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다른 代父, 사진작가 홍순태 / 박만엽 재미 시인, 멀티 시문학 평론가
I. 글을 쓰기에 앞서
II. 대학입시를 앞둔 담임 선생님
III. 사진작가 및 사진학과 교수
IV. 명예교수 및 인생선배
V. 글을 맺으며
I. 글을 쓰기에 앞서
우리나라에서 단순히 사진 찍기를 취미로 하거나, 사진과 관련된 업이나 일에 종사하는 분들에게 ‘홍순태’란 이름 석 자는 요즈음 젊은이들이 쓰는 말로 거의 ‘죽음’이며, ‘하늘’이다.
즉, 寫眞界에서 그 이름만큼 지명도가 높은 경우는 드물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경력, 전시회, 저서 등을 여기에 나열하고자 한다면 이것만 읽다가 밤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일반 독자들을 위하여 과연 어떤 분인지,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선생님은 1934년 11월 10일에 서울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1960년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하셨다. 1970년대 국전 추천작가, 국전 초대작가이셨다. 1993년에는 ‘엑스포 93멀티비젼’ 총감독을 맡아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무리하셨고, 1972년 홍익대 출강을 필두로 후학들을 위해 1981년부터 신구전문대학 사진학과 교수, 성균관대 등에 몸담고 계셨고, 사진과 관련된 저서가 10권이 넘게 간행되었으며, 현재는 몸담고 계시던 대학의 영예로운 명예교수님이시다.
위의 약력에서 보듯이, 그분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셨다. 사진에 대하여 전문가도 아닌, 단지 詩文學 評論家인 내가 홍순태 선생님의 글을 쓰고자 하는 남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II. 대학입시를 앞둔 담임 선생님
1950년대 이전에 태어난 분들은 모두 그러하였는지 모르지만, 우린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들어갈 때도 시험을 보았다. 그 당시는 명문 중학교에 들어가려고 어린 초등학생이 재수하는 풍경도 크게 낯설지는 않았다. 나 역시 재수를 하여 그 당시 사립의 명문 서울 종로구 혜화동(惠化洞)에 자리 잡은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에 입학하였다. 그후 동계 진학으로 보성고등학교(普成高等學校)에 자동 입학되었다.
그 당시 느낌으로는 모든 선생님들이 우리 학교 교사라는 것을 아주 자랑스러워했고,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이사장님이 가꾸어 놓은 우리 고유문화의 보존 정신이 이어졌는지, 이사장님의 아드님이신 세계 현대 100인 미술작가에 들 정도로 유명하신 우리 동문 선배이신 전성우님이 교장으로 부임하셨고, 비록 그 당시는 평범한 교사였지만 후에 홍순태 선생님처럼 문학이나 예술 방면에 우리나라 최고봉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것 같다.
국어 선생님이셨던 윤강로 시인님, 영어 선생님이셨던 이생진 시인님, 미술 선생님이셨던 조수호 서예가님, 한학의 대가이신 설악산인 김종권 선생님 등을 예로 들 수가 있다.
1973년 3월 고등학교 3학년인 학생들에게는 더없이 힘든 한해였겠지만, 적어도 나를 비롯한 우리반 급우들에는 더 없는 지옥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담임선생님이 ‘돌반 전문 해결사’ 상업 담당 홍순태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분의 별명 ‘탱크’ 밑에 깔려 죽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느낀 선생님은 첫째, 부지런하셨다. 늘 아침 일찍 출근하셔서 상업 선생님임에도 불구하고 칠판에 영어 단어 50개씩 적어 놓고, 집에 가기 전에 불운하게 지명 당하여 맞추지 못하면 여지없이 ‘탱크’의 밥이 되곤 하였다.
둘째, 본래 건강하게 태어나신 분인지, 힘이 장사이셨다. 요즈음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체벌 당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이 많았지만, 우린 안 맞으면 오히려 이상한 시대에 교육 받았다. 즉, 선생님과 제자 사이에 ‘체벌’이란 용어 자체가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선생님에게 맞으면 다른 선생님에게 맞은 것보다 더 아팠다.
셋째, 기록하는 습관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철저하고 치밀하셨다. 이런 성격이 글로써 나타내는 공부이던, 이미지로 나타내는 사진이나 영상에도 기록의 중요성이 잘 반영되는 것 같다. 나는 대학도 아닌 곳에서 그것도 상업이란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강단 위에 그분이 꼼꼼히 정리한 강의 노트를 보는 것도 이상하였지만, 가끔은 사진에 관련된 강의 노트를 보면서 의아해하곤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미 홍익 미대에 출강을 하셨고, 그분의 미래는 서서히 사진작가로서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넷째, 상과 대학 출신이며, 상업 선생님임에도 불구하고 계산적이 아니고, 아주 순수하시고 인간적이신 점이다. 요즈음은 문학이든 예술적이든 좀 어렵고, 신비로워야 먹혀들어가는 시대이다. 선생님의 작품은 복잡한 것이 없어, 아주 이해하기가 쉽다. 그 당시의 세인들에게 잘 알려진 작품이고, 오늘날에 선생님이 사진작가로서 명성을 남겨준 아래 두 작품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해하기 쉽다고, 작품 속에 그분의 철학이 안 담긴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고등학교 졸업식을 끝내고, 서울 무교동 어느 막걸리 집에 우리 반 전원이 모였다. 그때 막걸리를 드시면서 하시던 “이제부턴 나를 선생님으로 부르지 말고, 형님이라고 불러, 알겠니?”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III. 사진작가 및 사진학과 교수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의 선생님의 성격 외에도 사진작가로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에는 남다른 특징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섯째, 선생님은 우리 것을 사랑하셨다. 1960년 초반의 공모 작품들을 보아도 알 수가 있지만, 1980년 초반 20여년 간은 주로 한국의 전통미나, 농촌의 인간상을 작품에 많이 담았다.
여섯째, 행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이시다. 80년대 이후에는 도시와 관련된 소재를 작품에 많이 담았고, 외국 기행 사진이 점차 主流를 이룬 것을 보면 그것을 대변한다. 외국 것에 눈을 돌린다는 것은 단순한 사대주의 사상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사진이란 영역이 거의 불모지나 다름이 없었기에 외국 것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었으리라.
일곱째, 후학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지 알고 있었다. 요즈음 흔히들 ‘디카’라고 하는 디지털 카메라가 나왔으니까 망정이지, 계속 필름을 쓰는 종전 카메라로 작품 활동을 하셨다면, 개인이 찍은 필름의 길이가 200Km 정도는 되어 아마도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을지도 모른다.
즉, 상업 교사 출신답게 어떻게 기록하고 어떻게 정리를 하여야 하는지, 아래 참고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작업실이며 개인 강의실이기도 한 선생님 집 대림빌라 다락방에 가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정말 특출난 정리 기록 및 감각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느껴졌다.
선생님은 단순한 ‘사진찍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 철학을 심어주는 감각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셨다.
IV. 명예 교수 및 인생선배
‘세월은 주마등 같다’고 했는가? 2000년대가 접어들자 선생님은 정년퇴임을 하셨다. 그런데 내가 미국에서 소식을 들은 바로는 더 바빠지셨다고 했다. 몸담았던 대학의 명예 교수로서, 대학원 학생들이 다락방 강의, 원고 청탁 등이 그 주된 이유였다.
선생님의 그 많은 이력을 일일이 모두 소개할 수가 없어서 위에는 언급을 안 했지만, 선생님의 이력 가운데는 ‘1983 KBS 이산가족찾기 이벤트 사진촬영 담당 20,000매’... 라는 이력이 있다. 선생님의 말씀 중에는 발전과 변화도 좋지만, 결국은 우리나라가 잘 되고, 우리 민족이 잘 되려면 밖에서 흡수한 발전과 변화가 다시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다.
위에 언급한 이산가족찾기 이벤트 사진 촬영에도 보듯이 선생님은 통일에도 지대한 관심을 두고 계시다. 내가 알기에는 선생님은 약 140개국 정도 풍물을 작품에 담았던 것을 알고 있다. 그분이 아직도 자유롭게 담지 못한 나라가 있다면 어디겠는가? 유일하게 지구 위에 존재하는 휴전선이라는 허리띠로 두 동강이 난 북한만 빼고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현대 사진학 자체가 기교나 기능면이 중시되어 그것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작품에 반영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아니, 선생님이 싫어하신다. 철학이 없는 사진은 죽은 사진이기 때문이다. 또한, 선생님은 학생들의 감각과 창의성을 존중한다.
항상 입버릇처럼 말한 것이 있다면, “요즈음 학생들은 감각과 창의성이 부족해. 하나 건진 것이 있다면, ‘병헌’이 뿐이지.” 민병헌은 나와 동기 동창이다. 젊은이들과 신진 사진작가들에게 잘 알려져 그 명성만큼이나, 세계적으로 커가는 민병헌이가 대견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선생님의 작품에서 사진 속의 철학이란, 우리가 평범히 살아가는 ‘삶의 진실’이다. 그분은 항상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 배어 있는 인간의 숨결과 체취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춘다.
V. 글을 맺으며
나는 등단은 고국에서 하였지만 미국에 거주하니, 가끔 고국에 나오더라도 은사님들을 뵐 기회가 없다. 다만, 인터넷 혁명 덕분에 在美 詩人으로 멀티 시문학 평론가로서 사이버 세계를 통하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번에도 선생님과의 우연한 안부 통화에서 “호진(필자의 본명)아, 우리 집에 한번 왔다 가라. 내가 거동이 불편하여 밖에 못 나간다.” 이런 말만 듣지 않았다면 또 슬쩍 동기들만 만나서 술이나 먹고, 출국하였을 것이다. 마침 高 3때 같은 반이던 최상용을 만나서 찾아뵙기를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선생님의 탱크 같고, 장군 같으신 풍모는 여전하지만, 파킨슨병에 걸려 요즈음 고생하신다는 뜻밖의 비보(悲報)를 접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옛 제자들을 보자, 입가에는 엷은 미소와 생기가 돈다. “상용아, 저기 계단 위의 첫 번째 스위치 버튼을 누르고 불을 꺼라” 하신다.
이건 사진이 아니라 우리 詩文學에서도 멀티포엠의 주류로 흘러가듯이 스크린에 비친 멀티 영상사진이었다. 물론 철학이 담긴 사진 이미지의 전개에 따라 음악도 맞춤으로 삽입되었다. 선생님이 직접 만드신 것이다. 여긴 단순한 사진 작업을 하는 다락방이 아니라, 스캐너, 복사기, 컴퓨터, 자료, 등을 갖춘 선생님이 이사 후에 10여 년 걸쳐 만드신 40여 평의 최첨단 강의실이었던 것이다.
선생님의 강의가 끝나자, 우린 왠지 나이를 핑계 삼아 공부를 게을리 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졌다. 선생님은 그 불편하신 몸으로 계단의 난간을 잡으시면서 아래층까지 우릴 배웅하였다. 그날따라 추운 날씨였지만, 따뜻한 온기가 가슴에 밀물처럼 밀려왔다.
선생님! 부디 건강하소서...
글쓴이=박만엽 재미 시인, 멀티 시문학 평론가 (2009년 2월 19일)
△ 나는 혜화동 시절, 보성고 졸업생(61회)이다. 1968년 보성고 1학년 5반 그때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 홍순태 사진작가님이다. 선생님께서는 서울 상대를 졸업하신 엘리트 멋쟁이 선생님이었다. 좋은 직장을 마다하시고 선생님이 되신 이유는 교직이 긴 방학이 있어 사진 작가로 활동하기 좋아서였다고 하셨다. 그해 선생님께서는 서울 창경원(창경궁)에서 찍으신 위의 사진 '영압'(Duck)으로 제17회 국전에서 특선 수상하셨다. 우리 반 모두 경복궁(?)으로 국전 단체 관람을 갔었던 기억이 난다. 그후 선생님께서는 해마다 국전에서 수상을 하셨고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하셨다. 몇 년 후 선생님께서는 보성고를 떠나 신구전문대 사진학과 교수로 가셨다. 보성고 2학년 때 국어를 가르쳐 주셨던 한정식 선생님께서 홍순태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사진에 입문하셨다고 들었다. 한 선생님께서도 국전에서 수차례 수상하셨고 중앙대 교수로 가셨다. 사진 이야기가 나오면 보성고 시절 두 분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 2021.08.22 보성고 61회 졸업생 김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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