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뻐국나리의 비밀 /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가을이 되면 마음에 까닭 모를 조급증이 인다. 한낮의 더위 속엔 여전히 여름의 열기가 남아 있지만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선득하여 반팔 티를 입고 거리에 서면 팔뚝엔 오소소 소름이 돋곤 한다. 맨살에 닿는 찬 기운을 떨쳐내려 옷장 속에 넣어두었던 긴 소매의 옷을 꺼내 입듯 마음에 이는 조급증을 달랠 방법은 없을까 궁리하다가 그 원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병의 원인을 알아야 처방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조급증의 까닭을 찾는 게 우선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 원인은 단순 명료했다. 가을은 꽃이 저무는 계절, 은연중에 머지않아 사라질 꽃들 생각에 나도 모르게 마음에 조바심이 일었던 거였다.
대부분의 꽃들이 그러하지만 잠시 한눈을 팔다 놓치고 나면 꼬박 1년을 다시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하여 어여쁜 녀석들을 한 번 이라도 더 보려면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조바심하게 만든 거였다. 눈길 가는 곳에 마음이 가고, 마음 가는 곳으로 몸이 기울게 마련이다. 꽃들의 안부가 궁금하여 틈날 때마다 꽃 나들이를 한다. 천변을 걷거나 가까운 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는 게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원정을 떠나기도 한다. 귀한 뻐꾹나리를 만난 것은 가평 축령산이었다.
뻐국나리는 백합과 뻐꾹나리속의 여러해살이 풀인데 주로 한반도 중부 이남의 산지 숲속에서 자란다. 봄에 새싹이 나서 7~8월에 꽃을 피우는데 어린 싹이 나올 때 떡잎이 하나인 외떡잎식물이다. 꽃 하나에 암술과 수술을 동시에 지닌 양성화(bisexual flower, 암수한꽃)이자, 꽃받침과 꽃잎이 서로 분화되지 않고 화피로 합쳐져 있는 불완전화(不完全花)이기도 하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자가수정을 회피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자가수정은 열성인자의 유전도 문제이거니와 같은 개체의 유전자를 가진 것이어서 유전자의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구환경에 대한 적응력을 떨어뜨려 생존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속씨식물은 암수를 분리하여 별도의 꽃을 만드는 단성화(암수딴꽃/암수딴그루)로 진화하기도 하였다. 뻐꾹나리처럼 암수를 한 꽃 내부에 같이 가지고 있는 양성화는 어떻게 하면 자가수정을 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오랜 고민거리였다.
뻐꾹나리는 꽃 모양이 매우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함께 산행을 했던 친구는 뻐국나리가 요즘의 드론 같기도 하고, 우주선을 닮은 것 같다고도 했다. 뻐국나리는 이층 구조로 되어 있다. 꿀샘이 들어있는 아래층은 화피로 덮여 있고, 꽃술은 위로 솟아 있어 흡사 프로펠러가 여럿 달린 드론처럼 보인다. 이처럼 특이한 형태의 멋진 꽃 모양을 지니게 된 데에는 환경에 적응하며 자가수정을 피하고자 하는 진화의 결과물이다.
이동성이 없는 식물은 꽃가루를 전달하기 위해 바람. 물, 새, 곤충들의 도움을 받았다. 뻐꾹나리는 충매화로 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덩치가 큰 뒤영벌 종류에 적합한 꽃 구조를 지니고 있다. 곤충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충매화는 특정한 종류의 매개곤충에 적합한 형태로 구조를 만들며 진화해 왔다. 뻐꾹나리는 꿀샘(nectar)을 꽃의 아래쪽에 만들고 꽃술(암술과 수술)은 위로 올려 뒤영벌이 화피에 내려앉아 꿀을 빠는 사이 자연스레 등에 꽃가루를 묻혀 다른 꽃에 옮길 수 있도록 공진화한 것이다. 또 한 가지 비밀은 뻐국나리는 한 꽃에서 암술과 수술이 만나지 않도록 성숙하는 시기를 달리하여 자가수정을 회피한다는 점이다. 뻐국나리의 화려하고도 독특한 꽃의 구조는 그저 탄성을 자아내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진화란 곧 모든 생물이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한 적응이란 것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듯하다.
글=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출처] 글로벌이코노믹 2021-09-22
/ 2021.09.25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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