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물치 /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
불현듯 옛일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그때도 지금처럼 한겨울이었다.
산후 보혈(補血)에 좋다 하여 가물치 한 마리를 서울 경동시장에서 샀다. 집에 와 연탄불에 큰 솥을 얹고는 솥바닥에 참기름을 듬뿍 두르고 가물치를 넣은 후 솥뚜껑을 덮는다. 가물치 힘이 얼마나 센지 이를 악물고 솥뚜껑을 힘차게 누르지만 한참을 지나서야 잠잠해진다. 산후 부기가 덜 빠진 아내가 비릿하지만 가물치 국물을 훌훌 마신다. 이렇듯 가물치는 임신부들이 해산하면 부기를 가라앉히고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많이 찾았다.
가물치는 가물치과의 민물고기로서 진흙이나 물풀이 많은 곳에 서식하는데, 특이하게도 두 콧구멍이 양 눈알 사이에 아주 작게 자리한다. 그러다 보니 흔히 보잘 것 없거나 속이 좁은 사람을 일컬을 때 ‘소갈머리 좁기가 가물치 콧구멍’이라고 하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가물치가 뱀을 닮았다고 하여 ‘스네이크 헤드’(snake head)라 하고, 뱀이 변해 가물치가 됐다는 중국 속설도 있다.
가물치의 몸은 검은빛을 띤 청갈색이며 등은 짙고 배는 희거나 노란 빛을 띠고 있다. 몸은 길고 가는 편으로 길이가 80㎝를 넘는 것도 있다. 치어는 플랑크톤을 먹지만 성어는 다른 물고기나 개구리는 물론이고 허기질 때면 제 새끼까지 마구 잡아먹을 만큼 성질이 사나워 민물고기의 폭군이라 불린다.
우스운 것은 일본 사람들이 1920년대 우리나라 가물치를 일본에 일부러 들여갔는데, 그 가물치가 일본의 토종 물고기를 싹쓸이해 골칫거리라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가물치가 어떻게 미국에 들어갔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잉어, 미더덕, 억새, 칡 등과 함께 생태계를 파괴해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다. 이처럼 외래종으로 홍역을 치르는것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외국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듯, 어느 동식물도 어떤 곳이든 정착해 정(情) 붙이면 그곳이 고향이 아니던가.
글=권오길 강원대 명예 교수·생물학
[출처] 세계일보 2018.01.25
/ 2021.09.14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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