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느티나무 아래에서 / 곽재구 시인
향림골이라는 동네 이름이 마음에 들어 이삿짐을 부린 첫날 새벽이었다. 아직 풀지 못한 짐 상자들 사이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데 어디선가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꼬끼∼요. 기골이 장대한 수탉의 울음소리였다.
한꺼번에 골짜기 안의 어둠을 밀어내 버릴 듯 연거푸 울어대는 녀석의 울음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것이 시초였다. 녀석의 울음소리가 천천히 잦아드는 순간 이번에는 마을 안의 다른 닭들이 화답을 하기 시작했다. 고요한 새벽의 시간들 속으로 닭들의 울음소리가 봄산의 진달래 꽃불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좋은 일이야, 내가 이사 온 것을 축하하느라 동네의 닭들이 한 목청 뽑는 거라구…
엉뚱한 상상력까지 겸하여 잠자리 속의 나는 썩 포근해졌다. 둘째 날 새벽에도 나는 잠을 깼다. 어김없이 녀석들의 울음소리가 골짜기 안을 메웠다. 그런데 서로 주고 받는 울음의 기세가 전날보다 드세었다. 마음 한쪽에서 이제 그만 축하해 주어도 되는데…,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셋째 날도 넷째 날도 닭들은 울었다. 어느 날은 단순히 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악을 써대는 것 같았다. 나는 비로소 첫날 밤 그들과의 조우가 우정 있는 따뜻한 소회가 아님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어차피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초저녁부터 꿀잠에 빠져드는 농경사회의 자손이 아닌 것이다. 책을 읽네, 글을 쓰네, 음악을 듣네, 한없이 게으름을 피우다가 농부가 잠을 깨려는 그 시각에야 잠자리에 드는 참으로 한심한 영혼인 것이다. 닭 울음소리는 농부들의 새벽잠을 깨우는 데는 그만일 테지만 이런 한심한 영혼에게는 정말 무효용의 것이었다.
열흘 남짓 새벽잠을 설치고 두 눈이 '악령'을 쓸 무렵 도스토예프스키의 그것처럼 피골상접한 뒤에야 나는 이번의 이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내 영혼의 습(習)은 농경시대의 한적한 영혼의 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 날도 닭 울음소리가 요란했다. 날만 새면 바로 옮길 곳을 알아보리라. 생각하는 동안에도 닭들은 쉬지 않고 울었다. 슬몃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귀를 틀어막은 약솜뭉치를 꺼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차피 내일 모레면 옮길 텐데 그래, 오늘은 실컷 네 녀석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마.
나는 계곡을 따라 마을 안길을 걷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낯선 발자국 냄새라도 맡은 때문인지 그렇게 수선스레 울던 닭들의 울음이 일제히 끊겼다. 새벽 어스름 사이로 밀려오는 고요와 개울물 소리. 나는 가능한 한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그 고요한 시간 속을 소요했다. 그 때 어디선가 내가 지금껏 한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자욱한 향기들이 길을 따라 수북수북 쏟아졌다. 수수꽃다리나 조팝나무꽃, 유채꽃과는 또 다른 지극히 아늑하고 수더분한 향기.
나는 그 향기 속을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다다른 한 그루의 느티나무. 조금만 더 자라면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로 손색이 없을 느티나무에서 그 향기는 쏟아지고 있었다. 느티나무는 이제 새 잎이 막 피려는 순간이었다. 어린 이파리들이 마른 가지를 찢고 생명의 새 향기를 세상 가득 펼쳐놓고 있었다. 그것은 축제였다. 한 겨울의 고통을 넉넉히 이기고 선 봄나무의 축제. 날이 훤히 밝아오고 어디선가 다시 닭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울음소리가 지극히 사랑스러웠다.
글=곽재구 / 시인·순천대 교수
/ 2021.10.28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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