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나무야, 아이야, 푸른 5월아' 김용택 시인

푸레택 2021. 10. 28. 19:14

■ 나무야, 아이야, 푸른 5월아 / 김용택 시인

봄꽃들이 피어나며 산과 들을 화려하게 수놓더니, 금세 지고 이제 산과 들에는 나무 잎들이 새로 피어 우거진다. 세월은 꽃피고 지고 잎 피는 그 색깔들을 따라 빨리빨리 흐른다. 길가나, 강가, 밭 언덕에는 벌써 무더기무더기 하얀 찔레꽃들이 피어난다. 마음껏 푸르러지는 언덕에 하얀 찔레꽃 꽃 덤불은 지루해지려는 녹색 위에 눈이 부시다.

내가 근무하는 작은 분교에도 푸름은 여지없다. 푸름 속에 둘러싸인 학교 운동장은 유난히 햇살이 가득해 보인다. 그 햇살 가득한 운동장에 아이들이 햇살을 차며 이리저리 거침없이 뛰어다닌다. 보기 좋고 아름답다. 아이들의 거침없는 몸짓들은 마치 물고기들이 맑은 물살을 차며 노는 것처럼 눈부시다.

언제 바라보아도 아이들의 노는 모습은 신나 보인다. 아이들은 심심한 줄을 모른다. 무엇을 가지고도, 아이들은 정신을 빼앗기고 논다. 아니 아무 것도 없으면 그냥 뛰어다니며 논다. 흙을 가지고 몇 시간을 놀고, 그냥 맨땅에 금을 긋고 그 금을 따라 한나절을 논다. 가만히 보면 하나도 재미가 없을 것 같은데 아이들은 재미있게 논다. 나는 아이들이 나무 아래에서 노는 모습을 제일 좋아한다.

나는 이따금 아이들에게 나무를 가르친다. 보아라. 나무는 어디로 멀리 여행을 다니지도 않고, 공부도 하지 않고, 사람들처럼 싸우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그 어떤 것들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자란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고 아름다운 것들을 다 부른다. 그 자리에 그냥 가만히 있어도 나비, 새, 구름, 비, 눈, 바람, 그리고 사람. 그런 것들이 다 찾아온다. 꽃이 피고, 잎이 피고, 열매를 맺어 세상에 나누어 주고, 새들은 죽은 나뭇가지로 집을 짓고, 사람들도 나무를 베어다가 집을 짓는다. 나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나무라고 나는 나무를 가르친다.

가만히 바라보고 들여다보면 세상에 귀하지 않고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나는 나무를 가장 신비롭게 가르친다. 나무 아래에서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를 가르치면 아이들은 금방 시를 쓴다. 나무는 착하다. 나무는 우리를 도와주지만 우리는 나무를 별로 도와주지 않는다고 아이들은 시를 쓴다. 아이들은 나무에 대해 시를 쓰고, 그 나무 아래서 논다. 내가 아이들과 하루를 지내는 교실 창 밖 화단에는 늘 푸른 사철나무가 한 그루 있다.

내 키보다 작지만 잎은 무성해서 나무 잎 속에 있는 나뭇가지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내 아름으로 한 아름도 더 넘는, 공 같이 생긴 모양을 가진 이 나무는 내 책상에 앉으면 반달처럼 끝이 보인다. 그 나무로 어느 봄날 새 한 마리가 들어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냥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또 그 새인 듯한 새 한 마리가 나무 밑으로 얼른 또 날아들었다. 딱새 한 쌍이 그 나무에 둥지를 튼 것이다.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새들이 새끼를 키우는 동안 교실 안에서는 올해 새로 들어온 우리 반 1학년 학수, 유신이, 정미, 은비가 공부를 한다. 은비와 유신이는 글자를 배웠는지 떠듬떠듬 책을 읽지만 학수와 유신이는 글자를 전혀 읽지 못했다.

세상에 이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나, 너, 아버지, 어머니, 봄맞이꽃, 진달래, 섬진강을 가르쳤더니 금방 글자를 안다. 신기하다. 글자를 가르치면 아이들이 글자를 안다. 숙제도 제법 해오는데, 어느 날 학수가 숙제를 해 오지 않았다. 왜 숙제를 해 오지 안 했냐고 하자 어머니가 숙제를 하지 말라고 했단다. 세상에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겠는가. 학수의 거짓말은 진짜 거짓말이다. 어버이날 어머니, 아버지께 편지를 써보자고 했더니, 학수가 편지를 써 왔다. 편지 중에 '어머니 아버지 사 해요'라는 말이 있어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랑'자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모르는 것이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었다. 우린 교실이 떠나가게 웃었다. 어찌나 크게 웃었던지 창 밖에 나무에서 새가 다 푸드덕 날아갔다. 산과 들에 강 언덕에 맘껏 푸르러지는 나무야, 아이들아, 새 날아가는 푸른 하늘아.

글=김용택 시인·전북 임실군 마암분교 교사

/ 2021.10.28(목)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