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생태 과학 칼럼 모음

[나의 초록목록(草錄木錄)②] '오래, 크게, 홀로 자라는 팽나무'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푸레택 2021. 10. 14. 12:09

[나의 초록목록(草錄木錄)②] 오래, 크게, 홀로 자라는 팽나무 /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식물과 관련된 강연을 하게 되면 수강생들로부터 주로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식물학자는 어떤 식물을 가장 좋아하냐’는 거다. 예쁘고 귀한 식물들이 여럿 떠오르지만 그들 모두를 뒤로한 채 나의 답변은 언제나 ‘팽나무’다.

내가 자란 시골 마을 어귀에는 팽나무 고목 한 그루가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그 큰 나무가 유년의 내게는 마치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바오밥나무 같았다. 또래가 귀했던 작은 마을에서 그는 내 유일한 친구였다. 그의 덩치가 몇 아름이나 되는지 두 팔을 벌려 한참을 재보거나, 꾸덕꾸덕 떨어진 고목의 나무껍질로 탑을 쌓기도 하고, 제법 달콤한 열매를 따 먹어도 보고, 자잘한 씨앗을 하나둘 헤아리다 보면 금세 저녁이 찾아왔다. 기쁜 마음을 나누는 것도 속상한 마음을 달래는 것도 팽나무 앞에서였다.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던 팽나무가 누구보다 좋았고 팽나무 곁에서 나는 못 할 말이 없었다. 친구였던 팽나무가 조금 무서워지는 날도 있었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온 마을 사람들이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팽나무 앞에 모일 때였다. 팽나무에 정성스레 새끼줄을 두르고 떡과 술을 차려 한 해의 풍농을 기원하며 절을 올리고 춤도 췄다.

우리 할머니는 하늘의 신이 이 팽나무를 타고 내려와 마을의 소원을 듣고 간다는 이야기를 내게 하며 자식들 다 잘 되게 해달라며 주문 같은 것을 외우셨다. 그 무렵부터 나는 신을 만나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팽나무 곁에 머무는 일이라는 것을 조금씩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바오밥나무를 연상시키는 팽나무 고목의 밑동.(전남 보길도 세연정)
신목 팽나무와 법수사지 당간지주.(경북 성주군 수륜면 법수사지)

그 기이한 풍경이‘동제(洞祭)’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 학위논문 주제인 ‘팽나무속 분류 연구’를 위해 전국의 팽나무를 찾아다니면서부터다. 질병과 재앙을 멀리하고 농사가 잘되고 고기가 잘 잡히게 해달라고 비는 동제(洞祭)는 마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기원하는 제의를 말한다.

동제의 대상이 되는 신은 대체로 서낭신(城隍神)이 많은데 주로 마을의 당산목이 그 주인공이다. 당산목은 수령이 오래된 나무로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많다. 우리나라의 보호수는 1만3900여 그루로 느티나무, 소나무에 이어 팽나무가 1366그루로 세 번째로 많다(산림청 보호수 전국 지정 현황_2019년 기준). 또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팽나무와 팽나무가 포함된 숲은 6개나 된다(2018국가생물다양성통계자료집).

이렇듯 팽나무는 ‘오래’ 자라고 ‘크게’ 자라며 ‘홀로’ 자란다. 보통 수령이 100년 이상 된 고목으로 외롭게 혼자, 그러나 정말 멋진 수형을 갖추며 자란다. 이는 효과적인 자식 생산을 위한 전략 덕분이다. 팽나무는 과즙이 많은 달콤한 열매를 새와 동물들에게 제공한다.

동박새, 박새, 동고비, 직박구리 등이 팽나무 씨앗을 퍼뜨리는 산포자다. 덕분에 팽나무는 모수(부모나무) 가까이에 모여 자라지 않는다. 이는 자식을 멀리 보내어 더 좋은 환경에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팽나무는 후대 양성에 성공하며 동시에 홀로 근사한 수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새들이 좋아하는 달콤한 팽나무 열매.(전남 진도)
팽나무 고목의 짙은 녹음.(경남 창녕군 옥천리)

팽나무가 사는 곳은 주로 바닷가 주변이다. 옛 바다 사람들은 포구 근처에 있는 커다란 팽나무에 배를 정박하여 묶어 두곤 했다. 남부지방에서 팽나무를 포구나무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북 고창군 수동리의 팽나무는 수령 400년이 넘었고 둘레 길이가 6.56미터에 이르는 고목으로 2008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십여 년 전 여름에 수동리 팽나무를 만나러 간 적이 있다. 고목의 녹음이 짙어 마을 어르신 몇 분이 팽나무 아래서 더위를 피하고 계셨다. 제법 많은 팽나무를 만났으나 들판 한가운데 자라고 있는 이곳의 팽나무 자리가 다소 낯설게 느껴져 어르신께 여쭈었다. 예상대로 간척지를 매립하기 전에는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와 이 팽나무에 배를 묶어 두었다는 답변을 주셨다.

포구나무와 같은 뜻으로 제주도에서는 팽나무를 폭낭이라 부른다. 제주에는 팽나무 고목이 특히 많다. 곧게 뻗은 나무줄기와 위쪽에서 작은 가지를 많이 낸 모습이 마치 하늘을 받치고 있는 자태다. 제주에서는 오래된 팽나무 고목을 신성시하여 신목 또는 우주목이라 부른다. 4·3사건으로 사라진 마을을 찾을 때 이정표로 삼은 것 가운데 하나가 살아남은 팽나무였다.

미군정과 경찰의 무력 진압으로 무고한 주민과 마을이 사라지던 그 광경을 알알이 제 몸에 새기고 있는 팽나무 말이다. 강요배 화백의 「팽나무와 까마귀」는 4월의 제주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4월의 제주 팽나무.

제주시 한림에 가면 아름답기로 유명한 명월리 팽나무숲이 있다. 조선 후기 유학자들과 시인들이 어울려 풍류를 즐기던 장소로 명월대가 있는 문수천을 따라 수령 500년 이상의 팽나무와 푸조나무가 울창한 자연림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 마을이 처음 형성되기 전부터 있었던 전통 마을 숲이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팽나무 보호를 위해 종수감(種樹監)이라는 직책을 두었다. 마을 향약에는‘팽나무 한줄기 한 잎이라도 해친 자는 목면(木棉) 반(半) 필을 징수한다’는 보호 규정을 담았다. 제주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중부 이남 해안가에는 팽나무 고목이 많다.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리는 팽나무가 많이 자라는 마을이다. 그곳에는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진도항, 우리의 팽목항이 있다.

팽나무는 주로 대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곳과 생육지가 겹친다. 그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난 이들은 ‘팽총’의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팽나무의 열매를 총알로 맞구멍이 난 대나무 통을 총열로 만든 아이들의 장난감 총 말이다. 그 양 끝에 동그란 팽나무 열매를 탄알 삼아 하나씩 넣고 한쪽을 자루에 박힌 대쪽으로 밀어서 쏘면 팽나무 알이 총알처럼 ‘팽’하고 튀어 나간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팽나무 열매와 대나무가 최고의 장난감으로 거듭난 것이다.

팽나무는 생육조건이 까다롭지 않아 바닷가의 척박한 바위틈에서도 잘 자란다. 지나치게 요구하는 것 없이 묵묵히 겸손하게 자라며 제 몸을 주위에 내어주는 데 한 치의 인색함이 없다. 팽나무는 많은 나비의 애벌레를 키운다. 왕오색나비를 비롯하여 수노랑나비, 흑백알락나비, 홍점알락나비 등의 애벌레가 팽나무에서 먹고 자고 자라서 나비가 된다. 사람이 즐겨 먹는 팽이버섯은 본래 팽나무가 키운 것이다.

팽나무의 가장 큰 매력은 씨앗을 싸고 있는 내과피에 있다. 달달한 과육을 먹고 나면 딱딱한 안쪽 껍질이 나오는데 이를 내과피라고 한다. 내과피를 벗기고 나면 생명을 준비하는 진짜 씨앗이 나온다. 복숭아 씨앗이나 체리 씨앗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대부분 식물의 내과피를 구성하는 성분은 리그닌이다.

이는 목재의 딱딱한 부위를 형성하는 성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팽나무의 내과피는 특이하게도 ‘아라고나이트’라는 광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식물은 그들의 씨앗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진화해 왔다. 생명을 품고 있는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식물이 제 몸 안에서 광물질을 만들어 낸다는 점은 정말 신비한 일이다. 그 내과피에는 아라고나이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오팔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광물질로 이루어진 팽나무의 내과피. 달달한 과육을 먹고 나면 딱딱한 안쪽 껍질이 나오는데 이를 내과피라고 한다.

이렇게 멋진 팽나무 집안에는 여러 종류의 형제 나무가 있다. 팽나무를 필두로 우리나라에는 폭나무, 좀풍게나무, 노랑팽나무, 풍게나무, 왕팽나무 등 6종류의 팽나무속 나무가 자란다. 팽나무속 식물은 생김새가 확연히 다르지만 화려하지 않아 자세하게 살피지 않으면 식별하기 힘들다.

나는 팽나무속의 생물학적 위치와 유연관계를 밝히기 위해 외부 형태를 관찰하고 DNA의 염기서열을 비교하여 기록하고 종을 나누는 연구에 빠진 지 오래다. ‘묘미는 잘 아는 데 있고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되게 보게 된다’는 조선 시대 문인 유한준의 말처럼 팽나무속의 ‘묘미’를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고 싶은 것이다.

팽나무속은 크게 열매의 색깔과 잎의 생김새로 구분한다. 먼저 열매가 노란색 또는 주황색으로 익는다면 팽나무, 폭나무, 노랑팽나무, 왕팽나무다. 그중 폭나무는 잎이 가장 작고 팽나무와 달리 잎 끝이 뾰족하게 길어지며 잎 표면 전체가 솜털로 덮여 있다. 자라는 곳은 제주도와 전라북도 일부 서해안을 비롯하여 남해안 일대다.

왕팽나무는 잎이 대형이고 그 끝이 꼬리처럼 길게 뾰족해지며 큰 열매를 달고 있어서 쉽게 구분이 된다. 사는 곳은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의 일부 지역으로 깊은 숲이나 석회암 지대 초입이다.

노랑팽나무는 1930년 일본의 식물학자 나카이에 의해 처음 세상에 알려진 이후로 홀연 자취를 감춘 채 발견되지 않았다. 1989년 이창복 박사가 태기산에서 발견했다는 기록이 전부였다. 최근 나는 백두대간의 어느 산지에서 노랑팽나무를 운명처럼 만났다. 그날 밤에는 심장이 너무 쿵쾅대서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팽나무와 폭나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열매를 달고 있고 왕팽나무와 달리 잎 끝이 얼기설기 갈라지지 않는 점과 열매가 길쭉한 구형인 점 등으로 비슷하게 생긴 형제 나무들과 명확히 구분이 된다. 현재 밝혀진 노랑팽나무의 자생지는 내가 아는 그곳이 유일하다.

한편 열매가 검정색으로 익는 종은 풍게나무와 좀풍게나무이다. 풍게나무는 울릉도를 비롯하여 한반도 전역에 자란다. 잎의 가장자리에 있는 뾰족뾰족한 톱니가 잎의 절반 아래까지 길게 나타나는 점이 특징이다. 좀풍게나무는 중부 이북의 해안가와 내륙의 석회암 지대에 주로 자란다.

풍게나무와 달리 잎 가장자리의 톱니가 잎의 절반 이하로 아주 조금만 나타나며 잎의 가운데 맥을 기준으로 양측의 톱니가 비대칭 모양이라 쉽게 구분이 된다. 좀풍게나무는 노란색으로 익다가 완전히 성숙하면 검정색이 되기 때문에 열매가 노란색일 때 노랑팽나무 또는 팽나무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천년고찰 건봉사는 그 역사가 무색하게도 한국전쟁 중 불에 타 사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다만 절의 입구 불이문은 그 곁을 지키는 500년이 넘은 팽나무 덕분에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전해진다. 강원도 고성의 깊은 숲은 팽나무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에 나는 그 실체를 반드시 확인하고 싶었다. 봄에 피는 꽃과 가을의 열매 그리고 내과피의 표면 형태 모두를 확인한 결과 이 나무는 팽나무가 아니라 풍게나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팽나무’라는 명찰을 달고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불이문을 지킨 500년 풍게나무. 자세하게 살피지 않으면 식별하기 힘들기 때문에 ‘팽나무’라는 명찰을 달고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좀풍게나무.(강원도 고성군 백촌리) 현재 ‘팽나무’라는 명찰을 달고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건봉사에서 머지않은 고성군 토성면의 또 다른 보호수 ‘팽나무’는 팽나무가 아니라 팽나무와 달리 열매가 검게 익고 중부 지방 이북에서 주로 자라는 좀풍게나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렇게 그 이름이 잘못 소개된 나무들이 우리나라에는 많다. 우리나라 팽나무속 식물의 그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주는 일, 그리고 팽나무의 언어를 사람의 언어로 옮기는 일 모두 내가 즐겁게 해야 할 임무라 여기고 있다.

북으로부터 단풍의 남하가 시작되었다. 이윽고 숲의 내부가 드러나고 활엽수들의 나목이 빛을 발하는 때이다. 나목, 하면 나는 팽나무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이 글은 그 아름답고 고요한 팽나무에게 보내는 연서다.

글=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출처] 뉴스퀘스트 2020-10-13

/ 2021.10.14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