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영태(卞榮泰, 1892~1969)
해방 이후 고려대학교 교수, 외무부장관,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영문학자.
재동소학교를 졸업하고 교동고등소학교(校洞高等小學校)를 거쳐 계산보통학교(桂山普通學校)로 전학, 15살에 고등소학교 과정을 마치고,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애국지사이며 목사인 전덕기의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나가면서 이회영(李會榮)의 지도를 받았다.
이회영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해 가자 19살에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가서, 1912년 만주 통화현(通化縣)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제1회로 졸업하였고, 1916년 북경 부근에 있는 협화대학(協和大學) 1년을 수료하였으며, 신흥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1920년 고국에 돌아와 1943년까지 24년 동안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봉직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고려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고, 1946년에는 민주의원 접흡단비서처(民主議院接洽團祕書處)에서 영어비서로 근무한 일이 있으며, 다시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49년에는 대통령특사로 정부승인을 교섭하기 위하여 필리핀에 다녀왔다. 1951년에는 국제연합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 회의에 참석하였고,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제3대 외무부장관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1952년부터 1953년까지는 국제연합수석대표, 1953년에 국무총리가 되어 외무부장관직을 겸임하였다.
1954년에는 제네바정치협상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여 14개 항의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1956년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및 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거치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썼고, 1963년에는 정민회(正民會)를 조직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그는 철저한 규칙생활로 건강관리를 하였고 공사생활이 청빈하였다. 변영만(卞榮晩)·변영로(卞榮魯)와 함께 이들 3형제는 일세(一世)의 기재(奇才)로서 옛 중국의 당송팔대가이던 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 3부자에 비겨 한국의 3소(三蘇)라고까지 불리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보성고 100주년 '10대 인물' 선정
(서울=연합뉴스) 보성교우회(회장 김직승)는 10일 보성고 개교 100주년을 맞아 작고한 동문 가운데 훌륭한 업적을 남긴 '보성 100년 10인'을 선정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소설가 염상섭·이상 선생과 미술사학자 고유섭, 50~60년대 인기배우 김승호 씨가 선정됐고 독립유공 분야는 2.8독립선언 주동자 송계백,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의 법무부 참사 등으로 활동한 엄항섭 선생이 각각 뽑혔다.
언론분야에서는 동아일보 초대 편집국장을 지낸 이상협, 공직에서는 국무총리와 외무부장관을 지낸 변영태, 교육에서는 초대 고려대총장을 지낸 현상윤, 기업경영 분야에서는 LG그룹과 GS그룹의 모체인 럭키그룹 공동창업주 허정구 씨가 선정됐다.
보성교우회는 이들 10인이 대한민국 건국과 국가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을 기리기 위해 개교기념일인 9월5일 교내에 착공하는 '개교100주년 기념관'이 완성된 뒤 이들을 헌액하기로 했다.
[출처] 연합뉴스 (2006.08.10)
■ 청렴한 공직자의 사표, 변영태 외무부 장관을 아십니까?
공무원은 청렴과 성실로써 국민을 하늘처럼 받들고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질 각오로 일하라!
'부평삼변(富川 三卞)'을 아시나요? 흔히 형 변영만과 아우 변영로 그리고 변영태를 일컬어 ‘부천 삼변’이라 한다. 최후의 조선 한학자 변영만, 6·25전쟁 직후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을 지낸 변영태, 그리고 시인 변영로 등 3형제를 일컬는 말이다. 이들은 모두 인천 부평 사람이면서, 근·현대 시기 자신의 길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인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건국 이후 역대 장관이나 정치인들 중 가장 청렴한 인사로 대개는 일석 변영태(逸石 卞榮泰)를 꼽는다. 그는 영어학자이자 정치가다. 청년시절 그는 1912년 독립 투사 이회영 형제가 건립하고 운영했던 '만주 신흥학교 (新興武官學校)'를 졸업했다.
국내에서 '중앙중학'과 '보성전문학교' 등지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8.15 해방 후 고려대에서 영어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 직후인 1951년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필리핀 특사로 간 것이 인연이 돼 외무부장관에 취임했다. 훈시 때마다 “공무원은 청렴과 성실로써 국민을 하늘처럼 받들고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질 각오로 일하라”고 독려했다.
1954년 제네바정치협상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대한민국 주권하의 통일 등 15개 항의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이 때 5대 국무총리가 됐다. 변 총리하면 따라다니는 별명과 얘기가 수 없이 많다.
“여러분! 총리도 장관도 국민의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나라가 어려울때 일수록 공직자들은 국민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올바른 몸가짐을 갖춰야 합니다."
"나는 공직에 있을때 새벽이면 묵상을 하며 오늘도 나라와 국민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곰곰이 성찰했다.”
그 당시 달러가 정말 귀하고 나라의 재정이 어려울때였다. 1949년 대통령 특사로 필리핀에 갔다 돌아온 그가 여비 사용 명세서와 함께 남은 돈 10달러를 대통령에게 반납한 일화는 유명하다. 공무 여행중 그는 세탁비를 아껴야 한다며 옷을 직접 빨아 입었다.
끼니때마다 싸구려 중국집을 찾아 다니며 밥값을 아꼈다. 그의 신분을 알아 차린 식당 주인이 일국의 특사가 이런 데서 식사를 하느냐고 묻는 바람에 나라의 체통을 생각해서 비싼 요리를 시켜 먹었다는 수행보좌관이던 김용식(金溶植) 전 외무장관의 술회도 있다.
그는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며 수백 달러에서 많게는 3천달러에 이르는 여비를 국고에 반납했다. 출장 가방에는 옷 한 벌 외에 반드시 아령을 넣었던 일 등 일화도 무성하다. 그는 어린 시절 허약한 체질에다 불치병으로 고생했는데 아령을 열심히 해 ‘아령 전도사’를 자처했고 경보대회에 나가 우승한 일도 있다.
형 변영만과 다르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퇴근 후에도 자정까지 혹시나 대통령의 호출이 있을까봐 정장차림을 유지했고 이는 해외출장때도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전화를 해오면 차렷자세로 받곤했다. 대통령에 대한 충성은 아첨과 자리얻기 위함이 아니라 대통령이 국정을 원만히 운영하도록 성실하게 보좌해야 한다는 진정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6.25전쟁 때에는 그는 전쟁 당사국임에도 전쟁지원을 나온 연합국을 향해 할 말을 했다. 전쟁 포로와 관련하여 민족적 자존심과 함께 통일을 생각했다. 일본의 독도 침탈야욕에는 의연하게 맞섰다. 한국은 그는 대한민국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갖고 있으며 한국이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권리를 증명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하는 첫 공식 정리해서 일본에 전달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영어학원 강사로 생계비를 마련했다. 1969년 3월 10일 손수 연탄을 가는 청빈한 삶을 누리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77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청렴을 목민관의 제1 덕목으로 여겼다. 청렴은 공직자 본연의 임무이자 모든 선과 악의 근원이며 따라서 청렴하지 않으면 목민관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조선조 고종 때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청백리 142명의 사례가 담겨져 있다. 또 ‘역대 청백리상'이란 책에는 고조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청백리 216명의 거룩한 이름이 올라 있다. 하기야 반 만 년의 역사에 고작 2백여 명의 청백리뿐이라면 청백리의 길이 쉽지 않음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우리 사회에는 위인이나 청백리들의 평가에 너무 가혹하다. 선진국들 가운데 우리나라만큼 길거리에 동상이나 상징물이 적은 나라도 없을 것이다. 동상은 주인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세의 교육을 위해 세우는 것이다. 진정한 영웅이나 위인이 그리울 때에 변영태 선생이 다시 한번 조명되는 것은 그의 뛰어난 애국심, 청렴결백, 권력과 자리(직위)에 대한 무(無)욕심, 대쪽같은 공무집행 자세, 하나도 공무 둘도 공무(先公後公) 등의 리더십 때문일 것이다.
[출처] 행복한 파트너 이상복행정사사무소
/ 2021.06.23 편집 택
■ 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③ 변영만·영태·영로의 후손들 [발굴 인터뷰]
“청렴한 卞氏三絶, 후손들은 후광 업지 못해”
“세 분 할아버지는 지체 높게 사셨지만 한 분은 사찰로 산으로 떠돌아다녔고, 한 분은 강직하게 자기 길만 가셨고, 한 분은 평생 술에 취해 사셨어요. 당시 어린 저희와 대화가 거의 안 됐어요. 하지만 그런 先覺者가 계셨기에 오늘날 한국사회의 뿌리가 깊어진 것이 아니겠어요?”
첫째 변영만, 日帝 법관을 때려치우다!
둘째 변영태 總理 “대학에서 공부했으니 이제 고향에서 농사나 지어라”
셋째 변영로, 물부리·돋보기·사전·요강과 평생을 함께 해
‘변영만은 성격이 괴팍했고, 변영태는 곧고 성실했으며, 변영로는 좀 과격한 성미였다’
[편집자 주]
20세기 한국의 문인만큼 치열하게 산 이들도 드물다. 나라를 잃었고 문자를 빼앗겼으며 이념의 소용돌이와 전쟁의 極限을 모두 체험했다. 더러는 親日로, 더러는 붓을 꺾고 순수와 이념문학의 길로 흩어졌지만 이들의 내면세계는 쉽게 재단할 수 없다. 이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자식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할까. 한국 근대 문인가족에 대한 연구는 매우 빈약하다. 생존한 가족의 입을 통해 문인들의 인간적 면모와 일화를 소개한다.
‘논개’의 시인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는 위로 3명의 누나와 2명의 형, 그리고 1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이 중 아들 삼형제는 중국의 3소(蘇·소순, 소동파, 소철)에 빗대 변씨삼절(卞氏三絶)이라 불린다. 저마다 한국 근·현대사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모두 일제시대 때 창씨개명, 신사참배를 거부한 대쪽들이다.
수주의 큰형인 산강제(山康濟) 변영만(卞榮晩)은 한학자이자 성균관대 교수를 역임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재임 시절, 반민특위 재판장을 지냈다.
수주의 둘째형인 일석(逸石) 변영태(卞榮泰)는 영어에 능통해 서울 중앙학교 영어교사로 오래 재직하다 해방 후 고려대 교수가 됐다. 이승만 정권 시절, 외무장관으로 발탁됐고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다.
수주 변영로의 본명은 영복(榮福)이었다. 시를 발표할 때 ‘수주’ 혹은 ‘변영로’란 이름을 썼는데 60세 때인 1958년 서울지방법원의 재판을 통해 ‘영로’로 정식 개명했다. 수주라는 아호는 맏형 변영만의 것이었으나 변영로가 달라고 청해 갖게 됐다고 한다. 수주란 이름은 고려 때 고향(경기도 부천)의 옛 명칭이다. 현재까지 부천시 고강동에는 밀양 변씨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고, 바뀐 도로명 주소도 ‘수주로’다. 삼형제 묘가 모두 이곳에 있다.
기자는 수주문학상 운영위원장인 시인 구자룡씨와 밀양 변씨 대종회, 변씨 삼형제 후손들을 만나거나 전화로 통화해 행적을 물어보았다. 1세대 후손들은 대개 사망했거나 해외에 거주하고 있어 연락이 닿지 않았고 몇몇 후손은 인터뷰를 꺼려 취재가 쉽지 않았다.
변영만·영태·영로 삼형제의 ‘거대한’ 위상과 비교하면 후손들은 대체로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변영로의 막내딸 인숙(仁淑·미국거주)씨를 제외한 1세대 후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고 했던가. 변영만씨의 장손인 호달(鎬達)씨는 “세 분 할아버지는 사회 칭송을 받았지만, 후손들은 볼 것이 없다. 후광을 업지 못했고, 업혀 주려고 노력도 안 하셨다”고 말했다. 그 역시 경기 부천에 거주하고 있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후손은 이런 말을 했다.
“선대에 꽤 재산이 많았다고 해요. 그런데 이 세 분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재산을 다 없앴다고 합니다. 그분들이 후손을 위해 뭘 해 준 게 없어요. 자녀들 취직 하나 안 시켰어요. 그래서 지금 사는 것들이 다 지질해요.”
변영만·홍명희·최남선과 더불어 ‘京城三才’
변영만(1889~1954)은 아버지 변정상(卞鼎相)이 경흥군수로 있을 때(10세) 시를 지었을 정도로 머리가 트였다고 한다. 법률가·학자·문필가·시인 등으로 한국 근대사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고문(古文)의 대가로 일컬어질 만큼 왕성하게 한문 문장을 창작했다. 그러나 한국 근·현대문학 장르에 한문학(漢文學)이 주도권을 잃던 시기여서, 처음부터 현대시로 나갔던 동생 변영로보다 덜 부각됐다.
한때 정인보(鄭寅普), 최남선(崔南善)과 함께 삼총사라 불릴 정도로 교분이 두터웠으나 최남선이 일제와 협력하며 다른 길을 택하자 평생 등을 돌렸다고 한다. 최남선과 길에서조차 외면할 정도로 의절했다. 혹자는 변영만과 홍명희(洪命熙)·최남선(혹은 정인보) 세 사람을 일컬어 ‘경성삼재(京城三才)’라고 불렀다.
변영만은 16살 때(1905년) 한성(漢城) 법관양성소에 다녔으며 1908년 보성전문학교 졸업과 동시에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해 23세까지 법관생활을 했다.
목포 법원에 있을 때 일본 통감부 모자를 쓰기 싫다고 집어던지고 미련없이 법복을 벗었다고 한다. 그렇게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가자 아버지 변정상이 아들 등을 두드리며 “과연, 내 아들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2년 전 528쪽 분량의 《변영로 연구》를 펴낸 시인 구자룡씨는 “판사를 그만두고 상해에서 다시 남양으로 떠돌다가 국내로 돌아왔다. 이후 법학 대신 한학과 영문학을 연구했다. 그는 잡지와 번역서 등을 통해 국민정신을 각성시키고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경계시키는 일에 힘썼다”고 말했다.
이후 서울 수송동에서, 혹은 신의주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는 얘기는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변론(辯論)을 맡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밀양 변씨의 한 후손은 “변호사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각 지방의 사찰과 막내 여동생 변영애(卞榮愛)의 집 등으로 방랑했다. 해방 후 정부가 서울 미아리에 마련해 준 집에서 운명했다. 시인 구자룡씨의 말이다.
“한학과 영문학, 산스크리트어(梵語)의 권위자로 한때 역경원(易經院)에서 일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한 연구자의 자료를 보면, ‘변영만은 성품이 까다롭고 상스러운 음식을 싫어했으며, 골동품 모으기를 좋아했으나 싫증을 잘 느껴 팔기를 잘했다. 그리고 이미 읽은 책과 필요한 책을 서점에서 맞바꾸는 기인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기자와 만난 한 후손은 이런 말을 했다.
“한학자이자 법률가로서 이름이 높았다고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서울대 법대 전신인 한성법관양성소를 나왔는데 2014년 서울대 법대동창회에서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으로 선정하기도 했어요. 신사참배도 안 하시고 창씨개명도 안 하셨으니 일찍 법복을 벗을 수밖에 없었어요.
영만 할아버지는 슬하에 외아들을 뒀는데 그 아들이 머리를 심하게 다쳤어요. 뇌손상을 당하면서 선대의 정신적 유산이 다 단절돼 버렸습니다. 또 (영만 할아버지가) 역마살이 있었는지 사찰을 전전하며 본가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숙들이나 그 아래 6촌들과 자연 거리가 멀어졌어요. 세 분 할아버지가 한자리에 계신 것을 본 일이 없어요.”
변영태, 신생 독립국의 외무장관과 총리가 되다!
변영태(1892~1969)는 대한민국 제3대 외무부 장관(1951~1955)과 제5대 국무총리(1954·외무장관 겸임)를 역임했다. 신생 독립국의 외무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내면서 중요한 업적을 이뤘다는 평가다.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했는데 서울 중앙학교에서 영어교사로 30년을 근무했다고 한다. 일제 말에는 창씨문제로 낙향해 3년간 농사를 지었다.
해방 이후 고려대에서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가 1946년 이승만 대통령에게 발탁돼 외교관의 길로 들어섰다.
변영태 장관의 첫 외교업적은 필리핀과의 수교였다고 한다. 대외교섭의 첫 시도가 필리핀이었는데 당시 필리핀은 한국과 비교해 모든 면에서 앞선 나라였다. 이 대통령이 크게 칭찬했다는 기록도 있다. 독도에 대한 한국외교의 기본입장도 그에 의해 확고해졌다. 1954년 독도에 등대를 설치하고 ‘태극기’, ‘한국령’의 표지를 설치했다.
밀양 변씨 대종회에 따르면, 변영태가 허약한 체질에다 불치병으로 고생했는데 1년간 자신의 오줌을 받아먹고 완치됐다고 한다. 아령을 열심히 해 ‘아령 전도사’를 자처했고 경보대회에 나가 우승한 일도 있다. 형 변영만과 다르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변영태는 슬하에 4남3녀를 두었다. 6·25 당시 서울 공대생이었던 맏아들(변두수)은 인민군에게 총살당했다. 둘째(변지수)와 셋째(변혜수)는 일찌감치 미국에 이민을 떠났다. 넷째(변종수)는 휘문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다고 한다. 변영태의 아들들은 장수하지 못하고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한 후손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관, 총리까지 한 유명한 할아버지이지만, 집안을 위해 해 준 게 없어요. 서울 법대를 나온 한 친척이 외무장관 시절의 영태 할아버지를 찾아간 일이 있어요. 인맥을 통해 자리 하나 잡을까 싶어서 찾아간 거지요. 영태 할아버지 왈(曰), ‘대학에서 공부했으니 이제 고향에 내려가 농사나 지어라’고 했답니다. 서울 법대를 나온 집안 조카에게 농사를 권하신 분입니다. 그 말을 듣고 그 조카는 화가 나 미국 이민을 갔다고 해요.
누구는 집안 사람 중에 한 명만 출세하면 사돈의 8촌까지 다 거둔다고 하는데 우리 집안은 그런 게 전혀 없었습니다.”
—정말 청렴한 분이었네요.
“청렴결백했지만 (집안이) 다 죽어가는데… (집안에) 전혀 도움이 안 됐지요.”
이런 일도 있었다. 형 변영만이 세상을 떠나자 서울에서 온 장례행렬로 장사진을 이뤘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경기 부천은 ‘깡촌’과 다름없었다. 장례행렬이 변영만의 선산까지 가기에 길이 엉망이었다. 질척하고 비좁은 논두렁, 밭두렁을 건너야 했다. 한 후손의 이야기다.
“장례행렬이 엄청났어요. 당시 장화 없이 못 다닐 정도로 길이 질척였는데, 고향 사람들이 변씨 할아버지들을 엄청 욕했어요. 자기 고향에 길 하나 안 닦아 놨다고요. 비석 세울 때도 차가 논두렁에 다 빠졌잖아요. (차가 고장이 나) 수리비를 (문중에서) 다 물어줬어요. 남들에겐 곧고 기인이라 평가되지만… 그래요, 기인은 맞지요.”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그 일 있고 얼마 뒤, 고향 파출소장이 윗사람에게 청해 도로포장을 추진했다고 해요. 자기 딴에는 그런 공을 자랑하러 외무장관이던 영태 할아버지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태 할아버지가 ‘누가 너더러 도둑놈 잡으랬지 도로를 닦으라고 했느냐’면서 되레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그 파출소장이 결국 해임됐다는 얘기도 전해져요. 그런 분이 무슨 고향발전을 시키겠어요?”
변영로, 또 다른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 떠나
변영로(1898~1961)는 1916년 기독교청년회관 영어반을 졸업하고 그곳의 영어반 교사가 됐다. 2년 후에는 모교인 중앙학교의 영어교사가 됐다. 이 학교에 둘째형 변영태가 재직 중이었다고 한다.
1927년 이화여전 교수가 됐다. 앞서 1924년 시집 《조선의 마음》을 내고 문명(文名)이 높아지자 이 대학이 초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시집에 ‘논개’가 담겨 있다. ‘논개’는 1922년 《신생활》 4월호에 처음 실렸다.
구자룡 시인은 “이화여전에서 영문학과 조선문학을 가르쳤다. 지금의 혜화동 네거리 근처의 혜화초등 앞 조그만 한옥에서 거주했는데, 일설에 따르면, 장택상(張澤相)이 사준 집이라고 한다. 이 집에 1931년까지 거주했다”고 밝혔다.
변영로는 1931년 미국 산호세 대학에 들어가 2년간 수업 후 귀국했다. 유학은 장택상의 후의로 이뤄진 것이라고 한다. 1933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는데 취재보다는 일본에서 오는 통신문 번역일을 주로 했다. 1936년 9월 일장기 말소사건에 관련돼 퇴사했고, 잠시 투옥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변영로의 아들 천수(天壽·작년 11월 작고)씨가 쓴 저서(《강낭콩보다 더 푸른 그 물결 허드슨 강으로 흘렀네》)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195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대회에 변영로는 한국대표 자격으로 참여했다. 출국에 앞서 변영로와 시인 모윤숙, 김광섭이 인사하고 있다.
수주가 《동아일보》 자매지인 《신가정》 주간으로 있을 때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폐간당하자, 수주는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모교인 양정고등보통학교 운동복을 입고 달리는 사진을 구했다고 한다. 그는 손기정의 상반신을 잘라 두 다리만을 확대해 ‘세계를 제압한 두 다리’란 제목을 붙여 잡지 표지에 게재했다. 이를 본 일본 형사들이 수주를 찾아왔다. 그는 태연히 이렇게 말했다.
“손 선수가 무엇을 가지고 세계를 제패했소. 머리를 가지고 했겠소, 팔로 했겠소? 그의 무쇠 같은 두 다리로 세계를 제패한 것 아니겠소? 그러니 화보의 효과를 100% 내려고 그의 두 다리만을 확대하여 게재한 것이오.”
일경(日警)들은 잘려나간 사진에 일장기가 있다며 사진 윗부분을 내놓으라고 호통쳤다. 사원이며 사환 할 것 없이 사내의 모든 사람이 동원돼 쓰레기통을 뒤졌으나 사진이 없었다. 일경들은 저러다가 틈을 봐서 도망치지나 않을까 생각했는지 수주의 양옆을 바싹 따라다녔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상반신 운동복 사진에 다행히도 일장기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일로 변영로는 결국 《동아일보》를 떠나게 됐다.
변영로의 주위를 항시 떠나지 않은 물건이 있었는데, 물부리·돋보기·사전(관 속에 넣음)·파리채·재떨이·요강이었다고 한다. 또 할머니가 편애해 기른 탓에 성격이 몹시 까다로웠다. 이어령(李御寧) 전 문화부 장관에 따르면, 수주는 예술적 성격에다 항상 감정이 충만해 신분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사람을 대했으며 싫고 좋음이 분명했다고 한다. 칭찬과 욕설, 따귀 갈기는 것 등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는 분명한 성격이었다. 정치에는 통 관심이 없었고 자유당을 싫어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존경했다.
변영로와 가난한 두 아내
변영로는 15세 때 17세의 아내 이흥순과 결혼, 3남2녀(鐵壽 成壽 眞壽 石壽 恭壽)를 낳았다. 1934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양창희와 결혼해 3남1녀(甲壽 文壽 千壽 仁淑)를 두었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인숙씨를 제외하고 형제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고(故) 변천수씨의 저서에 배다른 형제들에 대한 회고가 실렸다.
〈…이복 동복의 구별의식이 전혀 없다. 그렇다고 아기자기한 형제애도 없다. 이복 남매들은 2년 터울이고 동복 삼형제는 연년생이라고 올망졸망한 우리 남매들은 배가 고플수록 다툼이 잦아졌다. (중략) 시인의 후처로 들어와 사는 어머니의 신접살림은 구절양장을 넘듯 기가 막히게 힘들었다. 아버지는 시 하나만 잘 썼을 뿐 가난했다. 아버지는 가난뱅이도 모자라 술주정뱅이까지 겸했다. …〉
〈… 아홉 식수가 기거하던 흑석동 솜틀 방앗간집의 문간방은, 낡디낡은 원룸만도 못한 단칸방이었다. 너무 허술해 바람이 마구 휘젓고 들어왔다. (중략) 이런 상황에서 대란이 일어났다. 맏이인 철수형이 집을 나가 홀로 끝없는 방랑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중앙고보를 나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철수형은 장남답게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천재였다. 그런 아들이 집을 나가 버렸으니 집안 분위기는 아주 침울했다. 설상가상으로 둘째 누나 석수가 장티푸스를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줄초상이 난 듯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
〈… 아버지 삼형제는 하나같이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바람에 식구들의 고생이 갑절로 늘어났다. 당시 총독부는 가난한 가정에 구호미를 배급했지만 창씨개명을 안 한 조선인에게는 그마저도 제외했다. 나(변천수)도 학교에서 벤첸수(일본식 발음)로, 개명을 거부한 집안의 자식으로 낙인 찍혀 알량한 급식 배급의 특혜를 누리지 못했다. …〉
염상섭은 수주가 세상을 떠나자 1961년 3월 17일 《민국일보》에 변영로와 두 아내에 대한 이런 글을 썼다.
〈… 젊었을 적 한때 매일같이 잔을 나누고 수주의 집 내실에까지 끌려 들어가서 반야(半夜)가 기울도록 대취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도 기억에 새롭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싫은 내색 한 번 보인 일 없이 젊은 주붕(酒朋)들의 술치다꺼리를 하여 주시던 무던한 그 부인도 고마웠거니와, 그분이 돌아간 뒤에 또한 전 부인에 못지않은 현 부인을 맞아 해방 후로는 유복한 가운데 말년을 보낸 것도 고맙고 다행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
변씨 삼형제의 성격
변씨 삼형제 가운데 명정(酩酊)의 풍류는 변영만과 변영로가 같지만, 변영태는 근검절약했다고 한다. 특히 ‘변영만은 성격이 괴팍하고 기인적이었고 변영태는 곧고 성실했으며 변영로는 좀 과격한 성미였다’고 전해진다. 모두 가난하게 살았고 자유분방한 사고를 지녔지만, 저속한 말을 쓰면 난리가 났다.
세 사람의 사이는 어땠을까. 깊이는 알 수 없으나 이런 일이 변씨 문중에서 회자한다. 밀양 변씨 한 인사의 이야기다.
“구전(口傳)으로 들은 얘기인데 이승만 대통령이 변영만 할아버지에게 법무부 장관을 시키려고 했대요. 그러나 완강히 거절을 하셨답니다. 당시 낙원동에 살 때였는데 이 대통령이 영만 할아버지 마음을 돌리려고 쌀이니 숯이니 보냈는데 그걸 집안에 들여놓지 못하게 했대요.”
이 인사는 “그래도 안 되자, 영만 할아버지를 움직이게 하려고 영태 할아버지를 외무장관에 기용했는데 그 일로 형제간 의가 갈라졌다”며 “그 뒤로 영만·영태 할아버지가 한자리에 계신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변영만과 변영로는 사이가 어땠을까. 형 변영만이 1950년 반민특위 재판장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는 한때 절친했으나 변절의 이유로 멀어진 최남선을 직접 심리했다고 한다. 6·25 사변이 나고 변영로가 부산으로 피란을 갔는데 어느 날 최남선과 가까운 사람이 찾아와 이런 말을 했다.
“육당이 전진(戰塵) 속에서 지은 시조를 모아 출판하려는데 서문을 꼭 수주에게 써 달랍디다”
변영로는 잠시 고민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육당으로 말하면 문학인으로서 저명한 친일파이지만, 그것을 육당에게 모두 뒤집어씌울 필요가 있나. 하지만 사적으로는 사백(舍伯·변영만)과의 관계도 있고 하니 중화(中和)적인 견지에서 쓰겠다.”
그런데 육당의 시조집이 여러 해를 두고 나오지 않자 변영로는 자신이 쓴 서문이 잘 보존되어 있는가를 매우 궁금히 여겼다고 한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변씨 삼형제는 각기 다른 영역에서 독특한 족적을 남겼다. 형제들은 자유분방하면서도 서로를 구속하지 않으며 저마다 개성 있고 지조 있는 삶을 택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불결·불순·부정·불의에 맞서거나 완강히 혐오했다. 그러나 그런 강직과 방랑·풍류를 지켜보던 가족들은 가난했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 후손의 이야기다.
“세 분 할아버지는 지체 높게 사셨지만 한 분은 사찰로, 산으로 떠돌아다니셨고, 한 분은 강직하게 자기 길만 가셨고, 한 분은 평생 술에 취해 사셨어요. 당시 어린 저희와 대화가 거의 안 됐어요. 하지만 그런 선각자(先覺者)가 계셨기에 오늘날 한국사회의 뿌리가 깊어진 것이 아니겠어요?” / 월간조선
/ 2021.06.23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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