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도시 소식지 파주북시티
[2018 창간호] 칼럼 - 멀구슬나무 꽃이 필때 _ 시인 곽재구
매일 아침 강을 따라 걷는다.
강에는 다섯 그루의 멀구슬나무가 산다. 한 그루는 상류 쪽 징검다리 곁에 살고 네 그루는 하류 쪽 징검다리에 모여 산다. 두 징검다리 사이는 평상시 걸음으로 1200걸음이 조금 넘는다. 강의 물 흐르는 폭은 대략 80m에서 100m쯤 될 것 같다. 상류의 징검다리엔 31개의 디딤돌이 놓여 있다. 디딤돌은 두 사람이 교행하여 걸을 수 있을 만큼 크고 넉넉하여 앞에서 오는 이에게 잠시 멈춰 서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할 수 있다. 그러면 상대방도 안녕하세요, 라고 웃으며 말한다.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내가 처음 익히는 두 개의 단어가 있다. ‘포도’와 ‘아름다워요 아가씨’이다. 포도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다. 포도가 많이 나는 지역을 여행할 때면 포도를 입에 물고 다닌다. 그러다가 앞에서 여성분이 오면 ‘아름다워요 아가씨!’ 라고 현지어로 말한다.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환하게 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키도 작고 못 생긴 동양 남자가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재미있었을 것이다.
포도가 많이 나는데 아가씨도 정말 예쁘고 아름다운 곳은 중앙아시아의 트루판이다. 트루판은 사막지대인지라 물이 없다. 천산산맥에서 흘러내린 만년설의 물을 땅 밑으로 판 수로를 통해 흐르게 한다. 하늘에서는 햇볕이 쏟아지고 땅 아래로 천산의 물이 흐르니 포도의 과육이 싱싱하고 달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의 위그루 여인네들은 왜 그렇게 환하고 고운지. 태희씨와 수지씨와 설현씨가 포도밭 일을 하며 환하게 웃는다. 어느 해 내가 그곳을 지나며 ‘아름다워요 아가씨!’ 하고 진심어린 인사를 했을 때 한 아가씨는 내게 윙크를 했다. 내 생애에 처음 받은 윙크이다.
징검다리 위에서 아가씨를 만날 적 나는 ‘아름다워요 아가씨!’ 라고 인사하지 않는다. 비 그친 어느 날 한 손에 신발을 들고 맨발로 물에 잠긴 징검다리를 건너오는 아가씨를 보았는데 그렇게 인사하지 못했다. 한국 사람인 내가 왜 모국어로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지 못하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인사하기를 내가 포기한 것은 아니다.
멀구슬나무는 내가 아는 나무 중 가장 신비한 나무다. 벚꽃들이 강둑을 환하게 물들일 때 이 나무에는 이파리가 돋아날 조짐도 없다. 라일락꽃이 피고 질 때도 그냥 겨울나무다. 4월 하순이 되어도 나뭇가지는 빈 가지 그대로이다. 올해의 메이데이에 나무 아래 섰을 때 비로소 녹두알보다 작은 몽우리들이 가지 끝에 매달리는 것을 보았다.
5월 중순이 되면 앵두나무에 앵두들이 붉게 익기 시작한다. 참새와 밀화부리들이 날아와 앵두를 따먹고 씨를 뱉는 모습을 보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봄새들의 목소리가 싱싱한 것은 앵두를 많이 따먹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때쯤 멀구슬나무는 조금씩 잎이 피기 시작하고 어린 잎 뒤에 동글동글한 꽃망울들이 자리를 잡는다. 그러다 5월 하순이 되면 꽃망울들이 한순간 보라색의 꽃부채를 펼쳐드는데 신비한 그 모습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멀구슬나무에 꽃이 피면 징검다리 위에서 만난 이에게 일 년 내내 준비한 인사를 건넬 것이다.
저 보라색 꽃나무 보세요.
이름이 멀구슬나무예요 사랑스럽지요?
징검다리 가운데 멈춰 서서 물고기들을 본다. 물고기들은 신비한 버릇을 지녔다. 물고기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모두 상류 쪽으로 머리를 향한다. 꼬리와 머리의 방향이 같은 것이다. 한 순간 보스가 방향을 틀어 물살과 같은 발향을 택할 때도 있지만 멈출 때만큼은 모두 상류 쪽으로 머리를 향한다. 나는 물고기들의 이 모습이 좋다. ‘죽은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 오르지 못한다’ 는 브레히트의 말이 생각난다.
강에는 몇 군데의 경사진 어도가 놓여 있다. 어도는 강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들의 전용도로다. 어도의 물살을 거슬러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의 비늘이 햇살에 반짝 빛날 때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생의 희열이 있다. 수십 수백 마리의 물고기들이 반짝반짝 한꺼번에 튀어 오르는 춤!
지난 해 여름 징검다리를 건너다 부리가 긴 하얀 새가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챘다. 부리 가운데서 파닥 튀는 물고기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질렀는데 놀란 새가 물고기를 떨구었고 새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사흘쯤 뒤 징검다리 곁으로 모여든 한 무리의 물고기를 보았는데 새에게 물린 물고기 생각이 났다. 모여든 물고기 가운데 등이 새끼손톱 절반쯤 패인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다. 아, 살아 있었구나. 정말 반갑게 인사를 했고 손에 든 얼음 커피 몇 모금을 떨구어 주었다. 어린 물고기들이 커피 주위로 모여들고 조금 큰 물고기들은 흩어진다.
징검다리를 건너 하류 쪽 징검다리로 걸어간다. 하류의 강폭은 조금 더 넓다. 디딤돌이 43개 있고 크기도 훨씬 크다. 고인돌 크기의 디딤돌도 있다. 징검다리를 건너는 동안 나의 정신은 맞은편 네그루 멀구슬나무에 쏠려 있다. 누가 심었는지 아니면 씨앗 알맹이가 굴러와 저절로 자랐는지 알 수 없다. 다른 봄꽃나무들이 일제히 꽃 필 때 이 나무는 빈 가지로 머물다 봄꽃들이 다 지고 나면 그때 비로소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꽃 핀 멀구슬나무에 새들은 앉지 않는다. ‘왜 멀구슬나무에 가지 않는 거니? 꽃이 저렇게 고운데.’ 강변 버드나무의 새들에게 말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꽃이 지면 나무에는 초록색의 완두콩 알만한 열매들이 열린다. 열매는 시고 떫다. 유치원 조무래기들이 열매를 주워 던지고 논다. 겨울이 되면 열매는 시든 금빛으로 익는다. 익은 열매의 맛은 푸석하고 덤덤하다.
겨울이 깊어지고 하얀 눈이 세상을 덮을 때 비로소 새들이 나무를 찾아온다. 나무에는 앵두 송이 같기도 하고 포도송이 같기도 한 멀구슬나무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천지사방이 눈에 덮여 먹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을 때 새들이 나무를 찾아와 이 열매를 먹는 것이다. 가장 늦게 잎이 나고 가장 늦게 꽃이 피고 가장 맛없는 열매를 맺었으나 그 열매는 궁핍한 새들의 내장을 채워주고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는 원기를 준다. 내내 쓸쓸했으나 단 한 순간 새들이 찾아오는 시기를 기다려온 나무의 영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면서도 따뜻해진다.
나무 앞에 내가 좋아하는 의자가 있다. 세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 있다. 지난겨울 의자에 앉았다가 놀라며 일어섰다 주변의 모든 풀들이 다 시들었는데 의자 아래만 초록색의 풀들이 남아 있었다. 의자의 바닥이 눈과 바람을 막아준 탓이다. 한 친구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부끄럽다는 답장이 왔다. 누군가에게 단 한번이라도 이 의자와 같은 존재가 된 적이 있는가? 생각했다는 것이다.
매일 아침 강을 따라 걷는다.
강은 조용하고 침착하며 햇살을 받아 반짝 빛난다. 물고기들과 수초들을 키우고 망초꽃과 찔레꽃 황하코스모스의 꽃밭을 주위에 만든다. 다섯 그루의 멀구슬나무들이 보라색 꽃우산을 들고 서 있다. 두 사람이 신발을 손에 들고 징검다리를 건너온다. 맨발로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람을 보면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들을 보는 느낌이 있다. 그들에게 일 년 내 준비한 인사말을 할 것이다. 그들 또한 강변의 멀구슬나무처럼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꿈을 꼭 이루기를.
글=곽재구 시인 2018.12.03
△ 곽재구 시인은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 등의 시집들을 펴냈다. 산문집으로는 《곽재구의 포구기행》과 《곽재구의 예술기행》 등이 있다. 현재 순천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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