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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prise] 로댕도 숨기고 싶어 한 그의 사생활, '까미유 끌로델' 찬란한 비극을 품었던 한 여인의 삶 (2021.07.02)

푸레택 2021. 7. 2. 12:39

■ 로댕도 숨기고 싶어 한 그의 사생활

▲ 중년(까미유 끌로델,1893-1899, 청동, 오르세 미술관)

나이 든 여인이 한 남자의 어깨를 감싸고 어디론가 이끌고 있다. 이 중년의 남자는 체념한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발을 떼고 있다. 하지만 미련 한 자락이 남았는지 뒤에 있는 여인에게 뻗은 손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젊은 여인은 무릎을 꿇은 채 그에게 가지 말라고 애원하듯 두 손을 뻗어 떠나는 그를 붙잡으려하고 있다.

이 작품은 까미유 끌로델이 만든 중년이란 작품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젊음, 사랑, 열정 같은 것이 사라지는 것이 운명이라고 표현한 작품이지만 이 작품은 그보다 절절한 사연이 들어 있다. 10년 넘게 청춘을 다 바쳐 사랑했던 로댕이, 그의 사실혼 관계에 있던 여인에게 돌아가고 홀로 버려진 그녀의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자존심 때문에 차마 이렇게 매달릴 순 없었지만 작품을 통해서 그녀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으리라. 로댕은 그녀의 마음을 읽기는커녕 자신의 사생활이 담긴 이 작품이 공개되는 게 두려워 작품을 의뢰한 정부에 작품 의뢰를 취소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그는 이미 거장이 되어 그럴 만한 힘을 가졌고, 그의 바람대로 주문은 취소되었다.

인연의 시작


까미유 끌로델(1864-1943)은 프랑스 북부지방에서 등기소 소장인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 사이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까미유가 태어나기 전 첫 아들이 생후 2주 만에 죽자 슬픔에 빠진 엄마는 다음 아이가 아들이길 바랐다. 하지만 딸이 태어나자 실망했고, 실망은 딸에 대한 미움으로 번졌다. 죽은 아들을 기리는 의미로 이름마저도 까미유라는 중성적인 이름으로 지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로 축복받지 못한 존재였다.


어린 시절부터 항상 주머니에 작은 칼을 지니고 뭔가를 깎고 만들기를 좋아했던 소녀는 우연히 숲속에서 괴물 형상의 재앵이란 바위를 발견한다. 신기하게 생긴 이 바위를 진흙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조소에 관한 본능이 깨어난다. 이어서 나폴레옹 흉상, 비스마르크, 다비드와 골리앗에 관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온 몸에 흙이나 묻힌 채 고집 세고 천방지축 돌아다니는 이런 딸이 못마땅했지만 아버지는 그녀의 재능을 읽어내고 키워준다.

1879년, 아버지는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에게 그녀의 작품들을 보여 주었다. 부셰는 그녀의 천재성을 단박에 알아봤다. 부셰는 그녀에게 조각의 기초를 알려주는 한편, (당시만 해도 공립학교는 여자에게 미술 교육이 금지되어있었다) 사립학교인 콜로라시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본격적으로 조각수업을 받을 수 있게 도와준다. 이곳은 모딜리아니의 부인 잔 에뷔테른, 인상파 화가 베시 멕니콜도 다닌 곳이다. 그 과정에서 부셰는 그녀의 작품들을 교장에게 보여주었는데, 교장은 로댕과의 유사성을 언급하며 그에게 사사를 받은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녀로써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를 계기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을 갖게 된다.

까미유는 노트르담 데 샹 거리에 친구들과 작업실을 구해 작품을 만들었고 간간히 부셰는 이곳에 들러 그녀를 지도했다. 1882년 그녀는 하녀인 엘렌을 모델로 조각을 만들어 살롱전에 첫 출품했다. 1883년 부셰가 공모전에 당선되어 로마로 떠나게 되면서 그의 제자들을 친구인 로댕에게 맡긴다. 이렇게 19살의 까미유와 43살 로댕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불꽃


예감대로 로댕은 까미유의 재능을 알아봤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그에겐 이미 20년 전, 그가 무명일 때부터 지원해주고 돌봐준 연상의 여인 로즈 뵈레가 있었다. 정식으로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둘은 사실혼 관계에 있었으며 둘 사이에는 까미유보다 두 살 어린 아들이 있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사람 마음. 접어도 접어도 커지기만 하는 그 마음은 결국 그를 고백에 이르게 만든다.

"그대는 나에게 활활 타오르는 기쁨을 준다오. 내 인생이 구렁텅이로 빠질지라도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슬픈 종말조차 내게는 후회스럽지 않아요. 당신의 그 손을 나의 얼굴에 놓아주오. 나의 삶이 행복할 수 있도록, 나의 가슴이 신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내가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몽롱하게 취한 상태에 있다오." -로댕의 편지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시인이라더니. 하늘과 같은 최정상급 조각가가 이런 편지를 보내왔으니 가슴 떨리지 않을 수가 있으랴. 문제는, 술은 깨기 마련이고 사랑은 식기 마련이라는 것. 다른 사람들은 훤히 보이는 뻔한 결말이 사랑에 빠진 남녀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굳이 보려하지 않는다. 현실의 달콤함이 너무 크니. 그는 그녀를 통해 다시금 예술혼을 불태웠고 그녀는 그의 모델이 되고, 조수가 되고, 연인이 되었다.


▲ 좌: 사쿤탈라 (까미유 끌로델,1888, 로댕박물관) / 우: 영원한 우상(로댕,1889, 로댕박물관)

왼쪽의 작품은 까미유가 만든 사쿤탈라(고대 인도의 칼리다사의 희곡)이다. 여인은 지친 듯 힘없이 남자에게 기대고 있고 남자는 이제 아무 걱정 말라는 듯이 격정적으로 그녀를 껴안고 있다. 그녀의 심리적 의존 상태와 로댕의 그녀의 뜨거운 사랑을 암시하는 이 작품은 1888년 살롱전에 출품되어 극찬을 받으며 대상을 차지한다. 오른쪽 작품은 로댕의 영원한 우상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남자는 여인의 가슴 아래 두 팔을 뒤로한 채 그녀를 숭배하듯 기대어있다. 여인 또한 팔을 뒤로 한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두 작품은 서로 느낌이 닮아있다. 까미유가 만든 석고 작품이 로댕의 작품보다 1년 앞선 것이니 이 작품에 대해서 로댕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오해는 사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많은 작품들이 표절 시비에 휩싸였다. 이 작품은 외려 로댕이 까미유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논란도 있었다.

십년 동안 둘은 많은 시간을 함께했고 숱하게 아이디어를 공유했으며 작품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존중했다. 이렇게 같이 지내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일이다. 지옥의 문, 칼레의 시민들, 입맞춤 등 로댕의 걸작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고 사쿤탈라, 지강티와 같은 걸작들이 까미유의 손에서 나왔다. 특히 지옥의 문에 등장하는 손이나 발은 까미유가 전담하다시피 만들었으니 실력과 감성이 비슷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로댕의 각서


1886년, 언제 다시 로즈에게 돌아가 버릴지 불안해하며 예민해진 까미유에게 로댕은 각서까지 썼다. 로즈와 헤어지고 그녀에게만 충실한 남자가 되기로.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자신에게 헌신해온 로즈를 차마 버릴 순 없었다. 그런 채로 로댕은 둘만의 아지트를 마련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랑을 하고 창작을 했다. 까미유도 열정적으로 창작활동을 했지만 마지막 작품의 서명란에는 로댕의 이름만 들어갔다. 이 시기 그녀의 작품수가 적은 이유다.


막장 드라마의 단골소재처럼 로즈가 까미유를 찾아와 난리를 쳤다. 이 장면을 목격한 로댕은 까미유를 내버려둔 채 로즈를 따라 나선다. 게다가 까미유는 로댕의 아이를 임신하고 원하지 않게 아이를 유산하지만 로댕은 그녀를 돌보지 않는다. 혼자서 임신과 유산을 오롯이 겪어야했던 까미유는 그와 이별을 결심한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중년이다.

▲ 왈츠(까미유 끌로델,1895-1905, 로댕박물관) 로댕미술관

이 작품은 까미유의 걸작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왈츠다. 로댕과 이별하고 모든 에너지를 작품에 쏟았다. 이 시기에 잠깐 음악가 클로드 드뷔시를 만났는데 까미유의 거절로 연인 관계로 발전되지는 않았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재료로 복재되었는데 까미유는 이 작품을 드뷔시에게 주었고 드뷔시는 평생 간직했다.

불행은 까미유만의 몫


좋은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녀는 작품 속에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녹여냈다. 전람회에 해마다 출품도 했지만 평론가들은 로댕의 아류로만 그녀를 폄하했다. 로댕의 명성은 쌓여가고 까미유의 존재는 잊혀갔다. 급기야 까미유의 출품작이 도난 당하는 일이 발생하고 그녀는 로댕이 꾸민 짓이라고 단정 짓는다. 청춘도 사랑도 다 가져갔으니 작품도 가져갔으리라, 강박이 생겼다.


그가 성공할수록 그녀의 좌절은 깊어가고 술 없이 잠들기 어려운 밤들이 지나갔다. 몸도 마음도 망가져가며 점점 더 그녀는 자신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키고 은둔한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에 까미유는 자신의 많은 작품을 부셔버려 대다수가 소실되었다.

1913년, 그녀를 그나마 지켜주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족들은 그녀를 정신병원에 넣는다. 49살의 나이에 정신병원에 보내진 그녀는 이후 사망할 때까지 30년을 단 한 번도 세상 밖으로 나와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까미유의 어머니는 평생 그녀를 미워해서 단 한 번의 방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워하는 마음 속에는 평탄한 인생을 살지 못한 딸에 대한 안타까움과 실망, 그리고 그것을 직시하기 힘든 마음들이 뭉뚱그려져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런 마음의 바탕에 사랑이 있었음을 함부로 간과한 말들이 아닐는지.

1917년, 로댕과 로즈는 결혼한다. 결혼 2주 후 로즈는 사망했고 로댕 또한 몇 달 후 눈을 감는다. 26년 후인 1943년, 까미유도 눈을 감았다. 아무도 장례식에 오지 않았고 까미유는 무연고 시신들과 함께 몽파메 묘지에 단체 매장되었다. 시인이자 외교관이었던 동생 폴은 까미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그녀에게 준 재능은 모두 그녀의 불행을 위해 쓰여졌다.

덧붙이는 글 | 《까미유 끌로델》 (김이선 옮김, 마음산책),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 그리고 까미유 끌로델》 (정금희, 재원) 참고


글=문하연 시민기자


[출처] 오마이뉴스, 문하연 시민기자(2018.12.13)

■ 찬란한 비극을 품었던 한 여인의 삶 - 까미유 끌로델 [영화]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한 세계적인 예술가 로댕. 그리고 그와 함께 잊어서는 안 될 한 여인, 까미유 끌로델이 있다. 로댕의 연인이자 천재 조각가인 그녀는 출중한 실력을 지녔으나, 그만큼의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 채 쓸쓸하게 인생을 마무리한 인물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너무나도 친숙한 조각가 로댕, 그러나 로댕의 연인이라는 수식어로 불리며 비교적 세상에 덜 주목받았던 까미유. 그녀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사람들은 로댕의 뮤즈였기에 그에 맞는 주목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까미유는 독립적인 조각가로서 당대의 예술을 이끌어간 변혁가 중 한 명이었다. 그렇다면, 왜 까미유는 그리도 애달픈 삶을 고뇌하고 견뎌내야만 했을까. 그 답을 찾아보고자 영화 한 편을 틀었다.

19세기 말, 재능 있는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은 최고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제자로 입문하고 그의 연인이 된다. 또 다른 연인 로즈를 사귀고 있던 로댕과의 관계에서 단지 그의 애인일 수밖에 없었던 까미유 끌로델. 제도권 예술을 대표하는 예술가 로댕에게는 저항하고 인간 로댕에게는 집착하는 까미유의 갈등은 그녀 자신을 혼란에 빠트리고 결국 사회로부터 고립당한다.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했고 많은 여인을 자신의 뮤즈로서 삼았던 로댕의 동반자 중 한 명인 카미유 클로델. 19세의 나이에 43세였던 로댕과 만난 그녀는 로댕에 의해 지옥의 문 제작 조수팀의 일원으로 고용된다. 그러한 인연으로 만나 미술과 조각에 조예가 깊었던 두 사람이었던지라, 그 둘은 금방 사랑에 빠졌고 그런 감정을 예술적 세계에까지 확장해나갔다. 예술적 재능과 작품을 위해서라면 한밤중 혼자 진흙을 캐러 나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녀에게 있어, 연인 로댕의 존재는 멘토이자 든든한 지원군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카미유의 존재 역시 로댕의 예술 작업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서양미술의 오랜 전통인 누드화를 인체 조각으로 표현한 이미지의 발현이 그의 작업에 등장했고, 보다 파격적인 작품을 제작해내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연의 존재였던 것이다. 여기까지의 스토리만 들으면, 그 끝에는 해피엔딩이 자리하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찬란한 듯 찬란하진 않은 깊은 비극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무참히 말이다.

나이 든 여인이 한 남자의 어깨를 감싸고 어디론가 이끌고 있다. 이 중년의 남자는 체념한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발을 떼고 있다. 하지만 미련 한 자락이 남았는지 뒤에 있는 여인에게 뻗은 손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젊은 여인은 무릎을 꿇은 채 그에게 가지 말라고 애원하듯 두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 하고 있다.

그런 비극의 태동은 까미유의 찬란했던 재능 때문이었을까, 로댕도 그녀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질투를 느낄 정도였으니 아마 그것이 발단이었을 듯하다. 하지만 천재 조각가가 탐냈을 만큼의 실력을 지녔던 인물의 존재는 '여성'이었다. 여성 예술가를 위한 어떠한 형태의 학교도 존재하지 않았던 당대의 파리 사회에서, 주류인 남성들 사이에서의 여성은 비주류로서 취급받았다. 아이러니한 불편함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모습 그 자체였던 셈이다.

국가적인 선전으로도 모자랄 한 사람의 특출남이 단지 성별로 인해 무마되어야만 한다니, 이보다 더 억울한 상황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주어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세상의 냉정함이 절실히 느껴졌다. 까미유가 맞닥뜨린 부조리함을 겪어보지 않았는데도, 묵직한 돌덩이 같은 게 얹힌 듯 덜어내지 못할 무거움이 마음속을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이러한 안타까운 상황에서, 까미유는 사랑하는 연인 로댕을 통해 간절한 자신의 꿈의 날개를 조금이나마 펼쳐보려 한다.

그러나 여성 편력이 복잡해 여러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던 로댕의 곁에는 로즈라는 여인도 있었기에, 둘의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결국 1893년, 로댕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은 까미유는 사랑과 예술적 커리어를 무참히 저버린 비운의 여성으로 깨어날 수 없는 비극을 품게 된다. 결국 재능을 비롯해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그녀는 분노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우울증과 피해 의식 및 편집광적 증상을 보이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중압감이 그녀를 버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살아가던 19세기는 편견의 시대였다.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낙인찍은 희생양이 당대 유망주의 자질을 모두 갖춘 까미유였던 것이다. 한 여성의 삶이 이렇게 처절해도 되나 싶을 만큼, 까미유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 잠겨 기쁨보다 슬픔을 더 오래 마주해야만 했다. 번질만큼 번져버린 상흔이 몸 전체를 물들였고 작은 소망마저 암흑으로 점철해 버렸다.

그런데도 까미유는 곧바로 굴복하지 않았다. 평가절하된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오히려 더 당당하게 내세우며 편견에 맞서려 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댕의 연인이라는 꼬리표에 평생을 갇혀 살아야 했지만 말이다. 천부적인 재능과 아름다운 미모,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소유한 예술가로서 까미유는 그 누구보다도 예술가 그 자체로 인정받길 바랐다. 그 과정에서 불합리한 사회와 그 속의 타인이 결국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냈지만, 까미유는 있는 힘껏 버티려 했다. 처절하고 더 처절한 자태로.

한순간에 뒤바뀌어버린 여인의 삶이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을 마주하니, 그녀의 억눌린 해소 불가한 감정이 전이되는 것만 같았다. 속이 텅 비어버린 채로 본인의 마음 상태 같은 텅 빈 거리를 방황했을 그녀의 몸과 마음, 심지어 그림자까지도. 그 모든 것에서 희극이 자리할 틈은 없었다. 단지 가슴 저린 비극만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을 뿐이다. 까미유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여성이라는 불분명한 죄목, 그게 전부였다. 아무리 소리쳐도 그것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은 아우성에 그치고 말았다.

까미유는 정신 이상증세를 보이다 51세가 되던 1912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그렇게, 가족들에게까지 버림받은 채 그곳에서 30년간 고통의 시간을 보내다 7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반면, 로댕은 시대의 조각가로서 급부상해 명성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인과 더 열정적인 사랑을 지속해갔다. 성공과 명예를 거머쥐며 승승장구해 원하던 삶을 살아나간 것이다. 한때 사랑했던 연인의 각기 다른 삶의 흐름이 보다 더 선명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한 때 사랑했던 연인이라는 구절을 적으며 로댕은 까미유를 진심으로 사랑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남긴 했지만 말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가던 세상과 거대한 버팀목이었던 한 사람으로부터 무참히 밀려난 19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여성 조각가 까미유. 이제 그녀를 로댕이라는 틀로부터 꺼내주고 싶다. 더하여 여성이 지닌 열정광기로 치부되었던 당대 사회의 아이러니한 고정관념에서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한 사람 자체를 의미 있게 바라보고 싶다. 비극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독립적인 존재로서 무궁무진한 예술 세계를 창조해 나갔을 까미유의 밝고 설렘 가득한 얼굴이 영화의 마무리에 그려지는 듯,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행하고 있는 찬란한 비극이 영화 전반에 짙게 묻어 있었다.

[출처] 아트인사이트, 최세희 컬쳐니스트 (2020.10.26)

ㅡ 한때 거장이 탐낼 정도의 천재성을 지니고 자신의 세계를 두려움없이 표현했던 여성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 끌로델의 걸작을 부순건 그녀 자신이 아니라 어쩌면 로댕편견에 사로잡힌 세상이 아니었을까?

/ 2021.07.02(금) 편집 택


https://youtu.be/0KdpaQVkGjQ

https://youtu.be/qOhuRdYkh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