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생태 과학 칼럼 모음

[나의 초록목록(草錄木錄)④] '백 개의 비늘조각으로 이루어진 백합, 구근식물'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2021.10.16)

푸레택 2021. 10. 16. 11:09

[나의 초록목록(草錄木錄)④] '백 개의 비늘조각으로 이루어진 백합, 구근식물'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나는 애써 정원을 가꾸지 않는다. 내게 마당은 그곳에 잠입하여 스스로 자라는 식물을 관찰하는 공간일 뿐이다. 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친구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찾아왔는지를 곰곰 생각하면서 말이다.

원예학을 전공한 후배 J는 나와 달리 마당과 정원을 살뜰히 가꾼다. 그에게 마당은 다양한 재배식물을 기르는 실험실이다. 아끼는 구근(球根)이라며 후배는 지난봄에 내 마당에 ‘글로리오사’라는 식물의 뿌리를 잔뜩 심어두고 갔다.

글로리오사는 백합과와 유사한 콜키쿰과에 속하는 글로리오사속 원예재배식물을 통칭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들을 과거에는 백합과로 구분하였으나 최근 식물 DNA 해독법은 콜키쿰과로 구분한다. 글로리오사라는 이름은 두 단어로 이루어진 학명의 첫 번째 단어를 딴 것이다. '

우리 인간을 말하는 학명은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이다. 그중 첫 번째 단어 ‘Homo’는 유인원류를 통칭하는 명사다. 이 호모 가운데 다른 종은 모두 멸종하고 유일하게 인간만 살아남았다. 한편 ‘sapiens’는 ‘사유하는’이라는 뜻의 형용사다. 이 두 단어의 조합으로 인간이라는 한 종이 규정된다.

학명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에게 부여되는 과학적인 이름이다. 대개 외국에서 도입된 화훼식물의 유통명은 그 식물의 학명의 첫 번째 단어인 속명을 딴 경우가 많다.

Gloriosa는 ‘영광’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요즘 꽃집에서 플로리스트 교육 소재로 즐겨 쓰는 아네모네, 라넌큘러스, 스카비오사, 탈리트럼, 아이리스는 모두 그 식물의 속명을 따서 부르는 이름이다. 내 마당에 심은 글로리오사는 수페르바글로리오사(Gloriosa superba)라는 기본종을 개량하여 만든 로스차일드(Rothschildiana)라는 품종이다.

학명의 두 번째 단어 superba는 ‘훌륭하다’는 뜻으로 이 식물의 학명을 구성하는 두 단어 모두 꽃이 얼마나 멋진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글로리오사. 백합과와 유사한 콜키쿰과에 속하는 글로리오사속 원예재배식물을 통칭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내 마당에 심은 것은 수페르바글로리오사(Gloriosa superba)라는 기본종을 개량하여 만든 로스차일드(Rothschildiana)라는 품종이다. [사진=허태임]
수페르바글로리오사(Gloriosa superba)의 학명에서 속명을 나타내는 첫 번째 단어 Gloriosa는 ‘영광’을, 두 번째 단어 superba는 ‘훌륭하다’는 뜻으로 이 식물의 학명을 구성하는 두 단어 모두 꽃이 얼마나 멋진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사진=허태임]

수페르바글로리오사는 본래 아프리카와 아시아 열대 지방에 자라는 식물이다.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를 탐험하던 유럽인들의 눈에 띄었고 19세기에 이미 다양한 품종이 개발될 정도로 일찍이 원예 재배식물로 입지를 굳혔다. 뿌리가 둥근 구근식물이라 장시간 보관이 가능했고 배와 수레에 실려 먼 대륙으로 번질 수 있었다.

그 중심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유대 금융 재벌 가문을 이끌던 로스차일드남작[Walter Rothschild, 2nd Baron Rothschild(1868-1937)]이 있었다. 동물학자가 되어 자신의 박물관을 갖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가업을 이어받았던 인물로 서양의 동물학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기린의 한 아종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로스차일드기린을 비롯하여 현존하는 지구상의 생물 가운데 그의 이름을 기리는 종은 100여 종이 넘는다. 내 마당에 도착한 글로리오사도 그중 하나다. 품종의 이름 로스차일드(Rothschildiana)는 그를 기념하는 이름이다. 열대 지방이 원산인 구근식물은 한반도의 혹독한 겨울 추위를 스스로 견디지 못한다.

며칠 전 내가 사는 경북 봉화군의 체감온도가 영하권에 들었던 입동에 후배는 내게 전화를 걸어 글로리오사의 안부를 물었다. 그들을 살펴달라는 당부였다. 나는 마당의 글로리오사 구근을 캤다. 봄에 심을 때 보다 구근은 더욱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감히 농부의 마음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실온에서 보관하다가 이듬해 봄에 땅이 녹으면 다시 심을 예정이다.

글로리오사의 구근. 열대 지방이 원산인 구근식물은 한반도의 혹독한 겨울 추위를 스스로 견디지 못한다. [사진=허태임]
겨울이 오기 전에 구근을 캐어 실온에 보관하다가 이듬해 봄에 땅이 녹으면 다시 심어야 한다. [사진=허태임]

우리 땅에서 스스로 자라는 구근식물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그 친구들은 한반도의 겨울 추위를 견디는 DNA를 제 몸에 지니고 있다. 꽁꽁 언 땅에서 알뿌리로 겨울을 나고 봄이면 어김없이 싹을 내는 것이다.

한반도에는 글로리오사와 유사한 혈통의 식물로 그 외모가 꼭 닮은 솔나리와 땅나리가 있다. 두 식물 모두 나리속(Lilium)에 속하며 우리나라의 깊은 산에 드물게 자란다.

나리는 순우리말이고 한자어는 백합(百合)이다. 백합은 구근을 달리 표현한 말로 땅속의 알뿌리가 100개의 비늘조각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꽃잎이 뒤로 말리는 모습을 보고 중국에서는 권단(卷丹)이라 부른다.

솔나리는 잎이 바늘처럼 가늘어서 마치 소나무 잎을 닮았다고 솔나리라 부른다. 높은 산에 드물게 자라는 편인데 꽃이 예뻐서 마구 채취당하다 보니 지금은 멸종의 위기에 처한 희귀식물이 되었다.

땅나리는 꽃이 땅을 보고 자라는 모습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하늘을 보고 자라는 하늘나리는 고산지에 아주 드물게 자란다.

솔나리. 글로리오사와 혈통이 비슷한 구근식물로 생김새가 비슷하다. 우리나라에 도입된 글로리오사처럼 여름에 꽃이 핀다. 바늘처럼 가느다란 잎이 소나무 잎과 닮아서 솔나리라 부른다. 높은 산에 드물게 자라는 희귀식물이다. [사진=허태임]
땅나리. 꽃의 색깔이 선명하고 글로리오사처럼 꽃잎이 젖히며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낌을 준다. 꽃이 피는 시기도 비슷하다. 꽃이 땅을 보고 자라는 모습 때문에 땅나리라 부른다. 하늘을 보고 자라는 하늘나리는 고산지에 아주 드물게 자란다. [사진=허태임]

우리가 거의 매일 식탁에서 만나는 파, 양파, 마늘, 부추도 구근식물이다. 알 굵은 육쪽마늘, 장아찌를 담는 바로 그 부위가 구근이다. 그들을 묶어서 식물학적으로 ‘부추속’이라 부른다. 학명의 첫 번째 단어인 속명은 알리움(Allium)이다. ‘맵싸한 맛’을 칭하던 고어에서 비롯되었다. 부추속 식물의 매운맛은 ‘알리인’이라는 성분 때문이다.

위협을 느끼거나 제 몸을 보호하려고 할 때 부추속 식물은 제 몸의 알리인을 알릴설파이드라는 성분으로 바꾼다. 이때 부추 특유의 냄새와 맛이 나게 된다. 동의보감에서 낱낱이 기록하고 있듯이 부추속 식물의 그 많은 효능은 이 알릴설파이드 성분 덕분이다.

‘알리오올리오’는 마늘과 올리브로 담백한 맛을 살린 이탈리아 전통요리다. 알리오는 마늘의 학명의 속명, 올리오는 올리브의 학명의 속명이다. 식물의 학명이 일상에서 쓰이는 대표적 사례다.

먹기 좋은 부추속 식물이 보기에는 더없이 좋다. 꽃이 정말 예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두메부추를 손꼽는다. 부추는 중국 서부지역이 고향인 재배식물이고, 한반도 두메산골에는 우리 식물 ‘두메부추’가 있다. 연분홍빛의 작은 꽃들이 촘촘히 모여 피어 마치 땅에서 솟은 백열등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잘한 별똥별이 한 움큼 모여 또 다른 소행성을 만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름 무더위가 누그러질 즈음 산기슭에는 두메부추의 보랏빛 풍경이 펼쳐진다. 부추 재배 농가에서는 두메부추를 고소득 작물로 주목하기도 했다. 추운 환경에 적응한 탓에 두메부추는 잎이 넓고 두툼한데, 덕분에 같은 수를 재배해도 일반 부추보다 수확량이 많기 때문이다.

구근식물 중에 수선화가 빠질 순 없다. 수선화의 학명 중 첫 번째 단어인 속명은 Narcissus(나르시수스)다. 정신분석학에서 자기애를 뜻하는 용어는 나르시시즘이고, 자기애가 강한 사람을 나르시시스트라 부른다. 이는 모두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청년 나르키소스에서 온 말이다.

수려한 외모로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지만 결국 호수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반해 빠져 죽게 되는 비극의 주인공 나르키소스, 그가 죽은 자리에 핀 아름다운 꽃이 수선화다. 그래서 수선화의 속명은 Narcissus(나르시수스)다.

지중해 연안이 원산이고 중국을 거쳐 아주 오래전 국내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한다. 워낙 다양한 재배품종이 있어서 그 기원을 찾기가 어려워진 지 오래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 유배 생활 중 그곳에서 만난 수선화를 마음 깊이 들였다 한다. “희게 퍼진 구름 같고 새로 내린 봄눈 같다”,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이 냉철하고도 빼어나다”는 그의 글에서 수선화에 대한 애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제주의 1월은 수선화가 한창인 달이다.

두메부추. 꽃은 마치 땅에서 솟은 백열등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잘한 별똥별이 한 움큼 모여 또 다른 소행성을 만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진=허태임]
수선화. 추사 김정희는 제주 유배 생활 중 그곳에서 만난 수선화를 마음 깊이 들이기도 했다. 제주의 1월은 수선화가 한창인 달이다. [사진=허태임]

독일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며 시를 썼던 허수경 시인은 두 해 전 가을에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 그녀가 아껴 읽은 시 50편이 최근에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마늘밭 가에서」라는 한 시인의 시를 소개하며 허수경 시인은 “땅속에서 여물어가는 것과 땅 바깥에서 허물어져 가는 세상을 생각하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길러낸 말”이라는 표현을 썼다.

구근식물에게서 내가 들은 말, 구근식물을 위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글=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출처] 뉴스퀘스트 2020.11.17

/ 2021.10.16(토)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