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한 생존논리 저편엔.. 화려한 아름다움을 향한 진화도 일어난다 / 김태환 서울대 교수
사슴이 가진 멋진 뿔과 달리 빈약하고 볼품없는 다리.. 그러나 사자 나타나 도망갈 땐 뿔과 다리의 가치 전도
깃 활짝 편 공작·아름답게 노래하는 새들.. 생존엔 역행하지만 암컷 선택 따른 번식 이점이 단점 상쇄하고도 남아
사슴이 물가에서 물을 마시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다. 크고 다채롭게 뻗어 있는 멋진 뿔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그에 비하면 다리는 너무나 가늘고 허약해 보여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때 사자가 나타났다. 사슴은 죽어라고 뛰어서 사자를 상당히 따돌렸다. 하지만 숲길로 들어섰을 때 뿔이 나무에 걸려 사자에게 꼼짝없이 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슴은 탄식했다. “미덥지 못하던 다리가 나를 살리고 믿었던 뿔 때문에….”
이솝우화 가운데는 여기에 제시된 ‘샘물가의 사슴과 사자’ 외에도 사슴뿔과 다리의 대조를 주제로 하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새끼 사슴과 아빠 사슴’이라는 우화에서 새끼 사슴은 왜 아빠가 강한 뿔을 사냥개와 맞서 싸우는 데 사용하지 않고 무조건 달아나는지 묻는다. 아빠 사슴은 웃으며 대답한다. “그러게, 그런데 어쩌겠니. 개 짖는 소리만 들리면 무서워서 정신없이 달아나게 된단다.” 이처럼 뿔로 방어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빠른 다리로 포식자에게서 달아나는 것이 유일한 생존 전략인 사슴에게 대체 큰 뿔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히려 무거운 뿔이 도주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이러한 질문은 우화 ‘샘물가의 사슴과 사자’에서 더욱 첨예한 형태로 제기된다.
샘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본 사슴은 멋진 뿔에 스스로 매료된다. 물에 비친 뿔의 가상 이미지는 사슴에게 만족감을 준다. 그 만족감은 뿔이 실제로 어떤 기능을 하느냐와 무관하게 눈에 비친 뿔의 화려한 이미지를 통해 촉발된다는 점에서 미적 만족감이라고 할 수 있다. 빈약한 다리에 대한 불만도 화려한 뿔과 시각적으로 불균형을 이룬다는 데서 오는 불만이며, 역시 기능적 관점은 배제된 미적 판단이다. 그러나 사자가 등장해 오직 목숨을 건지는 것만이 긴급한 과제가 됐을 때 물그림자라는 가상의 세계에 빠져 있던 사슴은 갑자기 현실의 세계로 끌어내어 지고, 이제까지의 미적 판단은 의미를 상실한다.
사슴은 한가하게 물그림자를 바라보며 품평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사냥개조차 뿔로 대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슴으로서는 무조건 달아나야 하고 믿을 것은 다리밖에 없다. 아름다운 뿔은 이처럼 중대한 위기 상황에 직면해서는 무용지물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도주를 가로막는 치명적인 위험 요소임이 드러난다. 뿔이 나뭇가지에 걸린 사슴은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리면서, 너무 볼품이 없어서 큰 흠결이라고 여겼던 다리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는다. 뿔과 다리의 가치는 완벽하게 전도된다.
그렇다면 ‘샘물가의 사슴과 사자’는 미적 가치와 실용적 가치 사이의 괴리를 지적하고 더 나아가서 미적 가치의 허망함이나 실용적 가치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여러 다른 이솝 우화와 맥을 같이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여름을 허송한 매미와 겨울의 생존을 대비해 땀을 흘린 개미의 이야기도 미적인 가치와 실용적인 가치의 대립을 근간으로 한다.
우화 ‘농부와 나무’에서도 매미의 노래는 무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농부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 나무를 베어버리려 하자, 보금자리를 잃게 된 참새와 매미가 찾아와 나무를 베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면 나무에 계속 살면서 노래로 농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농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끼질을 한다. 그러나 나무에 구멍이 나면서 벌떼와 꿀이 나오자, 도끼를 던져버리고 나무를 잘 돌보기 시작한다. 농부에게 나무의 가치는 참새와 매미의 노래가 아니라, 열매나 꿀처럼 먹는 것에 있다.
이러한 고대의 우화들은 서양 근대 문화가 아름다움을 유용성과 대비되는 자기 목적적 가치로 정의하고 예술을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기술로 이해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아름다움과 생존의 필요성 사이의 날카로운 괴리가 널리 인식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매미의 노래를 의미 없는 게으름으로 폄하하고 먹고살 것을 장만하는 개미의 노동을 찬양하는 것은 아름다움과 예술을 유용한 것의 우위에 놓는 근대 낭만주의 이념의 대척점에 있는 태도이지만, 두 입장 모두 미와 유용성의 대립 구도를 설정한다는 점은 같다.
그런데 매미는 시급한 생존의 문제를 도외시하면서 놀기만 한 것일까? ‘매미와 개미’는 진짜 매미에겐 모함에 가까운 이야기다. 매미는 괜히, 심심해서, 편안하게 노래나 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수매미는 암매미를 불러들여 짝짓기를 하기 위해 운다. 즉 노래하는 매미는 자신의 존재를 다음 세대로 연장하는 가장 중요한 작업을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새들의 노래도 마찬가지다. 몸집이 작은 새들이 낭랑한 고음을 내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은 사람의 한가로운 휴식에 즐거움을 보태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새들은 노래로써 구애 행동을 하는 것이고, 그 행동의 의미 역시 번식을 통한 생존의 연장에 있다.
사슴의 뿔도 겉만 화려하고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필요한 기관이 아니다. 사슴의 크고 여러 갈래로 뻗은 아름다운 뿔은 사슴의 강인함과 성적인 왕성함을 나타낸다. 뿔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수사슴끼리의 대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암컷을 향해 강력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 멋진 뿔이 숲에서 나무에 걸려 죽음을 초래하는 일이 실제로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전체적으로 뿔이 번식에서 가지는 이점에 비하면 작은 위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매미와 개미’도, ‘물가의 사슴과 사자’도 자연에 대한 일면적 관찰을 인간 중심적으로 해석해 만들어낸 이야기인 셈이다. 그렇다면 위의 우화들은 자연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미와 유용성 사이의 문화적 대립을 자연에 투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우화 작가도 아닌 생물학적 진화론의 창설자 찰스 다윈도 동물 세계의 관찰에서 미적 가치와 실용적 가치의 괴리를 발견하고 고심했다는 사실이다. 다윈의 자연 선택의 이론에 따르면 생명체의 진화는 생존을 위한 적응의 결과다. 그런데 어떤 동물들은 생존에 불리한 방향으로 진화가 일어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공작의 화려한 깃과 긴 꽁지가 그 대표적 예이다. 깃을 활짝 편 공작의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지만, 그러한 호사스러운 아름다움을 위해서 공작은 적에게 잘 노출되고 날렵하게 도망가지도 못하는 단점을 감수한다.
자연 선택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그런 불리한 방향으로 진화가 이뤄졌을 리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윈이 고안한 이론이 성 선택(性選擇)의 이론이다. 화려한 깃을 가진 수컷이 살아남은 것은 그 아름다움에 끌리는 암컷의 성 선택의 결과다. 암컷의 취향이 화려한 깃을 가진 수컷에게 더 많은 번식의 기회를 제공하기에, 자연 선택과는 다른 방향의 진화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들, 아름다운 뿔을 가진 사슴도 이러한 성 선택의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 아름다움은 개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에서는 불필요한 낭비이거나 오히려 그것에 역행하는 면이 있지만, 암컷의 성 선택에 따른 번식의 이점이 그러한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이다.
다윈은 성 선택을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제2의 독립적인 원리로 간주한다. 즉 암컷이 수컷을 선택할 때 자연 선택, 즉 환경에의 적응성과는 무관한 독자적 기준에 따라 판단한다고 본다. 암컷은 생의 직접적 필요와 무관하게 아름다움 자체를 선호하는 미적 취향의 주체가 된다. 수컷이 암컷에게 배우자로 선택돼 번식에 성공할 가능성은 얼마나 생존에 유리한 특성을 지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달려 있다.
다윈의 성 선택 이론은 공작 수컷의 화려한 깃과 아름다움을 뽐내는 행동이 자연 선택이라는 진화론의 일반 원리로 설명될 수 없다는 난점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문제의 완전한 해결책을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왜 공작 수컷이 생존의 효율성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느냐라는 최초의 문제는 해명됐을지 몰라도, 이 해명은 다시 공작 암컷은 왜 잘 생존할 수 있는 수컷보다 아름다운 수컷에 더 끌리는 성향을 가지게 됐느냐는 질문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다윈은 이 질문을 접어둔 채 암컷의 미적 취향을 하나의 독립 변수로 설정함으로써 아름다움과 실용성 사이의 전통적 대립을 성 선택(아름다움의 선택)과 자연 선택(생존의 필요성)의 이원론으로 재생산한다.
현대의 진화론은 다윈이 생각한 암컷의 미적 취향 자체를 자연 선택 과정에서 일어난 적응의 결과로 해석함으로써 이론적 통일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왕성한 생명력의 지표이며 암컷의 미적 취향은 더 잘 생존할 수 있는 후손을 얻기 위한 현명한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듯 미적 취향이 자연 선택을 통해 획득된 분별 능력이라면 암컷의 성 선택은 독자적인 진화의 원리가 아니라 더 큰 자연 선택의 원리 일부로 흡수된다. 따라서 실용성과 아름다움 사이에 근본적 괴리가 일어날 가능성도 부정된다.
생존의 필요와 무관한, 심지어 그것에 역행할 수도 있는 미적 취향이 진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다윈의 생각은 1930년 영국의 통계학자 로널드 피셔의 논의로 보완된다. 피셔의 가설에 따르면 어떤 이유에서든 일단 암컷들의 여러 취향 가운데 어느 하나가 상대적으로 우세한 지위를 점하게 되는 순간부터, 그 취향과 그것에 적합한 수컷의 특질은 점점 더 강화되고 지배적으로 된다. 화려한 깃털에 대한 취향을 가진 암컷이 집중적으로 화려한 깃털을 가진 수컷과 짝짓기를 하면, 그들의 새끼들이 집단 내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게 된다.
이제 이 많은 새끼는 암컷일 경우 화려한 깃털에 대한 취향을, 수컷일 경우 화려한 깃털을 드러낸다. 화려한 깃털 취향은 더 유행하고, 화려한 깃털을 가진 수컷이 많아진 만큼 성 선택을 향한 수컷들의 화려한 깃털 경쟁은 점점 더 높은 수준에서 전개된다. 반면 화려한 깃털 취향이 퍼질수록 다른 취향, 이를테면 수수한 깃털 취향이 살아남을 수 있는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소수 취향에 따른 성 선택을 하는 암컷이 여전히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암컷의 ‘아들’은 인기가 없어서 성 선택 대열에서 탈락할 확률이 높다. 수컷의 화려한 장식과 암컷의 취향 사이에 긍정적 되먹임 고리가 만들어지면서 진화의 과정은 자연 선택의 논리에서 독립적인 메커니즘을 따라 급속도로, 가히 폭발적으로 전개된다.
낭만주의적 문학 이념에 익숙한 문학자의 입장에서는, 아름다운 것과 건강한 것(실용적인 것)이 서로 안정적으로 묶여 있다고 가정하는 정통적 자연 선택의 이론보다는, 비정한 적자생존의 논리 저편에서 사랑을 둘러싼 경쟁과 화려한 아름다움을 향한 위태로운 질주가 일어난다는 다윈-피셔의 생각이 훨씬 더 매혹적으로 느껴진다. 그렇게 본다면 아름다운 큰 뿔이 나뭇가지에 얽혀 죽음에 이르는 비운의 사슴에 관한 우화는 자연에 빗댄 인간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글=김태환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출처] 문화일보 2021.07.30
/ 2021.08.12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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