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만치에 가을이 /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고추잠자리가 날고 있다. 어디서 왔을까. 창 너머로 보이는 초등학교 담장 곁에 서 있는 가죽나무 우듬지 위로 무리 지어 날고, 멀리 보이는 도봉산의 암봉 뒤로는 끝없이 흰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파란 하늘의 빈틈을 메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가을을 예감한다. 그러고 보니 입추가 지난 뒤에도 지칠 줄 모르고 그악스럽게 울어대며 밤잠을 설치게 하던 매미소리도 어느 결엔가 잦아들었다. 저녁나절 천변을 걸으면 맹위를 떨치던 폭염도 사라졌는지 불어오는 바람결엔 서늘한 기운이 스며있어 가을을 예감하게 한다.
코로나로 인해 변변한 나들이 한 번 못해 보고 지낸 여름이라서 은연중에 빨리 가을이 오길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사계절이 뚜렷하던 우리나라도 이젠 더운 여름과 아주 더운 여름, 추운 겨울과 아주 추운 겨울만 있다는 농담이 생겨난 지 오래지만 그래도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와 자리바꿈을 하는 것이다.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최소한의 외출과 만남을 줄이면서 너나없이 자연스레 초록목숨들과의 거리가 한 뼘은 더 가까워진 게 사실이다. 누군가를 만나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던 일상이 낯설어진 만큼 사람들은 틈만 나면 산으로 들로, 물가를 찾아 마스크에 갇혀 답답하던 숨을 몰아쉬고 자연에게 위로를 받고자 했다.
봄이 빛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향기의 계절이다. 잿빛의 겨울 숲에 봄이 찾아오면 햇살이 닿는 곳마다 눈부신 꽃들이 피어난다. 노루귀, 변산바람꽃, 복수초, 제비꽃과 같은 고운 봄꽃들이 피어나고 연두에서 신록으로, 신록에서 초록으로 번져가는 숲의 변화는 마치 빛의 향연장을 방불케 한다. 봄꽃이라고 향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화려한 꽃빛에 마음이 마구 설레어 봄이라는 계절은 좀처럼 향기에 집중할 수가 없기 십상이다.
거기에 비하면 가을은 향기로 말을 거는 계절이다. 하루에 한 뼘씩 키를 높이는 파란 하늘로 인해 하늘과 땅 사이는 점점 벌어지고, 한껏 넓어진 그 틈 사이로 가을바람이 향기를 싣고 불어온다. 어느 해 가을이었던가. 함께 숲을 산책하던 친구는 하트 모양의 나뭇잎 하나를 따서 내게 건네며 향기를 맡아 보라고 했다. 어린 시절 즐겨 먹었던 달고나처럼 달달한 향기가 났다. 그 잎은 다름 아닌 계수나무 잎이었다. 이젠 웬만한 나무 이름쯤은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그땐 나무에 대해 무지했으므로 마냥 신기하게만 느껴졌었다.
그런가 하면 가을꽃들의 향기는 또 얼마나 그윽한가. 벌써 도로변엔 코스모스가 한들거리고 벌개미취 같은 가을꽃들이 향기를 내지르기 시작한다. 조금 더 계절이 깊어지면 산국, 감국, 쑥부쟁이, 구절초 같은 국화과의 꽃들이 피어나면 가을은 향기로 가득 찬다. 그 은은하면서도 깊고 맑은 향기는 절로 깊은 숨을 들이키게 만든다. 향기를 내뿜는 것은 꽃만이 아니다. 가을볕에 익어가는 과육들이 뿜어내는 달큰한 향기와 숲에서 나는 낙엽이 발효되는 냄새도 절로 코를 벌름거리게 만든다.
저물녘에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좋아 천변으로 난 자전거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달리며 가을이 가까이 와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19로 인해 한치 앞을 가늠할 수는 없어도 계절은 어김없이 돌고 돌아 저만치에 가을이 와있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골목 어귀에 잔뜩 쌓인 쓰레기봉투를 보았다. 코로나로 인해 배달이 늘면서 쓰레기 배출량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쓰레기를 배출하는 인간은 일생동안 약 500톤의 쓰레기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오고가는 계절의 변화를 읽으며 오감으로 자연의 호사를 계속 누리려면 나라도 쓰레기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글=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
[출처] 글로벌이코노믹 2021-08-18
/ 2021.08.20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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