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생태 과학 칼럼 모음

[고두현의 문화살롱] 시인 괴테는 뛰어난 생물·광물학자였다 (2021.08.13)

푸레택 2021. 8. 13. 20:50

■ 시인 괴테는 뛰어난 생물·광물학자였다 / 고두현 시인

18세기 유럽 전래된 은행나무 연구
연애편지에 시·은행잎 함께 보내

희귀광석 수집 .. 수석만 6500개
그의 이름 딴 괴테꽃·괴테石까지

"모든 과학은 시에서 태어났다"
인문·과학정신, 문학으로 융합

△ 괴테의 친구 요한 하인리히 티슈바인이 이탈리아 여행 중인 괴테의 모습을 그린 ‘캄파냐의 괴테’

유럽 사람들은 은행나무를 18세기 초에 처음 보았다. 원산지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래된 은행나무의 후손이었다. 한 독일인 의사가 일본에서 근무하다 귀국할 때 종자를 갖고 갔다.

독일 시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는 은행나무에 무척 매료됐다. 괴테는 정원에 심어둔 나무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생육 과정을 일일이 기록했다. 그중에서도 부채 모양의 잎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나무가 어릴 땐 부채꼴의 절개선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선명해져 두 개의 잎처럼 보이는 데 주목했다.

그는 1815년 가을, 연인에게 쓴 편지 속의 ‘은행나무 잎’이라는 시에 은행잎 두 장을 붙여 보냈다. 시 첫머리를 ‘동방에서 건너와 내 정원에 뿌리내린/ 이 나뭇잎엔/ 비밀스런 의미가 담겨 있어/ 그 뜻을 아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오’라고 시작한 그는 ‘둘로 나누어진 이 잎은/ 본래 한 몸인가?/ 아니면 서로 어우러진 두 존재를/ 우리가 하나로 알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으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속마음을 전했다. ‘이런 의문에 답을 찾다/ 비로소 참뜻을 알게 되었으니/ 그대 내 노래에서 느끼지 않는가./ 내가 하나이며 또 둘인 것을.’

둘로 갈라진 은행잎에서 ‘서로 어우러진 두 존재’의 합일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그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암수 딴 그루인 은행나무의 수태 과정을 ‘둘로 나누어진 한 몸’의 의미와 접목한 감성도 남다르다.

그는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도 유명하지만, 1만2000행으로 이뤄진 장시 《파우스트》 등 많은 명시를 남긴 시성(詩聖)이다. 그의 시적 감수성은 어릴 때부터 심취한 책과 폭넓은 생물·광물학적 지식에서 싹텄다.

그의 생물학적 업적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그는 수많은 식물의 뿌리와 줄기, 잎, 꽃이 변하는 모양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스케치했다. 요즘 컴퓨터로 확대해야 보이는 미세한 잎맥까지 그렸다.

△ ‘괴테 식물(Goethe plant)’로 불리는 칼랑코에(왼쪽)와 괴테의 이름을 딴 광물 침철석(goethite)

《식물변형론》이라는 책에서는 식물 잎의 변화를 세분화하고, 꽃을 이루는 기관은 잎이 변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밝혔다. 이 같은 노력 덕분에 그의 이름을 딴 ‘괴테 식물(Goethe plant)’이 등장했다.

그는 광물·지질학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이름을 딴 광물까지 있을 정도다. 1806년 독일에서 발견된 침철석(針鐵石)의 명칭이 ‘괴타이트(goethite)’다. 그가 독일과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서 모은 수석만 6500여 점에 이른다.

그의 관심은 동물해부학까지 미쳤다. 포유동물의 해부도 중 ‘개의 두골’ 그림은 정면과 측면을 입체적으로 그린 것이다. 이를 합쳐 보면 현대과학에서나 볼 수 있는 3차원 구조와 같다. 이 같은 연구 결과를 담은 과학서적이 14권이나 된다.

그는 이런 인문·과학 정신을 시로 융합해냈다. 그러면서 “다들 과학이 시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시대가 바뀌면 두 분야가 더 높은 차원에서 친구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내다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시와 과학을 접목한 그의 사상은 근세 서양철학과 음악, 미술의 자양분이 됐다. 헤겔과 쇼펜하우어 등 사상가와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 음악가, 세잔, 모네 같은 화가들도 그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일생을 통해 ‘시는 모든 과학의 어머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의 가르침은 현대 문명사에도 새로운 상상력을 꽃피게 해줬다. 그러고 보니 시야말로 과학기술이라는 새 생명을 창조하는 잉태의 과정이다.

괴테는 독일을 대표하는 대문호이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상으로 나라를 이끈 국가경영자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시는 ‘과학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경영의 어머니’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롯데그룹 창업자 신격호 회장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여주인공 샤를롯데의 애칭을 따서 기업명을 짓고 서울 롯데월드타워에 괴테 동상까지 세운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 테슬라도 괴테 시에서 '교류 발전' 영감 얻어

20세기의 천재적인 전기공학자로 불리는 니콜라 테슬라는 괴테의 시를 암송하다가 자기장과 교류 발전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어느 날 퇴근길에 공원을 거닐던 그는 《파우스트》의 한 구절인 ‘날개가 있어 밤을 따라갈 수만 있다면’을 읊조리다가 번개 같은 영감을 얻었다. ‘그래, 태양처럼 전류를 먼 곳까지 보낼 수 있는 교류 발전기를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그가 까다롭고 정교하기로 유명한 《파우스트》를 거의 통째로 암송할 수 있었던 것도 놀랍지만, 여기에서 ‘전기 혁명’의 번뜩이는 착상을 떠올렸다니 더욱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그의 이름이 전기자동차와 우주산업 분야에서 신기원을 열어가고 있는 일론 머스크의 회사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니…

글=고두현 시인

[출처] 한국경제 2020.07.25


독일 문학의 상징,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 괴테(1749년~1832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변호사 생활을 했지만 결국 문학에 헌신했다. 바이마르 아우구스트 대공의 후원을 받으며 수많은 작품을 썼고, 이탈리아 여행에서 알게 된 실러와 막역지우가 되었다.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23세 때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82세에 완성한 《파우스트》는 문학사에 길이 남는 걸작으로 꼽힌다. 대표작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등이 있다.

괴테가 활동했던 시기는 유럽의 문화가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건너가는 거대한 물결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그는 이 과도기의 양쪽 손을 맞잡아 변화의 물결이 원활하게 흐를 수 있도록 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엄숙하고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는 고전주의에 이미 식상해 있던 유럽인들은 낭만적이고 감미로우며 자유롭기까지 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며 젊은 작가 괴테의 출현에 열광했다. 실연한 젊은이의 감상적인 러브 스토리를 절절한 언어로 풀어낸 괴테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로맨틱한 감정들을 유럽 인들에게 선물했고 유럽인들은 이에 열렬한 성원을 보냈다.

괴테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머물면서 소설, 희곡, 서정시 등 다방면의 작품들을 양산해냈으며, 그의 가장 후기작인 《파우스트》는 문학사상 걸작으로 손꼽힌다. 독일의 옛 전설을 바탕으로 집필한 산문 희곡 《파우스트》는 지금도 수많은 연극과 영화로 공연되면서 사랑받고 있으며, 괴테의 모든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대표작이다.

그렇다면 괴테는 어떻게 문학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을까? 우리는 대부분 위인들이란 그저 태어났을 때부터 사상가로, 저술가로, 음악가로 태어났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위인들도 한때는 문제아였으며, 반항아였고 또 완전히 다른 분야에 종사했던 예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괴테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는 왕의 법률고문관을 지낸 중산층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네 엘리자베트 텍스토는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괴테는 여유롭고 귀족적인 생활을 즐기며 이탈리아 등지로 여행을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괴테는 괴팅겐 대학으로 진학해 고전을 공부하려고 했으나, 1765년에 아버지의 모교인 라이프치히 대학 법학부에 진학하게 된다. 이곳에서 괴테는 한때 법률시보 등의 일을 하며 법조인으로 지내지만, 라이프치히의 사교계에 입문하며 문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괴테는 작가 겔러트의 강의를 듣고, 빌란트의 작품을 접하면서 유럽의 예술 양식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라이프치히에서 3여 년을 보낸 후 1768년 가을, 괴테는 각혈을 하는 등 건강에 문제가 생겨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온다.

고향에서 괴테는 연금술, 점성술 등 신비주의에 몰두하다가, 건강이 회복된 후 법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슈트라스부르로 향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천재시인 헤르더를 만나면서부터 그는 무한히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접한다. 법률적인 사고방식과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비로소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 정신의 확장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많은 역사가들은 헤르더와의 만남이야말로 괴테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말한다.

1771년 괴테는 고향에서 개업 변호사가 되었는데, 변호사를 하면서도 《프랑크푸르트 학자보》를 통해 작품활동도 계속했다. 1772년에는 베츨러의 제국 고등법원에서 법률가로 일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며 문학에의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베츨러에서 괴테는 약혼자가 있던 샤를로테 부프와 비극적인 사랑에 빠졌고, 이를 바탕으로 1774년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한다. 이 소설에 공감한 젊은이들 사이에 자살이 유행하여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774년에는 필생의 대작인 《파우스트》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775년 11월, 괴테는 바이마르로 향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군주 아우구스트 대공이 그를 초청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트 대공과의 만남은 괴테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부여했으며, 괴테는 여기저기로 여행을 다니면서도 끝내 바이마르로 돌아와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바이마르에서 괴테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공무원으로 많은 요직들을 거쳤고, 그곳에서 탁월한 업무 능력을 보이기도 했다. 이 같은 경험은 괴테가 1829년 완성한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에 잘 반영되어 있다.

또한 이 무렵 궁정관리의 부인이었던 샤를로테 폰 슈타인과 만난다. 괴테는 그녀와 12년간 만나면서 1,500여 통의 연애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슈타인 부인과의 만남은 괴테의 정신과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 기간 동안 괴테는 〈남매〉 〈나그네의 밤노래〉 등 뛰어난 작품들을 발표한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같은 생활이 반복되고 점점 많은 일에 시달리자 괴테는 과감히 바이마르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슈타인 부인과의 관계에 끝을 고하고 1786년 괴테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1786년부터 1788년까지 베네치아, 나폴리, 로마 등 이탈리아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고대 그리스 양식에서 인간의 원형을 발견하고 고전주의를 지향하게 된다. 괴테는 이런 깨달음을 작품 속에 충실하게 반영했으며, 이때 집필한 것이 1787년에 발표한 희곡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와 《에그몬트》 등이다. 한편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수많은 스케치를 남기기도 했는데, 1816년과 1829년에 괴테는 이때의 여행담과 스케치를 모아서 《이탈리아 기행》을 펴냈다.

1788년 4월, 바이마르에 돌아온 괴테는 모든 공직을 포기하고 문학과 과학에 몰두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는 한편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나 사랑에 빠져 곧 동거까지 하게 된다. 《타소》, 《로마의 비가》, 《식물변태론》 등을 연달아 발표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가 전 유럽에 퍼지자 1792년 괴테는 아우구스트 공을 수행하여 프랑스로 종군했고, 이때의 체험을 《프랑스 종군기》, 《마인츠 공방전》으로 남겼다.

한편 이탈리아 여행에서 만난 실러 또한 괴테의 문학에 영향을 준 인물이다. 1794년 실러가 기획한 잡지 《호렌》에 괴테가 참여하면서 그들의 우정이 시작되었고, 이는 1805년 실러가 죽기까지 계속되었다. 괴테와 실러는 서로를 찾아가 문학에 대해 장시간 논하기를 즐겼고, 이를 통해 괴테는 새로운 창작에 대한 욕구와 의지를 불태우곤 했다. 실러의 권유로 1798년 괴테는 《파우스트》를 다시 쓰기 시작했으며, 《빌헬름 마이스터의 도제시대》 《헤르만과 도로테아》 등을 완성했다.

△ 울리케 폰 레베초프: 일흔네 살의 괴테가 사랑에 빠진 열아홉 살 소녀로 《마리엔바트의 비가》의 영감을 주었다.

만년에 괴테는 바이마르 및 독일을 대표하는 문호로 큰 존경을 받았다. 이 시기에 바이마르는 독일 문화의 중심으로 괴테뿐만 아니라 실러, 리스트, 니체 등이 활약하며 전 유럽을 비롯하여 신대륙에서까지 방문객이 이어졌다. 이런 시대의 움직임은 괴테의 작품 속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1829년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를 완성했는데, 여기에는 당시 괴테의 이상향, 인생관과 사회관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1831년 7월에는 드디어 《파우스트》를 완성한다. 23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82세의 나이로 완성한 이 작품은 세계 문학사상 최대 걸작 중 하나이다. 이듬해인 1832년 3월 22일에 사망한 괴테는 그의 최대 후원자였던 아우구스트 대공과 친한 친구 실러의 곁에 나란히 묻혔다.

[출처] 다음백과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 2010)

/ 2021.08.13 편집 푸레택


https://youtu.be/pRf0ZHwBt2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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