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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감상]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명화 100점 (2021.07.14)

푸레택 2021. 7. 14. 13:42

빈센트 반 고흐 명화 100점


비극적일 정도로 짧은 생애였음에도 불구하고 빈센트 반 고흐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가 중 하나다. 그의 작품은 20세기의 미술운동들, 특히 야수주의와 독일 표현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토대를 제공했다. 독실한 기독교인 집안에서 태어난 반 고흐는 생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종교적이고 관념적인 가치를 추구했다. 1869년에 그는 프랑스에 본점이 있는 구필 화랑의 헤그 지점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옛 대가들의 작품과 동시대 작품들을 포함해 다양한 장르와 범위의 그림들을 접할 수 있었으며, 판화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영국에서의 짧은 교사 생활을 끝내고, 네덜란드로 돌아와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1878년에 그는 브뤼셀의 신학 교육 과정에 등록하고, 2년 동안 선교사로서 활동했다. 반 고흐는 1880년에 진로를 다시 수정했다. 이번에는 쥘 브르통과 장 프랑수아 밀레처럼 노동자 계급을 그리는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작품의 판매를 담당했던 화상이자 동생인 테오의 조언을 받아들여, 반 고흐는 브뤼셀 왕립 미술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주로 독학을 했으며, 특히 에텐과 헤이그 주변의 시골 마을의 모습을 자연주의적인 양식으로 드로잉하곤 했다.

1885년, 북부 브라반트의 뇌넨으로 이사한 반 고흐는 그곳에서 그의 첫 주요 작품인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을 그렸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어둡고 칙칙한 색조는 그의 초기 작품들의 특징이다. 이를 통해 농촌 생활상의 진면목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당시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반 고흐는 안트웨르펜에서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을 연구하며, 색채 동화 방법에 있어 한걸음 더 나아갔다.

1886년 파리로 이주하면서, 반 고흐는 그곳의 전위적인 예술 기류에서 즉각적인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인상주의 화가들과 신인상주의 화가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역사화가인 페르낭 코르망의 작업실에서 수련을 쌓으며 에밀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 카미유 피사로 등의 미술가들과 친구가 되었다. 아돌프 몽티셀리와 폴 세잔, 폴 고갱, 폴 시냐크, 조르주 쇠라의 작품이 반 고흐의 작품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보색의 병치, 말하자면 좀 더 과학적인 방식으로 작업함으로써 발생하는 빛의 효과들을 탐구하며 색채 이론을 연구했다. 또 그는 「탕기 영감의 초상」(1887~1888) 같은 작품들에서 일본 목판화에 대한 관심을 더욱 발전시켰다.

테오와의 다툼과 각박한 파리 생활에 지친 반 고흐는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계획으로 1888년 남프랑스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열다섯 달 동안 「정물 : 열두 송이의 해바라기가 있는 꽃병」(1888)과 「밤의 카페 테라스」(1888)를 포함해, 200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다. 같은 해 10월, 고갱이 반 고흐의 '노란 집'으로 이사를 왔다. 두 화가는 몇 주간 함께 작업을 했으나, 결국 사이가 악화되어 급기야는 반 고흐가 자신의 귓불을 자르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고갱은 떠나갔고, 반 고흐는 병원에 입원했다. 1889년 5월, 반 고흐는 생 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찾아가, 그곳에서 1년간 머물면서 치료를 받았다. 그 와중에도 그는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고, 심오한 정신적 의미가 담긴 표현주의적인 작품 「별이 빛나는 밤」(1889)을 그렸고, 또 병원 근처에 있던 작은 숲의 짙은 삼나무와 올리브 나무도 자주 그렸다. 뿐만 아니라 그가 좋아하던 밀레와 오노레 도미에,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들을 모사하기도 했다.

1890년에 반 고흐는 파리 근교의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갔다. 그는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했으며, 이 시기에 제작된 후기작들을 보면 빠르고도 투박한 붓놀림과 어떤 영감을 받은 듯한 색채의 사용이 돋보인다. 이 중에서도 특히 강렬한 인상을 주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은 독특한 더블 스퀘어(double square) 크기의 캔버스 구성을 보여준다. 반 고흐의 후기 작품에서 간혹 이런 작품들이 보인다. 1890년 7월 27일, 그는 근처 들판을 서성이다 스스로 가슴에 총을 쏘았다. 이틀 후 반 고흐는 동생 테오가 곁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테오에게

반 고흐가 남긴 방대한 양의 회화와 드로잉은 별개로 하더라도, 그가 썼던 수많은 편지를 통해 우리는 그의 인생을 자세히 알 수 있다. 편지의 대부분은 동생 테오에게 쓴 것이다. 화상이었던 테오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주로 다루었다. 이 편지들은 반 고흐의 작품들에 대한 중요한 정보와 그의 생각과 일상, 연애 실패담, 우울증, 그리고 동생과의 형제애의 성격까지 속속들이 알려준다.

둘의 형제애는 매우 두터웠다. 빈센트가 비록 짐인 존재였다고는 하나, 테오의 감성적인 삶에 있어 그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테오는 그런 존재인 형을 재정적, 정신적으로 끝까지 지원해주었다. 편지에 따르면 두 형제는 격렬히 싸운 적도 있었지만, 테오의 결혼 전까지는 함께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 형에게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며,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던 테오의 삶은 빈센트의 죽음 이후 급격히 무너졌다. 테오는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했으며, 석 달 뒤엔 위트레흐트의 오퇴유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그곳에서 1891년 1월 세상을 떠났다. 1914년 테오의 시신은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있는 빈센트의 묘지 옆으로 이장되었다.

이 남자는 미치게 되거나, 아니면 시대를 앞서가게 될 것이다. ㅡ 카미유 피사로 (네이버 지식백과)

[영상출처] 짧고 굵은 지식(유튜브)


https://youtu.be/vtaw8s0eNtA

https://blog.daum.net/mulpure/15856461

 

[전대길의 CEO칼럼] 착한 고흐, 못된 고갱 (2021.07.12)

■ 착한 고흐, 못된 고갱 / 전대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에 삶에 관해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들의 독특한 인생역정을 알아보고 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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