표면으로 성명은 버젓하나 뜻있는 사람을 대하는 그 얼굴에는 수치의 감정이 역연(歷然)하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란 것이다. 구복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 자기 변명은 도리어 자기를 깎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핑계는 있다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왜 아기를 배게 됐느냐 하는 그 이야기 자체가 창피하지 않은가.

양가(良家)의 부녀가 놀아나고 학자 문인까지 지조를 헌신짝같이 아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니 변절하는 정치가들도 우리쯤이야 괜찮다고 자위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自任)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다.

ㅡ 1960년 2월 15일 《새벽》 3월호

《조지훈 전집5: 지조론》(나남, 1996)

◇ 어휘 풀이


순일(純一) : 온전한 하나의.
확집(確執) : 자기의 주장을 고집함.
위의(威儀) : 엄숙한 몸차림.
명리(名利) : 명예와 이익.
일조(一朝)에 : 하루 아침에. 갑자기.
곤고(困苦) : 힘들고 어려움.
경성(驚醒) : 타일러 일깨움.
국리민복(國利民福) : 나라를 이롭게 하고 국민의 삶을 복되게 함.
충정(衷情) : 진심으로 우러나는 참된 정.
염결공정(廉結公正) : 성풍이 맑고 깨끗하며 공정함.
청백강의(淸白剛毅) : 성품이 깨끗하고 뜻이 굳으며 씩씩함.
타매(唾罵) : 침을 뱉듯 마구 욕을 함.
환부(鰥夫) : 홀아비.
속현(續絃) : 끊어진 현을 다시 이음. 아내를 여읜 뒤 재취함을 이르는 말.
분반(噴飯) : 입에 있던 밥을 내뿜음. 참지 못하고 웃음을 이르는 말.
자시(自恃) : 자기자신을 (지나치게) 믿음.
기벽 : 기이한 취미나 버릇으로 남과 구별되는 짓.
교지(狡智) : 간사한 재주와 지혜.
타기(唾棄) : 더러워 침을 뱉는 것처럼 버림.
만근(輓近) : 근래에, 최근에
번연(飜然)히 : 모르던 것을 한꺼번에 깨닫게 되는 모양.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 : 매천의 붓끝 아래 완전한 사람이 없다. 매천의 날카로운 비평과 지조를 말함.
소인기(少忍飢)~하라 : 굶주림을 조금만 더 참으라.
적빈이 여세(如洗)라 : 너무나 가난하여 물로 씻어낸 것처럼 아무 것도 없다.
가난이 죄 : 가난하여 생기는 좋지 않은 일.
자임(自任) : 스스로 맡은 바. 임무.

◇ 작가 : 조지훈(趙芝薰, 1920~1968)

시인. 본명 동탁(東卓). 경북 영양(英陽) 출생.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혜화전문(惠化專門)을 졸업하였다. 1939년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40년 《봉황수(鳳凰愁)》로 《문장(文章)》지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데뷔했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기대를 모았고, 박두진(朴斗鎭)․박목월(朴木月)과 함께 46년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 불리게 되었다. 52년에 시집 《풀잎 단장(斷章)》, 56년 《조지훈시선(趙芝薰詩選)》을 간행했으나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어 민권수호국민총연맹, 공명선거추진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시집 《역사(歷史) 앞에서》와 유명한 《지조론(志操論)》은 이 무렵에 쓰인 것들이다. 62년 고려대학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 《한국문화사서설(韓國文化史序說)》 《신라가요연구논고(新羅歌謠硏究論考)》 《한국민족운동사(韓國民族運動史)》 등의 논저를 남겼으나 그 방대한 기획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서울 남산에 조지훈 시비(詩碑)가 있다.

조지훈(趙芝薰, 1920~1968)

본명은 동탁(東卓). 1920년 12월 3일 경북 영양 출생. 1941년 혜화전문(현 동국대) 문과를 졸업했다. 오대산 불교전문 강원 강사를 거쳐 광복 후인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창립했고,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다.

1947년부터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문장』에 「고풍의상(古風衣裳)」(1939)과 「봉황수(鳳凰愁)」(1940)를 정지용의 추천으로 발표하면서 시단에 등단했다. 『청록집[공저]』(1946), 『풀잎 단장(斷章)』(1952), 『역사 앞에서』(1959), 『여운』(1964) 등의 시집과 『시와 인생』(1953), 『창에 기대어』(1958), 『지조론』(1962), 『돌의 미학』(1964) 등의 수상집, 그리고 『시의 원리』(1953), 『한국문화사서설』 등의 논저들을 간행하였다. 『청록집』에 수록된 초기작품에서 조지훈은 한국의 전통의식과 민족의식을 주요 서정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고풍의상」은 그 표제가 말하고 있듯이 한국의 고전적 생활문화에 담긴 여성적 품위와 의상미가 결합된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다.

작품 속에 표현된 한국의 전아한 고전미는 독자로 하여금 평화적 삶의 내적 질감을 공감할 수 있게 한다. 또 「봉황수」에서는 궁전의 건축미의 몇 가지 요체를 예각적으로 묘사하면서 조선 시대의 주권을 행사한 주체자들과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을 대비하여 피지배자의 시대적 고통과 비장감을 토로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작품 「승무」는 젊은 승려의 현세적 삶의 고뇌를 거쳐, 불교적 교리에 승화되는 정신미를 춤의 배경과 춤사위와 승복의 나부낌을 묘사하면서 서정적으로 표현하였다.

「고사(古寺) 1‧2」, 「산방(山房)」, 「유곡(幽谷)」 등의 작품에서는 선정(禪定)에 든 시적 화자가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시적 전개는 시인이 월정사의 강원에서 외전강사(外典講師)로 있으면서 체험한 산사 생활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목어를 두드리는 정결한 울림 소리, 어리고 고운 상좌, 잠든 고요, 부처님의 신비하고 그윽한 미소, 서방정토세계에 지향된 분위기, 눈부신 산사의 노을, 모란 꽃잎이 한잎 두잎 지는 현상 등은 모두가 정밀(靜謐)함 속에서 융합되고 조화된 경지를 이룬다.

시집 『풀잎 단장』에 수록된 작품 「풀잎 단장」을 보면 생명의 의미가 재인식되고 있다. 즉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설, 풀, 바위, 구름, 사람 등이 신비스러운 원리에 의하여 생명적인 것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인식된다. 그리고 생명을 부여받음으로써만 자연적 질서 속에서 그 있음의 가치를 실현한다는 자각을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에서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의 심상을 통하여 민족의 수난과 시대의 고통을 견뎌내는 의지력을 나타내고 있다.

「동물원 오후」 같은 작품은 식민지 치하의 시인의 고통을 집약적으로 표현한다. 한국어를 쓸 수 없고 이름조차도 일본식으로 개명하는 문화말살정책 아래서 시인은 동물원을 거닐며 시를 읽는 화자를 설정하여 “철책 안에 갇힌” 시인의 절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저항의식은 표면화되지 못하고 비극적 인식으로 간접화되고 있다.

작품 「다부원(多富院)」은 전쟁의 엄청난 비극적 국면을 시화하였다. 전쟁의 참상을 체험한 바탕 위에서 씌어졌기 때문에 현실감이 풍부해 참전시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았다. 박목원의 시 「나그네」에 화답한 시로 알려져 있는 「완화삼」에서는 나그네, 구름, 물길 등의 심상을 통해 전아한 시적 정서를 표현하고 있으며, 시인 자신이 겪은 오랜 병고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병에게」에서는 성숙한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조지훈[趙芝薰]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권영민)


◇ 감상의 길잡이 1

‘지조론’은 1950년대 자유당 말기의 극도로 혼란하고 부패한 정치 현실 속에서 과거의 친일파들이 과거에 대한 뉘우침 없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를 하고, 정치 지도자들마저 어떤 신념이나 지조도 없이 시대 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는 세태를 냉철한 지성으로 비판한 글이다. 이 작품에서는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지조를 적절한 예시와 속담, 일화 등을 통해 적절하게 제시함으로써 1950년대 부정과 부패로 일관한 독재 정권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 정권에 빌붙어 권세를 누리는 이들을 단죄함으로써 민족사의 새로운 자각과 지평을 열어 나가고자 한 작자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 감상의 길잡이 2

지조의 개념과 가치에 대해 말하면서 지조가 필요한 사람, 정조와 지조, 지조 지키기의 어려움을 말한다. 지조의 정의를 열거를 통한 강조로 제시하면서, 자신이 이 글을 쓰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역설하여 지조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리고 논지를 전개함에 있어서 지조를 대변하는 선비, 교양인과 훼절․변절을 대변하는 장사꾼과 창녀를 나란히 병치하고 있는데, 이는 대비의 효과를 통해 자신의 논지를 피력하는 방안으로 단일한 대상에 대한 의견의 개진보다 더욱 효과적인 장치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지조와 정조를 비교하면서 지조의 변절이 무절제한 자기 이욕에 있음을 드러내 주면서, 이러한 이욕을 이겨내지 못하면 지조를 지키기 어렵다고 제시하고 있다. 변절에 대해 정의하면서 그와 관련된 변절자의 구실에 대해, 늦게 지조를 버리는 변절에 대해 인용, 예시, 속담을 통해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작가는 ‘소인기하라’ -여기에서 ‘소인기’란 배고픔을 참아야 한다는 고통스런 사각을 드러내 주는 말임- 라는 고사와 관련된 어휘를 끌어들여 변절에 대한 구체적으로 예시를 드러내 주면서 이를 통해 변절자의 참담한 말로가 어떤 것인가를 나타내주고 있다. 이렇듯 작자는 지조와 변절에 대해 두루 다루면서 지조의 참의미를 선비․교양인․지도자의 생명이라 하고, 변절이란 것은 자신의 임무를 포기하는 것임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 감상의 길잡이 3

지조란 역사의 객관적 상황을 냉철히 인식하고 미래를 예측하여 올바른 길을 판단하고 그것을 초지 일관 밀고 나가는 것이다. 또한 세태에 따라 다소 태도를 바꾸더라도 개과천선으로서의 변절일 때는 도리어 지조를 찾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변절은 단순하게 ‘절개를 바꾼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옳은 신념을 버린 것을 의미한다.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친일파들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를 하고,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지조 없이 변절을 일삼는 당대의 세태를, 간접적 체험을 사례로 들어 가며, 냉철한 지성으로 비판하고 있다. 또한 민충정공, 이용익처럼 후에 자신의 행적을 반성한 경우에는 그 변절을 용서할 수 있다는 유연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지금 비난 받는 자들이라도 열심히 자기 성찰에 힘쓰고 지조를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

◇ 감상의 길잡이 4

친일파들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를 하고, 정치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지조 없이 변절을 일삼는 당대의 세태를 냉철한 지성으로 비판하고 있는 글이다. ‘변절자(變節者)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변절에 대한 경계와 지조를 잃지 않고 지켜 내는 지성인의 강직한 기개를 아울러 이야기하고 있다. 수필이 가질 수 있는 가벼움보다는 냉정한 지성을 바탕으로 씌어졌으며, 수필에 다양한 제재가 쓰일 수 있음을 알려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 핵심 정리

작자 : 조지훈
갈래 : 중수필, 교훈적 수필
성격 : 논리적, 사회적, 공적, 경세적, 설득적, 교훈적
문체 : 강건체, 한문투
특징 : 비교와 대조 등의 표현 기교와 적절한 인용 및 예시 사용
표현 : 다양한 일화를 제시하여 지조와 변절의 이미를 이해시킴. 정치인의 옳지 못한 행태를 준열하게 비판함. 변절을 고정적인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범한 변절이나 후에 자신의 행적을 반성한 경우는 그 변절이 용서될 수 있다는 열린 시각을 취함.
주제 :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지조 강조. 지조 있는 삶의 자세 강조

출전 : 《새벽》 3월호(1960)

/ 2021.11.09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